[Opinion] 초록의 여러 색 [영화]

글 입력 2022.08.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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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히 우거진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은 초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색채가 주는 특정한 이미지. 활력, 생기와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초록이 주는 그 이미지를 한 가지 단어로 제한하고 싶지 않아 비슷한 기운을 가진 언어의 연상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


푸릇푸릇하고,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는 기분 좋게 귓가를 스쳐 지나가고 평소라면 거슬려 했을 풀벌레들의 울음마저도 듣기 좋은 소음으로 들어 넘길 수 있는 상태. 경험해본 적 없는, 시골에서 보내는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강아지들이 하천을 따라 달리고, 논밭을 가득 채운 초록 식물들의 향연이 재생된다.


초록이 주는 이미지는 한없이 산뜻하기만 하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흰 옷감을 물들이기 위해 사용했던 비소, 즉 화려한 빛깔 뒤 마주했던 독의 색이어서 ‘악’의 상징으로 쓰인다지만, 여전히 내게 초록은 자연이며 행복이고 희망이다. 그래서일까, 초록이 두드러지는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들의 밝은 미래를 섣부르게 예측하곤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의 면만이 존재하겠는가. 자연을 이루는 숲도, 그 숲을 이루는 나무도 균일한 색을 지니지 않는다. 바탕은 같은 초록이라 할지라도 내리쬐는 햇빛에 따라,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시시각각 나뭇잎들의 색은 변화한다. 아주 짙어 검은색처럼 보이기도 하고, 너무 눈이 부셔서 흰색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황금빛 옷을 한 겹 더 입은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 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사건을 공유하고 있지만 각자 다른 아픔으로 다가오며 그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과 소요되는 시간은 모두 다르다.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프리다의 그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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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과 울창한 숲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한 가정에서 프리다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문제가 있다면 스스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마와 함께 살던 바르셀로나의 집에서 짐을 챙기는 어른들, 카탈루냐에 있는 외삼촌 에스테베와 외숙모 마르가의 집으로 자신을 데려가는 어른들. 그들은 인형을 안고 혼자 서 있는 아이에게 어떠한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변화를 지켜보는 프리다는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울지도, 웃지도 않는 프리다의 얼굴 너머 어른들의 언어가 들려온다. 엄마를 잃은 아이에 대한 배려 없이, 아이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단정을 토대로 프리다의 처지를 논한다. ‘When you are young, they assume you know nothing.’이라는 가사가 떠오른다. 어리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하지만 모두 그들의 가정일 뿐이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모면하고자, 불편한 상황을 최대한으로 미루기 위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만들어낸 가정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알고 있다. 아이들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걸어온 길이지 않은가. 그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복잡했고 슬펐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여느 동화와 달리 구박받지 않는다는 점이겠다. 비록 프리다를 배제하고 그의 환경을 결정했지만, 에스테베와 마르가는 프리다에게 잘 대해준다. 여기서 ‘잘’ 대한다는 것은 그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마시기 싫은 우유를 대신 마셔주고 넘어져 다친 곳을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것이다. 그들도 프리다에게 부모가 되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다만, 6살 아이에게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그 모든 과정이 버거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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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관심에 기뻐하다가도, 사촌 동생 아나와 자신이 받는 사랑의 차이를 실감하면 또 다시 결핍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핍은 아나에 대한 질투로 이어지고,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숲 속에 동생을 두고 홀로 돌아온다. 이어지는 어른들과의 갈등 속에서 프리다는 떠나기로 한다. 여기선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곧바로 자신을 찾으러 나온 가족들을 보고 프리다는 그들 곁으로 돌아가지만, 떠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외로움과 상처는 지워지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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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는 알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자신이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숲속에 놓여있는 성모상을 찾아가 엄마에게 말을 걸고 사촌 동생과의 소꿉놀이에서 엄마를 따라 한다. 짙은 화장을 하고 검은 숄을 두르고 있는 모습, 담배를 피우며 누워있는 모습은 프리다가 기억하는 아픈 엄마다. 이처럼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온몸으로 드러내지만,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또한 듣고 싶었다. 엄마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고, 그때 엄마의 곁에는 누가 있었는지. 왜 딸인 자신이 엄마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하지 못했는지. 훨씬 오래전에 이루어져야 했을 대화가 없어, 프리다는 긴 시간 동안 외로웠고 어른들은 혼란스러웠다. 끝내 프리다가 질문을 던지기까지, 그 사건을 감당해야 하는 모두가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

 

몇 개월 전 읽은 칼럼에서는 ‘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비교적 흔한 주제임에도 지금까지 꽤나 세세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색을 정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천문학이다. 천문학에서의 색은 단순히 우리 눈에 비치는 검정, 파랑, 빨강, 노랑 같은 것들이 아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파장 사이의 밝기 ‘차이’를 색 지수라 하고, 이를 줄여 ‘색’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다. 이별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과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의 차이. 그리고 어른들의 언어와 아이들의 언어 사이의 차이. 햇빛에 따라 변화하는 나뭇잎의 색처럼, 어느 순간에는 이 간극이 좁아져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순식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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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잃은 프리다와 형제를 잃은 에스테베, 새로운 자식을 받아들이는 마르가와 언니가 생긴 아나. 이들은 서투르고 때로는 조금 이기적이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그들은 가족이 될 것이다. 수많은 차이를 넘어선 사랑이 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프리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을 때, 서로를 껴안을 수 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흘린 눈물이든, 결핍에 대한 깨달음 또는 드디어 느낀 가족의 사랑 때문에 흘린 눈물이든 그들은 얼마든지 닦아주고 기다릴 수 있다. 결국엔 같은 초록색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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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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