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

10년간 변치 않고 나를 이루는 것들
글 입력 2022.07.2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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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우리 집 작은 방은 도서관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나무 책상과 벽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 책장 두 개는 방의 절반을 차지했다. 아빠가 대학 시절부터 공부한 철학, 인문학 서적부터 사촌들이 청소년기에 보던 책들, 나와 동생이 태어나면서 새롭게 사들인 전집과 도감, 그림책, 동화, 만화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덕분에 편식하지 않고 여러 분야의 책을 만나게 됐다. 커가면서 그 책들을 모조리 읽어버렸고, 그런 나를 따라 동생도 자연스럽게 독서를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숙제가 끝나면 집에 있는 책을 도장 깨기를 하듯 읽어 댔다. 같은 책을 몇 번이나 돌려 읽으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밤을 지새웠다.

 

같은 책을 읽는 게 지루해질 때쯤 전학을 갔다. 육교를 건너야만 등교할 수 있었지만 도서관만큼은 엄청났다. 이전 학교와는 달리 책도 많고 독서할 공간도 여러 개였다.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까슬한 털이 깔린 바닥 위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개미 집처럼 구멍을 뚫어 놓은 작은 방을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자주 도서관으로 향했고, 다람쥐처럼 책을 가득 쌓아두고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읽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지역의 큰 도서관에 가게 됐다. 학교 같은 건물 전체가 도서관이었다. 누워서 책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재밌는 책이 많았다. 엄청난 신세계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아빠를 따라 대출증을 만들고 더 넓은 지식의 바다를 만나게 됐다.

 

*

 

마찬가지로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나는 주말 저녁에는 꼭 음악 방송을 봤다. 카펫 위에 앉아서 얌전히 노래를 듣다가 댄스 무대가 시작하면 푸우 모형이 달린 장난감 망치를 거꾸로 들고 소파 위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갔다. 특히 가수 이정현을 좋아했다. 그 당시 무대는 유치원생의 눈에도 센세이션하고 강렬했나보다. 음악이 시작하면 마이크용 장난감을 던져버리고 가수의 눈빛 하나까지 살펴 가며 춤을 따라하고 노래를 불렀다. 소파 등받이까지 올라가서 가수 놀이를 하던 때가 내 춤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흥이 넘쳐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자연스레 그 흥미를 이어 나갔다. 율동이 탈춤을 만났고, 댄스 스포츠로 이어졌다. 중학교에 가서는 방과 후 수업으로 걸스 힙합, 방송 댄스를 배우면서 취미 목록에는 댄스가 추가되었다.

 

 


문학소녀와 댄싱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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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태어난 후에야 스스로의 본질을 찾아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완전히 공감한다.

 

15살.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불리는 혼돈의 중2.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취향과 가치가 빅뱅이 탄생하듯 폭발했다. 이 시기는 나라는 사람의 근간이 된 때다. 내 관심사와 가치관, 이상향, 삶의 이유 등을 고찰하고 따져보았다. 연관성 없어 보이는 두 별명도 이때 탄생했다.


여름날의 새벽. 그때는 한창 대용량 드라이브에 있는 팝송들을 CD로 구워 듣는 게 취미였다. A로 시작하는 아티스트들을 다 듣고 난 뒤 B로 시작하는 아티스트들의 음원을 들을 차례였고,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Oops I did it again’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그 강렬한 전주에 눈을 뜬 나는 원하는 대로 춤을 추고, 음악 안에서 완전히 주인공이 되었다. 내 몸 안에서 다양한 동작이 나오는 게 신기했고, 짜릿했다. 그렇게 혼자서 춤추며 안무를 만들게 됐다.

 

어느 날은 DJ OKAWARI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고 있었다. 생각이 먼저인지 행동이 먼저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학 문제집을 풀다가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내 방 전체를 꽉 채우고 넘칠 만큼의 움직임을 만들며 무아지경의 상태로 춤을 추었다. 서정적인 음악과 하나 되어 내 몸과 마음을 채우는 감수성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아주 즐겁고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노래가 끝나고 거친 호흡을 몰아 내쉬면서 방금 벌어진 일을 멍하니 바라봤다. 춤으로 해방감을 맛보는 게 무엇인지 강렬하게 느끼게 됐고 그날 이후로 나는 완전히 춤에 매료되었다.

 

청소년이 된 이후로도 아빠는 가끔 책 한 권씩을 선물해주셨다. 나와 동생은 여전히 독서를 좋아했고, 책 선물에 가장 기뻐했다. 필요한 약을 꺼내먹듯이 힘든 일이 있으면 책에서 위로받았고, 모르는 게 있어도 책을 찾아봤다. 독서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얻고, 글쓰기로 감정을 표현하며, 사색했다. 그렇게 미술과 철학을 만났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춤을 췄다. 음악과 교감하며 나만의 동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창작 욕구를 키워주었다. 예술적인 승화와 치유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나만의 세계를 넓혀갔다.

 

이렇듯 15살의 새벽은 나라는 사람의 기초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독서와 춤은 그 자체로도 즐거움이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발산하게 했다. 쉬는 시간에 짬짬히 책을 읽고, 자주 글짓기 대회에 나가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문학소녀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고, 축제나 학예회가 끝나면 댄싱머신이라고 불렀다. 친구들은 내 취미를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상반되어 보이는 두 페르소나는 어릴 때 부터 키워온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생각을 사수하는 사람


 

몇 달 전부터 창고에 박혀있는 다이어리와 아이디어 노트를 꺼내고 싶었다. 학창 시절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흐릿해져서였다. 짐을 다 들어 올리고 꺼내는 게 막막해서 계속 미루다가  ‘Project 당신 - 자기소개’를 보고 잘됐다 싶었다. 글을 쓰기 위해 드디어 창고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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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아이디어 노트는 2011년으로 돌아간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청소년기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만들며 창작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기록하게 됐다. 예전에 어떤 내용을 써두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먼지 쌓인 아이디어 노트의 첫 장을 펼치는데 요즘 내가 하는 것이 그대로 나와서 웃음이 나왔다. 기록에 대한 아이디어였다. 필요할 때 빠르게 꺼내어 음성으로 녹음하고 적어 내려가는 아이디어용 기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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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생활을 하며 사람을 많이 만나고, 여러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오히려 학생 때보다 자신과 보낼 시간이 줄어들었다. 혼자 고독한 시간을 많이 만들며 생각을 사수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됐다. 매일 일기를 쓰지는 못하더라도 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포스트잇에, 메모장에, 블로그에 기록하고 적어 내려갔다. 귀찮은 날에는 메모장의 음성기능을 켜고 떠든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떻게든 내 생각을 귀하게 여기며 기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획하는 모습이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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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와 아이디어 노트들을 하나씩 열어보면서 가장 놀란 점은 학창 시절 내가 꿈꾸던 이상향과 목표, 가치관도 변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간 삶에 대한 경험치는 쌓였을지 몰라도 방식의 다양성을 얻었을 뿐 가치는 그대로 있었다. 초심과 동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 같아서 꽤 기뻤다.

 

10년째 변치 않는 나의 이상향은 외유내강이다. 외유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은 매년 다이어리 앞장에 쓰는 목표다. 전에는 갈 길이 멀어 보였는데, 요즘은 좀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변치 않고 지키고 싶은 가치도 있다. 인(仁)이다. 그래서 나의 행동과 생각에는 사람과 사랑이 빠질 수가 없다. 공자가 말하는 인 사상을 보며 공부한 게 내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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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현재-미래는 한 묶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새해에는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1년 뒤의 나에게 보내는 응원과 목표를 담은 편지였다. 그 내용에는 항상 ‘내년에는 네가 ~한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어.’ 하는 바람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근 4년간은 쓰지 않았다. 그렇게 편지를 쓰는 게 어느 순간 무의미하게 느껴져서였다.

 

최근 영화 ‘컨택트’를 다시 보았다. 장르는 SF지만 영화의 메시지는 판타지스럽지 않았다. 그 영화에서 등장한 비선형적인 시간관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한 묶음으로 함께 진행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지 않게 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목표보다는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항상 나라는 사람의 경향성이 있다. 행동 습관과 생각 습관이 만들어내는 개인의 경향성이 모든 시간 속의 내 모습을 결정짓는다.

 

마찬가지로 다이어리를 들추어보면서 9년 전의 목표와 지금의 목표는 여전히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과거 생각해오던 것을 현재의 내가 행하고 있고, 또 지금의 내가 꿈꿔오는 일은 미래의 내가 할 것이라는 점이다. 대단하게 마음먹고 다짐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려오던 일을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을 보면서 결국 개인의 생각 습관과 믿음이 나를 이룬다고 느꼈다.


중학생 때 차를 타고 가면서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좋아하는 게 많은데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난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그것들을 전부 다 할 수 있을까?"

동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투잡을 하면 되지. 낮에는 작가를 하고 밤에는 춤을 춰!”

지금이야 N잡러가 많아졌지만, 그때 당시에는 투잡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그 단순한 대답을 들으며 ‘나야 그러고 싶지만, 과연 가능할까?’ 하고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지금 와서 그 때를 회상해보면 결국 사람은 모로 가도 원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대학에 가면서 문학소녀는 책과 글쓰기를 잊고 지냈다. 너무 바빴고,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절친한 친구와 멀어졌던 것이다. 졸업하고 난 뒤에야 다시 글쓰기를 찾았다. 대학에서는 알바를 하면서 계속 댄스 학원에 다녔다. 스트릿 댄스부터 무용까지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찾아 배웠다. 어린 시절의 흥미와 관심은 열망으로 바뀌었고, 여전히 그것들을 어떻게든 향유하려 한다. 내가 만든 춤으로 무대를 올리고, 영상을 만들면서 조금씩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했다. 그리고 두 가지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정말 동시에 진행되는 듯하다. 지금 얼마나 나답게 충실하게 사는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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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소개하는 법


  

이번 글을 기획하면서 어떤 것으로 나를 소개할까 고민했다. 사람들이 소개할 때 말하는 것을 떠올렸다. 보통은 직업, 나이, 학교, 사는 곳과 같은 내용을 먼저 제시한다. 나는 그 이유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찾았다. 만약 우리가 가치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가치관, 이상향, 취미, 좋아하는 것을 먼저 소개하지 않았을까.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녹아있는 무의식중 하나는 개인이 돈의 흐름 중 어느 부분에 위치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직업을 먼저 제시하며 자신을 소개하고, 그와 반대되는 가치적인 이야기는 때로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로 인식되어 잘 나누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이 가치를 먼저 얘기하며 소개하면 어떨까 종종 상상한다. 직업은 그 사람의 일부에 속하면서도 삶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변하지 않고 오랫동안 나를 이뤄온 것들로 소개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것은 현재 진행 중인 삶의 목표다.


- 배움의 사치를 누리는 삶

- 언어의 세계가 넓고 깊은 사람

- 진실한 사람

- 부조리한 삶에서 반항의 방식을 택하는 사람

- 예술의 다양한 표현 방식을 익혀나가며 나의 것을 만드는 사람


부담없이 배움의 사치를 누리며 사는 것이 목표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인격적으로 계속해서 성장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며 사는 것은 내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표현하고 배우며, 좋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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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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