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를 보는 방법 [영화]

글 입력 2022.06.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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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덕을 지나는 시간4.jpeg

 

 

“시인 한도원 씨는 1989년 충남 금산군에서 출생하여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시와 새들>이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2009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시 <고요한 날>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이후 현실적이며 독창적인 시들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아들의 시로 한글을 공부한다. 이제는 활자로만 존재하는 아들의 모든 것을 읽고 기억하기 위해 뒤늦게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인다. 알지 못하는 글자들로 가득 차 흐릿하게만 보였던 세상이 비로소 선명해질 때쯤, 어머니에게 새로운 눈을 선물한 아들의 시를 온몸으로 느끼러 그가 다녔던 학교에 방문한다.

 


그 언덕을 지나는 시간1.png

 

 

가장 큰 목적은 시집의 표제작 <그 언덕을 지나는 시간>에 등장하는 언덕에 올라가 보는 것. 그 언덕에서 아들은 어떤 풍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며 시를 썼는가. 당사자에게 물어볼 수 없고, 답을 들을 수도 없는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 속 이질적인 존재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한다.


아들이 속했던 학교는 시간의 흐름에 맞서지 않았다. 그가 활동했던 <시와 새들>의 동아리 방에는 이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빛나는 먼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을 그리워할 어머니에게 마치 최소한의 흔적이라도 남긴 듯, 여전한 것들이 있다.


붉은 우체통과


 

<서 있기를 어리석게>


뜨거운 날에 기대어

붉은 우체통은 울어댄다

네모난 입에서 터져나오는 울분이여


하얀 벽에 무너지듯 쌓아올린

그날의 낮은 이리도 뜨거웠나

쏟아질 듯 위태로운 오지 않을 날


푸른 잎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말을 왼다

.

.

.

 


호수 같은 것들.

 

 

<오후 세시의 절망>


호수 앞에 앉아 한참을 울었네

매미가 운다는데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울었네


쏟아지는 태양 아래 증인처럼 앉아

나는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나


오후 3시

호수 앞 매미가 운다네

 


붉은 우체통과 호수 주변의 벤치에 앉아 뜨거운 태양을 맞이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학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귀가 들리지 않았던 아들의 마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아들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며 뱉은 말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지나간 시간을 찬찬히 되짚어 본다. 종소리가 보인다는 그의 말에 종소리는 보이는 게 아니라 ‘들리는’ 것이라고 말했던 과거를 후회한다.

 


그 언덕을 지나는 시간.png

 

 

들을 수 없어 보아야만 했던 이와 읽을 수 없어 들어야만 했던 이 사이의 간극은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었다. 엇갈린 길을 이제라도 겹쳐 보고자 글을 배워 세상을 보고, 두 손을 들어 귀를 막는다.

 

고요로 가득 찬 시야를 처음 마주하는 어머니의 눈에 보인 것은 무엇이었는가. 바람에 서로의 몸을 부딪치는 나뭇잎들의 소리, 호수 앞에서 울어대는 매미들, 그리고 어디선가 울리는 종의 소리일 테다.


어머니가 아들의 시야를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약 20분의 시간 동안 그들의 뒷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둘 사이에는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어떤 연유로 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공백에 찍힌 시집이라는 점과 어머니라는 점을 각자의 마음속에서 연결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 단편 영화는 시를 닮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틈을 메꾸는 것이 온전히 독자의 몫인 것처럼 종소리를 보았던 시인의 눈과 글을 배우는 노인의 눈이 바라보고 있었을 풍경을 상상하는 것 또한 관객의 몫이다.


시는 종소리에 형체를 부여한다. 그리고 종이 위의 시는 영화를 통해 우리 눈앞에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진다. 아들의 시를 읽을 수 있게 된 후부터, 닳도록 읽어 이제는 헌책이 되어버린 시집. 먼지 쌓인 책꽂이와 아들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학생의 순수한 얼굴. 사무치는 그리움에도 끝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고 의연히 금빛으로 물든 언덕을 오르는 어머니의 모습.

 

우리는 그저 한 글자 한 글자 시를 읊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글자를 읽어 내듯 흐르는 사진들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 언덕을 지나는 시간>

 

보이는 것이 많아져

한참을 주저 앉아 시를 씁니다

 

꽃잎이 진 자리에 밤이 오면

눈 마저 감고

 

그때마다 당신은 나를 부릅니다

적막을 뚫고 오는 종소리

 

언덕을 밀어내며

나는 일어나 길을 오릅니다

생의 오른편으로, 오른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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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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