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잠깐의 ‘판타지’가 건네는 휴식 [만화]

숏 애니메이션 <데지 미츠 걸>이 그리는 #여름 #청춘 #바다
글 입력 2022.05.2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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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애니메이션 <데지 미츠 걸>의

스포일러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연찮게 생긴 친언니의 휴가를 기회로, 언니와 남동생과 함께 제주도에 다녀왔다.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이나 연휴는 아니었는데도 꽤 많은 여행객들을 볼 수 있었다. 여행객들 사이에서 정말 오랜만에 본 바다와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는 따뜻한 날씨는 낯선 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또 평소와는 달리, 일찍 일어나 예쁜 풍경을 보고 맛있는 것들을 챙겨 먹는 여행 기간 동안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다시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오랜만에 본 낯선 풍경들과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롭고 편안한 감각들이 꽤 필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이 대단한 것들을 하지 않아도, 노을이 지는 바닷가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차가 다니지 않은 작은 섬에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 바퀴를 굴리는 순간들에서 왠지 모르게 더 건강해지는 것 같은, 낯선 산뜻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여행이나 판타지 장르가 필요한 이유 역시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한다.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낯선 풍경과 낯선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기며, 잊고 있었지만 필요했던 것들을 채우게 된다. 설령 현실로 돌아왔을 때 변해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거나 심지어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 자체로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낯선 자극이 되기도 한다.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하는 숏 애니메이션 <데지 미츠 걸(2021)>도 판타지가 가득 담긴 여름 바다의 이미지와 그런 여행지에서 겪은 경험을 그린다.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 속 두 주인공들에게도, 애니메이션을 보는 우리에게도 잠시 동안 일상을 벗어나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그리웠던 감각들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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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판타지’가 건네는 휴식


 

애니메이션 <데지 미츠 걸>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은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히가 마이세’는 오키나와에 사는 16살 고등학생으로 여름방학 동안 ‘하고 싶은 것도, 설레는 일도 없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히가 호텔’의 일을 돕고 있다. 그런 히가가 일하고 있는 호텔에 찾아 온 ‘스즈키 이치로’는 신인 배우로,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계속되는 좌절에 지쳐 무작정 오키나와로 떠나 왔다.

 

오키나와는 스즈키에게는 어떤 판타지 같은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미지의 남국(南國)’ 같은 여행지이지만, 히가에게는 별다른 감흥 없이 평생을 살아 온 일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스즈키가 오키나와에서 얻은 것들이 바닷속 물고기들을 데려오거나 호텔 안에 커다란 나무줄기를 자라게 하고, 계속해서 해가 지지 않게 하는 등 기이한 현상을 일으키면서 히가의 일상 역시 판타지의 세계로 바꿔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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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서 판타지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현실 세계를 압도하는 놀라운 장면들을 보여주지만, 등장인물들에게 항상 설렘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스즈키에게는 기이한 현상들이 단지 조금 이상한, ‘오키나와에서는 흔한 일일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히가는 이러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기도 하고, 눈 앞의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히가는 늘 이러한 상황의 원인을 찾고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어쩌면 판타지가 ‘판타지’일 수 있는 이유는 어쨌든 다시 돌아와야 하는 ‘현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판타지는 어찌할 수 없이 반복되는 현실의 일들에 지치고, 현실 안에 고여 있었던 우리에게 쉼터와 비상구가 되어준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다시 현실로 돌아가 그곳에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채 계속해서 판타지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곧 ‘판타지’가 아닌 ‘저주’가 되어 버릴 것이다.

 

 

[꾸미기][크기변환]히가_스즈키_신령.jpg

 

 

"이 자는 이미 내 것이다. 소원은 들어줬다.

수족관도, 거대한 인삼벤자민도, 시간의 흐름도.

머지 않았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아.

고통이 없는 세상, 그것이 네 소원이지 않느냐?"

 


애니메이션의 후반부, 스즈키와 히가를 둘러싼 기이한 현상이 스즈키에게 붙은 요괴 혹은 ‘신령’이라 불리는 존재에 의한 것임이 밝혀진다. 스즈키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는 신령으로 인해 스즈키는 알 수 없는 어둠의 세계 속에 갇혀 버린다. 하지만 히가는 스즈키를 찾는 숨바꼭질의 술래가 되어 그가 꿈을 향해 노력해온 과정을 모두 보게 되고, 결국 그를 찾아낸다.

 

스즈키는 판타지 같은 세계 속에, 시간이 영원히 흐르지 않은 곳에 있고 싶어 했지만, 영원히 그 곳에 있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위해 멈추지 않고 달려온 끝에 마주한 좌절을 견디기는 힘들지만, 그 역시 언젠가는 판타지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가 눈 앞의 현실을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즈키가 잠시 도망간 곳에서 만나게 된 판타지가 엮어준 기이한 인연과 우연은, 그런 스즈키에게 발걸음을 돌릴 수 있는 힘을 보태주었다.

 

 

[꾸미기][크기변환]히가_스즈키_정상.jpg

 

 

"스즈키, 너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모르겠지만…

스즈키 이치로, 넌 말이야, 엄청 멋있어!

돌아가자, 스즈키 이치로. 너한테 이런 곳은 하나도 안 어울려!"

 

"그럼 어디가 어울리는데?"

 

"정상! 스즈키라면 반드시 갈 수 있어!"

 


그리고 우리에게도 역시 판타지를 놓지 않는 것도, 현실에 제대로 발 붙이고 서는 것도 모두 필요하다. 우리는 판타지와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현실 속에서 재충전이 필요할 때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판타지를 찾아 나설 수 있고, 잠시 들른 판타지 세계 속에서도 낯선 시공간을 마주하며 현실로 돌아갈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러니 오늘도 판타지와 현실 세계를 넘나드는 우리들이 자신만의 균형을 찾을 수 있기를, 우리에게 필요한 곳에 서 있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숏 애니메이션’이 주는 아쉬움과 새로움


 

애니메이션 <데지 미츠 걸>은 한 회차에 2분 정도의 짧은 러닝타임으로 구성된, 기존의 단편 애니메이션보다도 훨씬 짧은 숏폼 콘텐츠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이다. 이러한 형식을 선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데지 미츠 걸>을 통해서 이런 ‘숏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장단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먼저 애니메이션의 각 회차도 짧고, 전체 길이도 상대적으로 길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짧은 간격으로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등장인물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사연과 ‘신령’이라 불리는 존재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장인물들의 서사와 이야기의 배경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기에는 러닝타임이 모자라게 느껴졌다.

 

하지만 판타지를 구현하기에 굉장히 적합한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장점과 작화에 집중할 수 있는숏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잘 살린 점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데지 미츠 걸>은 멋진 작화로 청량감 넘치는 판타지 속 ‘여름’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미지’로 구현했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일어난 어떤 에피소드나 서사에 집중하기보다는, 여행지에서 맞닥뜨린 판타지가 불러일으키는 설렘과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과 ‘여름’, ‘청춘’과 같은 단어들 그 자체를 시각화 한다.

 

 

[꾸미기][크기변환]데지미츠걸.jpg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왕가위 감독이 그의 영화 <중경삼림>에 대해 ‘러브 스토리가 아닌,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영화’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어떤 감정이나 관념에 대한 깊은 고찰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애니메이션도 청춘들의 서사를 친절하고 충분한 설명으로 펼쳐 놓기 보다는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여름’이나 ‘청춘’, 그 안에 담긴 ‘판타지’ 자체를 특히 시각적으로 다루어 낸다. 그렇게 여름이라는 계절적 배경과 판타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오키나와라는 공간적 배경 속에 '청춘'의 장면 장면을 포착하고, 이를 우리 눈 앞에 끌어내 보여준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속 배경은 오키나와이지만, 오키나와가 가지고 있는 낯설고 이국적인 여행지의 이미지만 차용해 애니메이션 안에 담아 냈다. 어떤 기이한 일이 벌어져도 ‘오키나와에서는 이게 흔한 일이야?’라고 물어보는 스즈키와, ‘역시 오키나와야! 시간의 흐름이 달라’라며 받아들이는 손님들을 보면, 그들이 실제 오키나와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히가와 같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오키나와라는 공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판타지’ 안에는 현실의 이 공간이 가지는 지난한 역사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실제 삶은 빠져 있다.

 

그렇기에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할 수 있다면, 잠시 동안의 판타지가 건네는 휴식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데지 미츠 걸>이 담아내는 판타지 섞인 여름 바다가 시원한 바람을 간직한 해변으로, 낯설지만 신기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꾸미기][크기변환]히가_스즈키_석양.jpg

 

 

벌써 여름이 훌쩍 눈 앞으로 다가왔다. 무덥고 힘든 여름이 <데지 미츠 걸>과 같이 여름의 판타지를 잘 담아낸 작품들로, 잠시 동안만이라도 청량감 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으로 와 닿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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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애니메이션 <데지 미츠 걸> 공식 홈페이지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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