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작은 세모의 흔적] 2편 – 아무튼, 식물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5.18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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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틔우기



딸기를 키워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는 다이소에서 물건을 구경하다 2천원, 3천원 하는 소품을 하나씩 사오는걸 좋아했다. 그걸 왜 사오냐고 잔소리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용돈도 얼마 안 되던 시절 나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2층짜리 다이소 구석에서 딸기 씨앗을 발견했다. 눈이 번뜩였다. 딸기라니!


당연히 딸기를 키워본 적도 없고 방법도 모르지만 무작정 작은 딸기 씨앗 재배키트를 사서 집에 돌아왔다. 재밌어보였으니까. 식물을 키워본 경험이라곤 초등학교때 교실에서 키워본 방울토마토와 그보다 어릴적 집에서 엄마랑 키워 뜯어먹었던 상추가 다였다. 사실 이 둘도 내가 키웠다고 하기엔 애매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딸기 키우기는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주먹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화분에 자그마한 씨앗을 심고 흙을 덮어준 뒤 물을 조금 뿌려주면 끝이었다.


고작 손가락 한 줌만큼의 흙과 몇 방울의 물인데도 뿌듯했다. 일을 끝낸 농부의 마음을 아주 조그맣게 체험했달까. 그걸로 다라고 생각했다. 다이소에서 산 3천원짜리로 그만큼의 성취감을 느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책상 구석에 밀어둔 미니 화분에서 돌연 싹이 자라났다. 흙을 밀고 올라오는 작은 줄기 하나가 내 감정을 뒤흔들어 놨다.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때부터 흙이 마르지는 않는지 꾸준히 체크하고, 조명으로 빛을 비췄다. 다행히 밤새 켜둔 조명만으로도 싹은 이상 없이 자라났다. 겨울이라 얼어죽을까 햇빛에 내놓지도 못하고 낮에도 책상 위 조명을 키고 학교에 갔다.


줄기의 성장속도는 꽤나 빨라서 학교에 다녀오면 키가 조금 더 커진 상태로 조명이 있는 방향쪽에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무언가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씨앗의 성장을 보며 이런저런 상상도 해봤다. 내가 길러낸 줄기에서 새빨간 딸기가 열리고 가족들과 나눠먹는 상상 같은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그 뒤로 몇가지 종류의 씨앗을 더 샀다. 흙 아래에 씨앗을 넣은 뒤 흙을 덮고 물방울로 적신 뒤 기다린다. 그러면 큰 이변이 없는 한 며칠 뒤에 자그마한 싹이 올라온다. 지금은 땅 속에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속에서는 분명히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뒤면 반드시 그 결과를 보란 듯이 보여줬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나 타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씨앗 틔우기가 도움이 됐다. 보이지 않을 뿐 분명 자라고 있음을. 그래서 스스로와 내 주변 사람들을 믿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내가 싹을 틔운 그 아이들이 어떻게 자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조그만 화분이라 더 키우기 위해서는 큰 곳에 옮겨 심었어야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안착하지 못해 죽거나, 학교에서 떠난 수련회나 기타 사정 때문에 신경을 써주지 못하고 말라버린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식물의 시작과 함께했던 순간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나를 붙잡아주고 있다.


 

 

아무튼, 식물



아무튼식물.png

 

 

“그들에게 내가 꼭 필요하다는 기분이 소중하다”


‘나는 지금 내 방에 앉아 있다’라는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밴드 ‘디어클라우드’에서 노래를 짓고 연주하는 ‘임이랑’ 님의 책이다.

 

 

임이랑

 

사람보다 동물과 식물을 더 좋아한다. 밴드 ‘ 디어클라우드’에서 노래를 짓고 연주한다. 도망치듯 식물의 세계로 들어왔다. 어쩌다 삶에 화분 하나를 허락하고 나니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열이 되고... 이제 집에 있는 화분 개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가드너가 되어 시시때때로 식물을 데려오고 가꾸고 다듬고 어루만지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변화가 가끔은 놀랍다.

 


이 책을 읽다보면 고3때 내 마음을 지켜주었던 식물과의 시간이 떠오른다. 전문적이지도 길거나 유별나지도 않았지만 분명 식물은 그때 나한테 중요했었다. 무언가 소중히 여길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삶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실제로 책의 저자인 임이랑님도 식물에 대한 애정이 위험한 날들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붙잡은 지푸라기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병원에도 갈 것이라 말하지만, 식물과 함께하는 시간이 큰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화단에서 지렁이를 보면 겁내고 식물을 키우기보다는 죽이기를 더 많이 하는 시절로부터, 식물을 위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보랏빛 조명을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순간을 지나 식물로 인해 다음날을 기대하고 자신의 삶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기까지. 담담한 기록들이 재미있다. 노래를 짓는 것이 직업이라 그런지 문장이 아름답고 문단들이 유려하다. 무엇보다 솔직하게 풀어나간 이야기들이 이 책을 지루하거나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한다.

 

이런 문장과 문단들이 그렇다.

 

 

"나는 이제 이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때와 영영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예전의 나는 나로서,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로서 스스로를 사랑하고 혐호한다. 그 커다란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옥수수를 심고 온 정성을 다해 길러 따 먹어봤다는 경험 때문에 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수확 직후부터 빠르게 당도가 떨어진다는 옥수수를 최고로 맛있게 먹어보려고 물을 팔팔 끓여두고 테라스에 올라가 옥수수를 땄던 기억 그 자체가 즐겁고 사랑스럽다. 얼기설기 이빨 빠진 것처럼 엉성하게 자라준 옥수수 덕분에, 단맛이 하나도 없었지만 너무 기쁘게 베어 먹었던 수박 덕분에, 스스로를 혐오하는 어떤 밤에 그 혐오를, 나를 달래줄 고마운 카드가 한 장 더 생겼다. "(p.114)

 

 

"이제껏 나는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는 삶에 지쳐 있었다.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하지 않으려고 방어기제를 쌓아두고 염세적인 태도로 살아왔다. 별다른 다짐 없이 어영부영 살아지는 안락함을 좋아했다. 기대하지 않고 실망도 하지 않는 쪽이 훨씬 편하다. 그런 염세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하려면 무엇도 쉽게 좋아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지만 식물들이 마음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높게 쌓아둔 방어벽이 무너졌다. 이제 벽 뒤에 숨어 지내던 시절을 모두 지나왔다. 좋은 것을 더 오래 보고 싶고, 귀한 것을 더 아끼고 싶다. 심장을 뛰게 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슬플 때는 슬픔을 느끼고, 괴로울 때는 주변에 조금 부담이 될 정도로 기대고 싶다. 

 

매일 기다려지는 것들이 있기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옷을 대충 챙겨 입은 채로 테라스에 나가 식물을 곁에 한참을 앉아 구경하는 삶이 지금의 나를 충족시키는 삶이다. 온 세상을 통틀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내 식물들의 미묘한 표정을 놓치지 않고 목격하고 싶다. 이런 욕심은 결국 삶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건강한 욕심이 주는 에너지가 고맙다. (p.142~143)"

 


“이제 나는 이 세상에 내가 키울 수 있는 것과 키울 수 없는 것이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라날 가능성도 없이 공들여 키워왔던 것 중에는 뜨겁고 건조한 땅이 고향인 식물도 있었고 사람의 마음도 있었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내 커리어의 어떤 부분도 그렇다. 다행히 삶에는 대단히 공을 들이지 않아도 쉽게 자라나는 것들도 있다. 나의 기질과 내가 가진 환경에 맞는 식물들은 태양과 바람만으로도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가끔 운이 좋은 날엔 어떤 노래들이 쉽게 자라났다.”

 

 

그리고 내가 이 시리즈를 소개하면서 항상 언급하듯이,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에는 분명 들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나의 생각과는 다르더라도, 설사 글 자체가 조금 서툴더라도 그 경험은 분명 내 삶의 지평을 넓혀준다. 훌륭한 문장과 의미있는 에피소드가 함께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식물에게라면, 쉽게 허락하지 않는 나의 곁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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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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