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봄꽃이 피고 지는 하루

글 입력 2022.04.30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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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돌아오니 아직 날이 밝았다. 커튼을 친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과 따스한 기운이 싫었다. 해가 길어지고 있는 듯했다.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방에 들어와 텅 빈 채로 앉아있는 내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오늘 점심에 마신 커피 탓인지 잠도 오지 않았다.


한참을 서성이다 무작정 에어팟을 끼고 뛰쳐나왔다. 평소에 뛰던 코스를 벗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갔다. 며칠 전 내린 비에도 미처 떨어지지 않은 꽃잎과 이제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송이들이 길을 밝혔다.


요즘 부쩍 계절의 흐름을 느끼고 있다. 매일 같은 곳만 빙글빙글 돌다가 새로운 길에서 피고 지는 자연을 마주하는 덕인 것 같다. 내 주변인의 삶의 흐름도 꽤 달라졌다. 누군가는 건강했던 몸이 상하기도 하고, 억울했던 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고, 누군가는 또 다른 커리어를 준비한다.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들으면 좋은 삶을 살고 있는 친구들이 꽤 많다. 따기 어렵다는 자격증과 어학점수에서 높은 성적을 받은 사람도 있고, 좋은 회사에 입사한 경우도 있다. 따스한 봄을 맞아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시간을 이만큼이나 걸어오면서 나는 무엇이 바뀌었나 자조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에어팟 너머로 바스락거리는 바람소리와 흐르는 강물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았다. 너무 늦은 시간에 밖에 나온 탓인지 돌아갈 즈음이 되자 어깨 위로 내려앉는 어둠을 느끼며 생각에 잠긴다. 빠르게 달려도 생각은 털어지지 않고 오히려 발목만 자꾸 무거워져 달리기도 잘 되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서는 늦은 저녁을 위해 즉석밥에 닭가슴살을 돌린다. 뭐라도 시켜먹을까 고민하지만 부쩍 오른 배달비가 부담스럽다. 외진 동네에 방이 있긴 하지만 6000~7000원씩 붙는 추가 배달비를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웬만한 식사 1인분에 해당하는 비용이다. 심지어 먼 길을 오느라 꽤 식어버리는 음식을 위해 그만큼의 배달비를 지불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배달노동의 어려움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일지도 모르지.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다 돌려진 밥을 들고 전자렌지 앞을 벗어난다.


밥을 다 먹고 치우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나의 시간이다. 오늘의집 어플에서 주문한 은색 이케아 포르소 조명이 어두운 방을 따스한 주황빛으로 채우고 냉장고 옆에 널려있는 컵들과 침대 위 빨래가 나를 반긴다. 애매한 완벽주의 성격을 가진 나는 방이 마음에 안 들면서도 전부 치워낼 자신이 없어 그대로 둔다.


밖에는 푸릇한 새싹이 돋고 꽃이 만발했는데 너저분한 방을 바라보니 온도차가 심하다. 규칙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방에는 먼지가 쌓이고, 바닥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부스러기와 머리카락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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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내 돌돌이로 먼지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는다. 공부도 하긴 해야하는데, 도저히 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봄인 탓일까. 자꾸만 춘곤증이 찾아오는 무기력하다. 인스타와 유튜브를 들락거리며 의미 없는 영상들을 흘려보내다 생각한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 시간에 보통 뭘 했더라?


어느 날에는 저 시간에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 했고, 어느 날에는 책을 읽었고, 어느 날에는 운동을 했었는데. 최근에는 나의 시간을 내가 어떻게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요즘의 내 삶을 정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근 내가 시간을 쓰는 모습은 떨어진 꽃잎처럼 여기저기 팔랑거리며 떨어지고, 정처를 알 수 없이 흐르고 떠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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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다 길가에 핀 꽃을 보며 생각한다. 오늘은 라벤더처럼 생긴 보라색의 작고 긴 다발형의 꽃을 발견했다. 어느 나뭇가지에나 달려있을 것 같은 녀석들이 풀 사이에 듬성듬성 올라와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멀리서는 보라색 섞인 초록무늬로 보이던 풍경의 픽셀 하나하나에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각각의 꽃망울과 펼쳐진 풀잎들이 나열해있다.


돋보이고 빛나는 꽃망울 같은 순간도, 시야를 가득 채우며 나열해있는 초록색 풀 같은 보통의 순간도 결국 풍경의 일부다. 단순한 풍경도 뜯어보면 그 안에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고, 너무 다른 각각의 픽셀도 모여 하나의 모습을 이룬다.


조금은 진부하고 뻔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오늘 하루도 나의 삶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낫다. 가족과의 관계 안에 존재하는 내가 있고, 직장에서 존재하는 내가 있고, 연인이나 친구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내가 있으며, 글을 쓰고 취미활동을 할 때 존재하는 내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내 마음같지 않고, 오늘 나를 힘들게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일부이지 나라는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은 견딜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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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글을 쓰는 일이 힘들다. 긴 글을 쓰는 능력이 퇴화했나. 문맥에 맞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려워 긴 시간 고민하는 일도 늘었다. 긴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고 논리적이고 적절하게 사고하는 능력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또 최근 나의 언어가 거칠어지고 짜증이 늘었다는 것도 느낀다.


이럴 땐 항상 시와 소설을 읽곤 했었다. [함께 읽으‘시’죠]라는 제목으로 나의 시 읽기를 함께 나눈 기록도 여러 편 있다. 최근에는 작품을 읽을 시간과 마음의 여유도 충분치 않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졌었다. 최근 몇 달간의 내 기고글에 전부 [에세이]가 붙어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냥 편하게 내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그리 쓸모 있고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귀기울여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이제는 다시 시작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많이 읽고 공부하고 그 결과를 사람들과 나누는 일도 소중하니까. 뭐 살다보면 이런 시기도 있고 그런 시기도 있는 거겠지. 겨우내 길었던 겨울이 지나 봄 꽃이 피고 또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조금 더 가볍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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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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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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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 김인규 에디터님 글을 늘 소중히 잘 읽고 있습니다 :) 건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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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님 글은 아련하고도 잔잔한 감성이 돋보이네요
      앞으로도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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