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자유와 사랑을 실어 보내

언니에게
글 입력 2022.04.2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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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어릴 때 보고 자란 책이나 영화가 한 사람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잖아. 어떤 것을 보고 자랐는지에 따라 취향이나 성격이 형성된다고. 그래서 환경이 중요한 거라고.

 

내가 아직 고등학생일 때, 미친 사람처럼 여행을 다니던 언니를 기억해. 매번 성적 장학금을 받으면서 알바도 두세 개씩 했던 언니를, 그러다 꼭 한 학기에 한 번씩은 쓰러져서 엄마 아빠에게 한 소리를 듣던, 그래도 아랑곳 않고 악착같이 벌어 방학 때마다 훌쩍 떠나던 언니를, 걱정하는 엄마를 위해 일정이 빼곡히 적힌 파일을 건네고는 캐리어 대신 배낭을 메고 떠나던 언니를 기억해.

 

언니는 항상 난생처음 들어보는 지역으로 떠나서는 잘 지내고 있다고 영상 통화를 걸어왔어. 어느 날은 길 가다 사귄 친구 집에서 놀다가 온 동네 사람들과 친해졌다고, 어느 날은 홈스테이 하다가 마을의 결혼식에 참여했다고. 언니의 그런 표정을 처음 본다며 놀라는 엄마 옆에서 나는 화면 너머의 세상을 훔쳐봤어. 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모르는 언니의 세상이 퍽 아름답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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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언니를 보면서 자랐어. 겁도 없이 막 세상으로 나가는 언니 덕분에 책 하나 영화 하나 안 보고 나도 자연스레 그런 사람으로 컸어. 나는 나라서 나의 성장에 영향을 준 환경을 다 알진 못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크지 못했을 거야. 혼자 훌쩍 떠날 용기를 가지지 못했을 거야. 언니가 겁 많던 내게 일러주지 않았다면 말이야.

 

지은아, 세상은 넓어 우리는 가야 해.

 

직접 말해준 적은 없지만 늘 어딘가로 떠나는 언니의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배울 수 있었어. 정말이지 형형하게 빛나는 여행지 속 언니의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어.

 

작년 나 혼자 유럽 여행을 했을 때, 가끔씩 찾아오는 두려운 순간마다 언니에게 연락했어. 언니, 나 돈 아끼려고 6인 혼성 도미토리에서 자는데 나만 여자야. 조금 무서워. 라고 보내면 언니는 걱정 대신 20인 혼성 도미토리에서 잤던 이야기를 해줬지. 순식간에 안심되더라고. 스무 명이 말이 되는 인원이냐고 깔깔대느라 걱정은 다 사라졌었어. 그때 느꼈어. 평생 나는 먼저 떠나본 언니 덕분에 모험을 덜 무서워할 거라고. 어느 길을 걷게 되어도 먼저 찍힌 언니의 발자국을 보고 안심할 거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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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세상을 유랑하던 언니는 회사원이 되었고 코로나까지 겹쳐 여행을 못 간지 오래되었지.

 

언니는 여행을 못 간다고 엎어져서 울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라서, 여행만큼이나 삶을 멋지게 영위하고 있지만 말이야. 나는 여행자 언니 만큼이나 사회인 언니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 그래도 가장 큰 마음은 언니가 언젠가 또 훌쩍 떠나기를 응원하는 마음이야.

 

비엔나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본 내가 언니에게 연락했던 거 기억나?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었잖아. 여행이라는 분위기에 취해 거짓 사랑을 하는 게 아니냐고, 그냥 여행 필터인 거 아니냐고.

 

근데 언니는 오히려 반대라고 했어. 여행지에서만 나오는 모습은 어딘가에 취한 가짜 모습이 아니라 내 본연의 모습이 나오는 거라고 했어. 그렇기 때문의 둘의 사랑은 오히려 더 진정한 거라고 했지. 나는 한 겹을 더 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한 겹을 더 벗는 거라고. 그게 여행이라고 했잖아.

 

그 대답을 듣고 내가 모르는 언니의 여행이 궁금해졌어. 한 겹 벗은 언니는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랑을 했어? 몇 겹은 입고 있는 것 같을 지금은 어떤 기분이야? 얼른 언니가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거기 내가 없더라도. 나는 여전히 몰라도 되니까 말이야.

 

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무한한 사람이야. 한계를 뛰어넘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한계를 두지 않는 사람. 아무리 무모해 보이는 것도 해내는 사람. '말하는 대로'의 힘을 아는 사람. 이따금 몇 겹씩 더 낀 채로 살고 있다는 좌절감이 들어도 잊지 마. 언니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무한한 사람인지.

 

언니가 본연의 모습으로 행복하길 바라며

이 바람에 자유와 사랑을 실어 보내.

 

 

 

김지은 (1).jpg

 

 

[김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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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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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몇 겹씩 껴입은 요즈음, 벅차오르게 해주는,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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