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익스큐즈미, 웨얼 이즈 엑시트 포?

나의 첫 해외여행기
글 입력 2022.04.15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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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겨울의 기록

 

대만을 가게 되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이 여행을 위해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고 적절한 오후 시간대에 현지에 도착할 예정인 비행기 티켓을 결제했다. 현지에서 사용할 유심칩과 일주일간 묵을 호텔을 예약하고, 반드시 가야 할 명소와 식당을 모조리 메모했다.

 

계획을 짜고 여행하지 않는 즉흥 여행자에 가까운 사람인지라 이 모든 게 영 쉽지 않았다. 대만으로 떠나기 바로 전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 뒤에야 겨우 캐리어의 지퍼를 잠그며 생각했다. 제발, 국제 미아만 되지 말자. 맞다. 사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꽤나 알아주는 길치였다. 내 인생 처음으로 직접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하고, 주도하게 된 해외여행은 그렇게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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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럴 줄 알았지.

 

어느 순간 같은 공간을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실 그곳에 도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예약해 뒀던 유심칩을 수령하는 부스에 방문했다. 준비해간 바우처를 직원에게 보여주고 몇 분간의 기다림 끝에 수령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유인 즉슨 유심칩은 스무 살이 넘어야만 수령이 가능한데 내가 만으로 스무 살이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깨달은 바가 두 가지 있다. 하나, 여기는 태어나자마자 일년을 거저 먹는 한국이 아니구나. 둘, 여기는 한국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구나.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만에 도착하기 전까지 내가 영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수령이 안된다는 것에 반박할 실력까진 못되더라도 환불을 받고, 대안을 물어야 했다. 결국 나는 '리펀드(refund)'를 수 백 번 부르짖고 나서야 한국에 돌아가 예약플랫폼에 문의를 해야 한다는 맥 빠지는 답변과 함께 손바닥만 한 (누가 봐도 짐이 될 것 같은) 포켓와이파이를 얻게 되었다.

 

가볍게 들고 다닐 요량으로 메고 간 작은 크로스백에 포켓와이파이를 우겨 넣게 된 나는 지하 공항철도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서성였다. 그러다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어느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중년여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익스큐즈미, 웨얼 이즈 엑시트 포? 관사쯤 빠져도 어쩔테냐하는 마음으로 일단 영어처럼 들리는 말들을 조합해 내뱉었다. 그러자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보랏빛 조끼를 입고 존재감을 뽐내던 약 네 분쯤 되는 여성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4번 출구까지 친절히 데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상을 향해 끝도 없이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마침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시계는 오후 두 시쯤을 가리켰고, 햇살이 머리 위로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길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똑 부러지는 계획형 인간도, 부지런떨며 관광지를 모두 돌아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유형의 사람도 아니었다. 눈이 떠지는 대로 느지막이 일어나 한국에서 미리 검색해 두었던 관광지 중 두어 곳을 임의로 골라 출발했다. 그리고는 아주 많이 걸었다. 날이 저물고 호텔에 도착하면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충만한 마음으로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육체적 피로 때문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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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고 싶은 길을 나 스스로 선택해 기어이 도달하는 일이 여행임을 알게 되었다. 누구의 의견도 방해도 없이 오로지 나의 판단에 내 몸을 맡기고, 그에 따른 저마다의 풍광을 마주하는 것에 남모를 희열을 느꼈다.

 

평생 어렵기만 했던 일들이 그곳에서는 깃털만큼 가볍게 느껴졌다. 영어 한 마디 할 줄 모르면서 길을 묻고, 시간을 묻고, 가격을 물었다. 길을 걷다 배가 고파지면 현지인들만 가득해 보이는 간판 없는 식당에 들어서 한자만 가득한 메뉴 중 느낌이 좋아 보이는 글자를 가리켜 주문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음식 선택에 크게 실패한 적은 없었다.)

 

사진을 찍어 달라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자신감 넘치게 Sure! 하고 대답했지만 원, 투, 쓰리를 크게 외치려니 어쩐지 쑥스러워 하나, 둘, 셋을 세었다. 그들은 다시 핸드폰을 돌려주는 내게 케이팝을 좋아한다며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내가 세상을 대할 때 이렇게 가벼운 마음이었던 적이 있었나? 거의 없거나, 그 마저도 의식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 애써야만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의식하지 않아도 가능했다. 그것이 비록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의 특권일지라도 말이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아쉽지만 그때만큼은 더욱 그랬다. 체감 상 왕바위 같은 캐리어를 도록도록 끌며 한자로 범벅인 낯선 길을 벗어나기 위해 옮기는 걸음 마다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나를 기꺼이 이상하고 활기 넘치는 열아홉으로 만든 이 여행의 어설픔을 잊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을까 의심했던 것들이 할 수 있었음으로 명확하게 손에 쥐어지는 것을 목도한 순간들이 소중해졌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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