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두려운 마음으로 사랑을 하자. [도서/문학]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 中 ‘최후의 라이오니’
글 입력 2022.04.1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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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셀의 곁에서 라이오니는 셀의 손을 잡는다. 둘은 멸망을 맞이하고 있지만 불행하지 않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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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이상한 사람, 아니 ‘로몬’이다. 세상을 한 아름 사랑하고 과하게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랑도, 두려움도 느끼는 만큼 티 내기 어렵다. 그건 우리의 시스템에 어울리지 않는다. 난 고른 평면 위에 톡 튀어나온 흠집이지만, 그럴싸하게 배경에 어울리고 싶어 최대한 몸을 납작하게 누른다.


<방금 떠나온 세계>는 김초엽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최후의 라이오니’는 이 소설집의 시작을 담당한다. 등장하는 이름은 둘 뿐이다. 셀과 라이오니. 셀은 하위 모델 로봇이고, 라이오니는 폐기될 위기에 놓인 로몬이다. 그 외에는 전부 집단이다. 시스템, 시스템 속 로몬들, 그리고 로봇들. 셀과 라이오니는 그 집단에 녹아들지 못한다. 그래서 더 빠른 죽음을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죽음을 운명으로 지닌 채 태어났지만 정작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인류였다. - p.40

 


라이오니가 속한 사회의 로몬들은 ‘두려움’을 모른다. 태생적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제거당했고 후천적으로도 그걸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이다. 감염병과 도망 따위의 사건이 지난 후 새로운 로몬의 세대가 남았다. 현재의 복제 로몬들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저 삶의 가능성을 보고 어딘가에 뛰어들 뿐이다.


라이오니는 두렵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감정 하나가 라이오니를 집단에 섞이지 못하게 만든다. 라이오니는 방에 틀어박혀 죽음과 멸망을 생각한다. 라이오니도 가능성을 생각하지만, 그는 자신이 내일 죽을 가능성 따위를 생각한다.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마땅히 동화될 방도를 찾지 못한다. 집단은 흠집 같은 라이오니에게 그럴싸한 임무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결함 같은 운명으로 라이오니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멸망을 만난다.


사실 순서가 잘못되었다. 라이오니는 멸망 전에 셀을 먼저 만났다. 셀은 라이오니를 라이오니라고 부른다. ‘나’는 분명 라이오니이지만, 라이오니가 아니기도 하다. 셀의 동료 로봇들은 셀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눈앞의 라이오니는 셀이 찾는 라이오니가 아니라는 걸 셀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셀은 라이오니를 기다린다.


죽음을 목전에 둔 셀의 곁에서 라이오니는 자신이 라이오니의 복제임을 깨닫는다. 라이오니는 하나이자 둘이다. 라이오니가 이곳에 오게 된 계기는 그저 시스템의 결함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운명이었다. 이곳에 와야 하는 사람은 라이오니 단 하나였다.


 

셀에게 들려주는 나의 거짓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셀,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돌아왔지. 이제는 너를 떠나지 않을게. - p.49

 


라이오니는 셀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한다. 셀은 눈을 감는다. 라이오니는 다른 로봇들도 고요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셀과 라이오니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죽음과 멸망이 찾아왔으나 그들은 그 순간 두렵지 않았다.


라이오니는 죽음을 향한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해왔다.


셀을 비롯한 로봇들 또한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로몬들은 모르는 그 감정을 그들은 알았다.


그들은 죽음을 기다린다. 삶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며 죽음을 기다린다. 셀은 선과 부품을 주위에 두고 연명하며 라이오니를 기다린다. 그렇게 마치 죽음을 기다리듯 라이오니를 기다린다. 마침내 라이오니가 그의 곁에 찾아와 돌아왔음을 인정했을 때, 셀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죽음을 기다리며 더 간절히 기다린 건 라이오니였다.


죽음은 시간이다. 시간 속에서 우리는 같은 감정을 느끼는 이를 사랑한다. 죽음이 시간이라면, 삶은 기다리는 마음이다. 필연적인 죽음을 기다리듯, 사랑을 기다린다. 그러나 사랑은 필연적이지 않다. 시간을 바라보며 사랑을 기다리다 보면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셀은 죽음을 두려워한 게 아니라 사랑을 두려워했다. 그건 라이오니도 마찬가지였다. 셀을 두고 온 탓에 라이오니는 복제 후에도 멸망을 보며 죄책감을 느끼고, 이 도시로의 단독 의뢰에 응했다.

 

 

퍼즐의 조각들이 맞춰진다.

 

로몬들이 주형 복제 시스템을 통해 태어나는 것. 로몬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각인되어 있지 않은 것. 그럼에도 내게는 두려움이라는 태생적 결함이 존재하는 것. 셀이 나를 라이오니라고 부르는 것. 시스템이 나에게 단독 의뢰를 맡긴 것.

 

깨달음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시스템이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 멸망을 지켜볼 때면 언제나 찾아들던 죄책감. 그럼에도 오직 이 도시를 마주할 때만 평온해지던 마음.

나는 이곳에 와야만 했다.

 

(중략) 라이오니가, 나의 원본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 p.48

 


셀과 라이오니는 멸망을 맞이했지만, 불행하지 않다. 셀은 라이오니를 되찾았기에 죽음을 한숨 내쉬듯이 받아들였다. 라이오니는 셀을 비롯한 모든 로봇의 죽음 후 도시에서 구출된다. 하지만 삶을 이어나갈 라이오니 역시 멸망을 맞았다. 라이오니의 사랑은 셀이었고, 셀은 죽었으니 이 역시 멸망이다. 라이오니는 로몬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게 ‘두려움’을 지닌 로몬이다. 하지만 오직 그 마음 덕에 사랑을 느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이 태생적 결함이, 사실은 결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 p.53

 


아래는 가상으로 작성한 라이오니의 독백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이들의 시스템. 나는 어울리지 않아. 죽음이 두려워. 이유는 모르겠어. 멸망을 보면 죄책감이 들어. 셀을 거기에 두고 왔거든. 마침내 우리는 다시 만났고, 멸망을 맞이했어.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어. 기다리던 사랑을 만났기 때문일까? 난 계속 두려운 마음으로 사랑을 할래.


유한한 삶 속에서 멸망과 함께 사랑을 기다리며, 라이오니.

 

 

 

컬쳐리스트 김희진.jpg

 

 

[김희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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