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수백 번의 우연이 만든 지금 -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북극에 도착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제다.
글 입력 2022.04.0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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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모는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백 개나 된다고 한다.


정정하겠다. 눈을 가리키는 수백 개의 단어는 없다. 또한 에스키모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란 의미로, 비하와 혐오가 담긴 표현이기에 지양해야 한다. ‘이누이트’가 적절하다. 이누이트의 “눈을 가리키는 단어”는 열 개 남짓으로,  수백 개씩 존재하지 않는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에선 우리의 상식을 정정한다. 그렇다면 오류 가득한 문장,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이 제목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십 대 소녀 로리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빠를 떠나보낸다. 로리는 북극 탐험가가 꿈이었던 아빠를 대신해 그의 유골함을 가지고 홀로 북극 여행을 떠난다. 앞서 세상을 떠난 수염쟁이 탐험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나서는 로리의 성장 스토리.

 

- 시놉시스

 


이름, 오로라. 특이한 이름이라 싫다. 이런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가진 사람일 테다. 그래서 오로라는 자신의 이름을 줄여 ‘로리’라고 부른다. 로-리. 남자 이름이라고 놀려도 아무렴 상관없다. 오로라 보단 낫다는 그다.

 

로라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갑작스러웠기에 그 누구도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었다. 찬송가와 함께 진행되는 장례식. 친척들은 ‘아름다운’ 장례식이라며 저마다 한마디씩 보탠다. 로리는 이에 환멸을 느낀다.


유골함을 받은 로리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어제까지도 함께 했던 아빠가 여기에, 이 작은 함에, 가루가 되어 갇혔다니. 화장장을 보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저 뜨겁고, 빨간 곳에 들어가 가루가 되어 나왔다. 저기엔 다른 사람들의 살과 피도 있을 건데. 아빠의 유골엔 다른 사람의 몫도 있을 테다.

 

지옥에서 온 룸메이트. 딱 그 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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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는 아빠의 서재에서 일기장과 나침반을 발견한다. 자리에 앉아 아빠의 일기장과 물품을 찬찬히 보기 시작한 로리. 북극에 가고 싶어 했던 아빠를 떠올린다.  지리교사였던 아빠의 영향을 받은 로리는 탐험가에 대해 빠삭하다. 로리는 돌연 북극 탐험가가 꿈이었던 아빠를 대신해 유골함을 가지고 북극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실의에 빠진 엄마에겐 비밀로 하고 말이다. 물론, 경제적 독립을 못 한 십 대 소녀기에 엄마의 카드는 몰래 챙겼다.


여행길에 오른 로리는 여러 사람을 만난다. 도슨트부터 경찰까지. 사람들과 어울려 파티를 하기도 했고, 선뜻 건넨 여자의 과자를 먹기도 한다. 이중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함께 파티를 즐긴 남자와의 일화다.

 

로리는 우연히 턱수염을 가진 남자를 만나고, 그의 제안에 파티에 가 술을 마신다. 둘의 분위기는 무르익고, 로리는 나도 그를, 그도 나를 원하고 있다고 느낀다. 로리는 남자를 따라간다.

 

로리는 그와 첫 경험을 한다. 남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로리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가슴이 너무 작은 건 아닐까, 잘하지 못 하면 어쩌지, 이런 자세는 턱살이 잘 보일 텐데…. 끊임없는 자기검열로 이어진다.

 

걱정과 달리, 순식간에 끝이 난다. 남자는 금세 곯아떨어지고, 침대에 누운 로리는 천장을 보며 생각한다. 인간에게서 그렇게 짐승 같은 모습을 본 건 처음이라고 회상한다. 로리는 그야말로 진한 ‘현타’를 맞는다. 아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왔던 북극, 그곳에서 그는 이런 경험을 했다. 턱수염 남자의 차 트렁크에 아빠의 유골이 있으니 더욱 생각이 많아졌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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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자가 이랬을까. 허무함과 기이함, 의문과 어색함에 뜬눈으로 밤을 샜을까. 수백만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여자가, 과거 원시시대에서 지금까지, 모두 이런 감정을 견딘 걸까. 제각기 누워,  멍하니 따뜻한 방의 천장 혹은 시린 이글루 벽을 보는 걸 경험했을까.

 

십 대 청소년 로리는 이런 감상에 젖는다. 그는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고, 좋을 것만 같았던 경험은 아프기만 했다. 아빠의 죽음과 춥고 시린 땅, 홧김에 마신 술과 낯선 남자와의 밤.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로리를 짓누른다. 하지만 이곳에선 오로지 자신 뿐이다. 혼자 감내해야 한다.


로리는 말한다. 아무것도 없는, 하얗기만 한 이곳을 정복하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탐험가가 죽었다고. 그만큼 ‘처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첫 경험’ 역시 환장했을 거란다. 실제로 서구가 들여온 매독, 감기 등에 원주민의 절반이 사망했다고 한다... 로리는 깊은 심연으로 빠지는 생각들을 갈무리한 채 집을 빠져나온다.

 

스발바르행 비행기에서 만난 여자는 호의를 베푼다.  감자칩을 건넨 것에 이어 갈 곳 없는 로리에게 동행을 제안한다. 로리는 여자의 연구소에 따라가고, 북극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하지만, 로리는 여자에게 들키고 만다. 엄마의 허락 없이 북극에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로리의 <몰래 북극 오기> 미션엔 INCOMPLETE 도장이 쾅 찍히고 말았다. 여자는 로리를 경찰서로 인계하고, 어머니는 로리를 데리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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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로리를 애타게 찾고 있던 어머니는 말한다. 함께 북극에 가자고. 다시 새로운 미션이 시작됐다. 함께 아빠를, 북극에 놓아주자!

 

이들은 드디어(!) 헬리콥터를 타고 북극 상공에 다다른다. 로리는 아빠의 유골함을 열어 뼛가루를 뿌린다. 당신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북극은 바로 아래 있는데 자꾸 위로, 위로 올라간다. 로리는 울며 호소한다. 북극이 저 아래에 바로 있다고. 저 깃발이 보이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내 로리는 환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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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의 아빠는 북극에 아주 잘 도착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제다. 하지만, 이 글만을 읽은 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래로 온전히 내려앉지 못하고 나부끼는 바람을 타고 위로 흩어지던 가루들은 어떻게 됐단 말인가.

 

공연의 제목은 극의 마지막과 공명한다.

 

수 백 개의 우연과 필연이 우리의 삶을 조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그 자체다. 수 백 개의 단어와 우연으로 모여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우리는 그 자체다. 우리가 수 백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존재든, 하잘것없이 한두 개의 단어로 치환되든 우리는 그 자체다. 그 자체로 너무나 완전하다.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누르면 터지는 소리를 내며 부피를 줄이는 거품처럼 실체 없는 허상과 같다. 하지만  그 텅 빈 곳에서 로리는 실체를 찾았고, 비로소 아빠를 온전히 놓아줄 수 있었다.

 

난 로리의 기쁨과 슬픔, 상실과 재회를 함께 했다. 90분간 관객은 성장하는 로리를 지켜보았고, 함께 성장했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 로리가 아빠를 놓아주고 엄마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이 마지막 부분만큼은 서술을 아끼고 공백으로 두고 싶다.

 

공연을 통해 이 공백을 직접 채우고, 이곳저곳에 뿌려둔 ‘눈’을 당신만의 사유로 빚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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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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