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 :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공연]

글 입력 2022.03.31 18:0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KakaoTalk_20220331_173214716_01.jpg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처음에 캐스팅이 떴을 때부터 내가 사랑하는 유주혜 배우가 나온다는 소식에 기대했던 작품이다. 북극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표현할지도 궁금했고, 1인극도 처음이라 어떨지 궁금했다. 이 연극에서 로리는 봄이 북극을 떠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계절이라고 한다. 봄이지만 아직 찬바람이 가슴 속을 파고드는 3월 19일, 나는 로리와 함께 북극으로 떠났다.

 

 

 

1. 작은 공간과 한 명의 배우의 다양한 변모



1인극의 특성상 한 명의 배우가 여러 배역을 연기한다. 주인공 ‘로리’는 제 이야기를 설명하며 엄마가 되기도 하고, 아빠가 되기도 하고, 전시장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같이 파티에 간 ‘안드레아스’가 되기도 하고, 자신을 도와준 ‘프리다’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유주혜 배우는 목소리 톤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일인다역을 더욱 쉽고 재미있게 관객들에게 보여주었고, 또 조명을 통해 벽에 비추는 그림자를 두 개로 만들어 무대 위에는 배우 한 명뿐이지만 두 명이 대화하는 듯한 연출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소극장은 맨 뒤에 앉아도 배우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작다. 그렇기에 무대도 다른 극장들에 비해서 아담한 편이다. 무대 왼편에는 책상이, 무대 오른편에는 천장에 매달린 얼음 조각과 경사진 바닥이 있지만 이 공간은 계속 다양한 공간으로 변화한다.

 

무대 왼편의 책상은 아버지의 책장에 놓인 책상이 되면서도 클럽의 식탁이 되기도 한다. 무대 오른편의 경사진 면은 북극이 되면서도 로리의 방이 되기도 하고, 안드레아스 방의 침대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공간이 다양하게 변모하는 것 자체가 소극장 작품의 매력이기도 하다.

 

 

 

2.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나와 가까운 사이든 먼 사이든, 누군가의 죽음을 알게 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친척들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나 외조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내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도 우울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죽음. 끝을 맺고 무(無)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이 얼마나 두려우면서도 허무한 일인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너무나도 선명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 작품은 로리가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내내 불편함을 떨칠 수가 없었던 로리. 아빠의 유골함을 붙들고 아빠와 대화를 나눈다. 아빠와의 기억을 되돌아보며 로리는 아빠의 유골함을 가지고 북극에 가기로 결심하고, 어린 소녀가 혼자서 꽤 파란만장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런 로리를 보며 프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슬픔 때문에 무언가를 결정하면 안 돼.”

 

 

로리의 여행은 마치 아빠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어릴 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즐겁게 떠나는 여행처럼 보였지만, 결국 아빠를 잊지 못하는, 떠나지 못하는 슬픈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결국 엄마가 로리를 찾아오게 되고, 둘은 함께 아빠를 보내주기 위해 북극으로 떠난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지리적 북극이었지만, 어느새 가벼운 가루가 된 아빠가 하늘에 흩날리며 떠난 곳은 세상의 가장 위쪽, 천구의 북극이었다. 그렇게 로리와 엄마는 아빠를 완전히 떠나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소중한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그 사람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은 그 사람 없이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는 계속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나 또한 결국 그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 삶이다.

 

 

 

3. 모든 순간이 합쳐져 이루어내는 성장



로리는 극 시작과 함께 처음에 관해 묻는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그 시작을 향해 상상해본다. 북극으로의 여행, 그 이전 아빠의 죽음, 그 이전 자신의 탄생, 그 이전 인간의 탄생, 그 이전 생명의 탄생…. 그렇게 지금을 만들어낸 모든 순간을 이야기한다. 비록 로리는 충동적으로 북극에 가고, 그곳에서 다양한 일과 좌절을 겪기도 하지만, 분명 그 모든 순간을 통해 로리는 성장했다. 그렇기에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 현재의 순간에는 이 순간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곳에는 미래의 내가 있다.


순간이라는 것은 신비로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때로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혹은 일어났다면, 하고 상상할 때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빨랐거나 늦었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는 일이 딱 그 공간과 시간에 겹쳐 생겨난다. 마치 퍼즐이 정확히 들어맞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들이 촘촘히 연결된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 이후의 일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순간은 소중한 것이다.


*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처음과 끝의 이야기, 삶과 죽음의 이야기, 성장의 이야기, 여성의 이야기. 그 모든 것을 엮어 만들어낸 섬세한 작품이다. 봄에 떠나는 북극, 그 속 한 소녀의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에디터 명함.jpg

 

 

[김민성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83964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E-Mail: artinsight@naver.com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Copyright ⓒ 2013-2023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