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하릴없음과 정신없음, 그 사이 어딘가

이도 저도 아닌 나라는 사람. 그런 사람 알아가기
글 입력 2022.03.2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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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오늘 일정이 무엇이었는지 잠깐 멈추고 생각하곤 한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일정들을 캘린더에 적어 놓기도 한다. 캘린더에 일정이 쌓이는 것을 보면 뭔가 뿌듯한 감정이 인다. 아. 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이런 나, 변태인 걸까. (웃음)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시작점을 알 수 없는 충만한 만족감이 전신으로 뻗어나간다. 한 가지 일을 하는 와중에도 이다음엔 어떤 일정들이 있는지 계속 생각한다. 사실 모든 일정이나 해야 할 과제들을 전부 완벽한 수준으로 마무리 짓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최대한 하려고는 한다. 하루의 일과 중에 더 이상 시간을 뺄 수 없어 다른 일정을 추가하지 못할 때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정신없었던 하루의 모든 일과를 마무리하고 샤워를 한 후 노곤한 몸으로 침대에 빨려 들어가 맥주를 홀짝일 때, 바쁜 삶이 나라는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오늘 일정이 무엇이었는지 잠깐 멈추고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전부 취소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는다. 다른 종류의 노곤함이 밀려들어온다. 지난밤 침대와 합체라도 한 것인지 눈을 뜨고도 여간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 오늘 일정을 전부 취소했지. 일어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뜬 후 땅거미가 질 때까지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기도 한다. 원인 모를, 그러나 기분 좋은 무력감이 몸을 감싼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이게 인생이지.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 뭣하나. 지금 이 순간 하릴없음을 즐기는 한량 같은 나의 인생이 최고이시다.

 

침대에서 눈을 떠 하루 온종일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눈을 감곤 하는 날에는 오늘 해야 했던 일정들, 오늘 하지 않아서 이후 늘어날 일정들 같은 생각은 단 하나도 들지 않는다. 그 순간 나의 휴식, 혹은 멍 때림,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생각(?) 들에 집중한다. 미래는 사라지고 현재만이 남는다.

 

정 반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두 사람의 이야기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바쁜 것을 좋아한다. 바쁜 일상을 사는 것을 선호한다. 아,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 누워서 보내는 하릴없는 일상을 사는 것을 선호한다. 우와, 이 정도면 나는 이중인격인 것인가. 어떤 날은 바쁜 내가 육체의 주도권을 쥐고 나를 움직이고, 어떤 날은 게으른 내가 육체의 주도권을 쥐는 거지.

 

주변을 보면 보통은 한 가지 스탠스로 정해진다. 성실한 친구들은 일정을 미루거나 약속을 취소하거나 하는 걸 보지 못했다. 몸이 아프다던가 하는 사정이 생겨 집에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노트북을 부여잡고 과제를 해낸다. 바쁜 것을 싫어하는 느긋한 친구들은 정말로 딱 느긋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과제의 마감일이 코앞으로 닥쳐 와서야 시작하고, 약속시간에는 절대 일찍 오는 법이 없다. 으. 그놈의 코리안 타임.

  

나는 참 애매하다. 바쁜 것을 좋아하는 날에는 누가 봐도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는 연락조차 잘되지 않는다. 어떤 날에는 약속시간 두 시간 전에 도착하여 근처 서점에서 책을 골라 읽고 있고, 어떤 날은 의도적으로 늦는다고 말한 후 정말 천천히 약속에 나가는 경우도 있다. 딱 그 중간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면서도 그게 잘 안된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못한다더니. 이도 저도 아닌 나. 그것이 나.

 

뭐가 문제인가 생각을 해보았더니, 나는 하루를 조금 다른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루 안에 많은 기분의 변화, 취하는 입장의 변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 환경의 변화 등이 있을진데 나는 그것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하루의 시작 전에 그 하루 전체를 이끌고 나갈 행동양태를 정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뿐이다. 하루를 쪼개야 했다. 하루 종일 바쁘거나 하루 종일 하릴없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반만 바쁘고 반만 하릴없도록 하루를 나눠야 했다. 사실 내 삶의 방식이 문제라고 생각된다기보다는 조금의 변화를 주고싶었기에 생각이 들자 실행해 옮겨보았다. 낮에는 바쁜 나로, 저녁에는 게으른 나로. 혹은 오전에는 게으른 나로, 오후에는 바쁜 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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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 도서관에 가 예습을 하고, 수업을 들은 후 복습 그리고 과제를 했다. 카페에 가 그날 읽어야 하는 분량의 책을 읽었고 다른 대외활동의 리뷰 작성에 필요한 웹 소설을 읽었다. 저녁이 되었고 할 일이 남아있었지만 결심했던 대로 물건들을 정리한 후 집에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어 보았다.

 

실패했다. 아드레날린이 체내에 남아있던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집을 뒤엎고 대청소를 해버렸다. 아아, 깔끔해진 내 집이여. 그렇다면 이제 반대로 시도해 볼 차례다.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고 점심이 지나서까지 늘어지게 잤다. 도중에 눈을 몇 번인가 떠봤지만 의식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3-4시 이전의 일정들은 모두 취소한 채 쉬었고, 해가 슬슬 옆으로 기울 때가 되어서야 활동에 나섰다.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 과제를 하고, 대외활동을 준비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계획은 완벽했다. 자, 시작.

 

실패했다. 학교 앞 카페에 가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도통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하염없이 듣는 것이 30분이요, 세수를 하고 나왔건만 화장실에서 정신 차리자고 찬물 세수를 몇 번인가 더 했다. 그러고선 다시 멍 때리기의 반복. 눈앞에는 노트북과 책과 공부할 자료들로 가득하지만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나의 몸아.

 

사람이라는 것이 이리도 간사하다. 아니, 간사하다는 표현은 좀 그런 것 같고, 음.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바뀌기가 힘들다. 내추럴 본 아이덴티티 뭐 그런 것일까. 결국 나는 어떤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인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변화의 시도는 끝이 났다.

 

결론. 나라는 사람은 이도 저도 아니라는 것. 뭐 좋게 포장한다면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나는 정신없이 바쁘게 살 수도 있고, 하릴없이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결국엔 해석의 문제가 아닐까? 그런 나를 좋게 바라보면 나는 좋은 게 좋은 것이지- 하며 사는 것이고 나쁘게 바라보면 이번과 같은 변화의 시도를 해 나아가겠지. 양 극단, 그 사이 어딘가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는 비지맨, 하루는 레이지맨으로 사는 것은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기에. 사람들이 사우나를 가도 보통 온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냉탕과 열탕을 왔다 갔다 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나.

 

오늘도 이렇게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를 조금 더 잘 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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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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