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취향을 찾아서

프로젝트명: 취향의 재발견
글 입력 2022.03.15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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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찾아서


나는 내 취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창작자의 의도가 있거나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는 것, 유려한 문체, 감정적이거나 무거운 것, 생각하게 만드는 것 등. 숨은 의미를 찾는 걸 좋아하고 혼자서 곱씹는 것도 좋아한다. 말하자면 여운이 남는 걸 좋아한다.


구체적으로 취향을 얘기해보자면 영화보다는 그림이었다. 비슷한 값을 지불하고 비슷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순간에 머무를 수 있고 다시 돌아가서 볼 수 있는 그림이 우선이었다. 영화는 통째로 나의 취향을 스쳐 가야 여운이 남지만, 전시는 시선을 사로잡는 단 하나의 작품만 발견해도 맘이 벅차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땐 영화 보자고 수작 거는 걸 안 좋아했다. 틀에 박힌 듯 새로 개봉한 상업 영화를 보러 가자는 말이 몰개성적인 권유로도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관을 찾는 건 드문 일이 되었고 천만 관객 영화 목록은 제목만 익숙해졌다. 적어진 선택지에 취향까지 더하니 남는 게 별로 없었다.

 

분명 그랬단 말이다.

 

 

netflix.jpg


 

최근 나는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고 있다.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는 많지 않지만 내 기준으로는 '저는 요즘 영화를 보고 있어요'라고 할 정도로, 내가 본 영화 제목을 말하면 친구가 '네가 그것도 봤다고?' 할 정도로 의외인 장르로.


영화를 보게 된 건 별 의미 없었는데... 코로나 확진자는 계속 늘어가고 밖에 나가는 건 내가 아닌 가족의 건강까지 고려해야 할 일이 되고, 매일 비슷한 날이 되풀이되니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나의 취향들 말고 새로운 것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새로운 것은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태블릿으로 영화를 보는 데는 어떤 준비도 필요 없었고 시간이 많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보다가 멈춰놓고 할 일 해도 되는 거고 적당히 흐린 눈으로 지나가도 됐다.

 

보다만 것과 포기한 것을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영화는 론스타 사태에서 이야기를 가져온 '블랙머니', 탈출 실화를 모티브로 한 '모가디슈', 그리고 이정현의 연기가 뛰어난 걸로 유명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취향을 찾기 어려운 시청목록의 나열이다. 이제 와 말하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지만, 나는 한국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따뜻한 색감의 영상을 좋아해서 한국 영화나 할리우드 액션, 히어로물과 오랜 시간 거리두기를 해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색감이고 취향이고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고민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느껴져서 한동안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블랙머니였고, 모가디슈의 깻잎을 떼어주는 장면은 나를 한반도의 지역통합까지 끌고 갔고, 성실하고도 비극적인 인생은 살아내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지금은 '전우치'를 시작했고, 사이사이 '방구석 1열'의 여러 회차를 봤다. 회차 설명을 봐도 낯선 영화가 많지만, 잘 찾아보면 아는 게 있어서 어떻게 저렇게 킬링타임용으로 화면을 띄워두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영화-특히 한국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


내가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처럼 사실 많은 일들이 별거 아닌 데서 시작되곤 한다.

 

나는 10대 때 가요를 거의 듣지 않았다. 아이돌은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오랜 시간 해외 음악을 찾아 듣다가 지쳤던 건지, 어느 순간 플레이리스트에 한국 음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듣고 싶은 음악도, 듣고 있는 음악도, 관심이 가는 것도 온통 한국 음악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돌 음악에는 마지막까지 심드렁했다. 그러다 음악을 듣는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아는 숨은 아이돌 명곡을 언급하길래 나도 따라 듣기 시작했다. 유명하지 않은 아이돌부터 유명 아이돌의 수록곡까지. 취향이 없으니 가리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취향이 확고하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취향을 몇 번이나 전복해왔음에도 나는 내 취향이 큰 틀은 유지하고 세세한 취향만 그때그때 바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취향 밖 영역에는 무관심했다. 취향을 고수하다가 내가 그어놓은 선에 고립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의 새로운 장기 프로젝트로 취향 찾기, 취향의 재발견이 선정되었다. 불가항력이라고 부를 만큼 취향을 관통하는 일이 아닌 이상, 취향이 아니었던 것을 우선순위로 두고 이것저것 찍어먹어 볼 생각이다.

 

다가오는 새로운 선택은 도서 구입. 장르는 문학, 세부 장르는 sf가 될 예정이다. 그다음은 오랜 시간 벽을 쌓아온 영미문학에 sf 끼얹을 예정이고 또 그다음은... 내가 외면해온 것 다른 것을 발견해서 끄집어내려한다. 애니메이션이든 드라마든 아니면 다른 무엇, 내가 모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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