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이 정말 잘 지내면 좋겠어요 - 영화 '소피의 세계'

글 입력 2022.02.25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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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시사회를 다녀왔다. 영화의 소개글이 내 눈길을 끌었다. ‘2년 후에 도착한 따뜻한 안부.’ 거기서 내 취향일 거라는 예감이 왔다고 할까?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이어짐이 이 영화 안에 있을 것 같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 역을 맡았던 김새벽 배우의 연기를 또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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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회 당일 영화 티켓을 수령할 때 노란 편지봉투를 함께 받았다. 그리고 티켓 수령처의 직원분이 무료로 사진 찍는 코너가 있음을 알려주셨다. 영화를 보기 전엔 ‘무료로 사진 찍는 이벤트가 있다니 재미있네’ 정도로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사진이라는 소재가 영화와 밀접한 것이라 그런 이벤트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었다. 편지봉투도 마찬가지였다. 기억과 기록, 전달이라는 의미에서 그 둘은 밀접하다.


감독 및 출연진의 무대인사에서 들었던 말 중 기억에 남은 것은 ‘이 영화가 여러분에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고 기억하게 하면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그때부터, 그러니까 영화 시작 전부터 떠오른 노래가 있었으니 그것은 선우정아의 <그러려니>였다. 영화관의 불이 꺼지기 전에 이미 몇 가지 추억들이 건드려졌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도 또 다른 지나간 인연들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수영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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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인왕산이 보이는 아기자기한 집, 수영과 종구라는 젊은 부부의 보금자리에서 시작한다. 수영은 우연히 인터넷 서핑 중에 자신과 종구의 사진을 보게 되고, 그 사진이 올려진 블로그 글이 2년 전 자기 집에 나흘간 머물렀던 여행객 소피의 글임을 알게 된다. 사진과 글로 기록된 소피의 기억에서, 수영은 2년 전 부부의 일상을 떠올리게 되고 소피의 북촌 한옥마을 여행담 또한 알게 된다.


당시 수영과 종구는 종구의 어머니 수술비 마련을 위해 수영이 너무나 좋아하던 집으로부터 나가야 할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 집에 들어오는데 시어머니의 돈이 들어갔었고 그것을 수술비로 돌려드려야 했던 것이다. 수영은 상황을 이해하지만 종구에게 약간의 원망이 있었고, 종구는 수영의 마음을 확대 해석하며 수영이 자신을 미워하고 떠날까 봐 심히 불안해한다. 서로를 종구 씨, 수영 씨라고 부르며 아기자기한 취향과 다정한 손 떼 묻은 물건들, 사진들과 엽서들이 보이는 예쁜 집에서 결국 둘은 소피가 외출한 사이 감정이 터져서 싸우게 되고, 서로 미치겠다는 듯이 팔딱거리고, 엉엉 울고, 종국에는 둘이 부둥켜안고 화해를 한다.


그러나 소피는 휴대폰을 가지러 잠시 집에 들어왔었고, 두 사람의 기억은 사실 세 사람의 기억이었던 셈으로 소피의 기록 안에 살아 있던 것이었다. 잊고 있던 기억, 그때는 벅차고 힘들었으나 이제는 왜 그리 힘들어했는지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수영은 과거의 감정을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소피의 기억, 소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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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블로그를 읽는 동안 글에서 파생되는 수영의 기억도 스크린에 나오지만, 선행되는 것은 여행자이자 기록자인 소피의 기억이다. 북촌에서 헌책방을 한다는 주호라는 친구를 찾기 위해 북촌 한옥마을 근처의 수영과 종구의 집에 숙소를 잡은 소피는 주호의 헌책방을 찾아 한옥마을 거리를 하릴없이 돌아다닌다. 무엇이 유명하다더라 찾고, 보는 것이 아니라 헌책방을 만날 때까지 돌아다니고, 주호의 책방을 만날 가망이 더 없어진 날에는 북촌의 따사로운 봄 햇빛 아래서 유유히 책을 읽기도 한다. 그 모습은 관광객의 것이라기보다 북촌 근처에 살고 있어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누군가의 모습 같기도 하다.


헌책방을 찾을 단서는 의외로 다른 곳에서 생긴다. 소피가 한국에 오게 된 다른 이유였던 친구 조-아마 유학이나 워킹 홀리데이 등으로 소피가 당시 살던 나라에 오래 같이 머물렀을-의 선물로부터였다. 그러나 막상 만나게 된 주호도 조도 소피와의 약속에 함께 해주지 못한다. 조가 꼭 같이 인왕산 등산을 하자는 말, 혹은 주호가 인왕산 같이 못 가면 공항까지 차를 태워주겠다고 한 말. 소피는 일상의 바쁨 내지는 관계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친구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지금 그들의 삶에 다시 과거와 같이 끈끈한 연을 맺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각자의 일상에서 두 사람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그런가 하면 고작 나흘간의 연이지만 새로이 곁을 내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들이 수영과 종구다. 두 친구들이 가지 못한 인왕산을 그 부부가 함께 올라가고 걸어준다. 여행의 시간이 끝나고 부부는 소피와 작별하며 말한다. 다시 만나자고.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는, 지난 나흘간 당신은 마음을 나눠준 사람이라는 뜻을 소피도 나도 모르지 않는다.


전달되거나 전달되지 못한 추억과 감정. 확실한 전달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 비록 나와 소중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과 이제는 전처럼 연을 묶을 수 없더라도 그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시냇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가 이제한 감독의 <소피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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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 수많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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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친구 조를 볼 때 나는 동창 한 명을 떠올렸다. 외국에 워홀을 가서 몇 년째 계속 머무르고 있는 친구다. 나는 그 애의 소식을 다른 친구로부터 들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녀는 자유로워 보였고 자기가 있는 곳에 참 어울려 보였다. 지금은 어찌 살고 있으려나, 돌아왔을까, 아니면 계속 자유롭게 밖에 있을까. 어쩌면 친구가 외국에 있다고 해서 자유롭다는 뜻은 아닐 수도 있지만 계속 머무는, 그녀에게 ‘좋은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어디에 살고 있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집에 돌아와서 선우정아의 <그러려니> 노래를 뮤직비디오와 함께 감상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몇 있었다. 초등학교 때 특이한 별명을 가져서-자기가 지은 별명이었다- 이제는 본명 말고 별명과 얼굴만 떠오르는 친구, 반대로 이름이 특이해서 이름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친구, 전학 가기 전에 미처 인사를 못 하고 떠나보낸, 눈이 예뻤던 친구. 초중고에 걸쳐 기억나는 몇 분의 담임 선생님들. 건강히 잘 계시는지 안부가 너무나 궁금하다. 학원이 끝나고 나면 학원 앞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졸라대면 몇 번이고 뺑뺑이 놀이기구를 돌려줬던 원어민 선생님. 누가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수업이 다 끝난 시간에 아이들하고 그렇게 열심히 놀아줬었다. 영어 캠프에서 우리 팀을 맡아줬던 또 다른 원어민 선생님. 우연히 한 식당에서 만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었다. 캠프 생활 동안 친해져서 그때는 참 많이 아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라도 인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글을 쓰다 <그러려니>를 두 번째 들었고 듣는 것만으론 참을 수 없어 일기장에 가사를 필사했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더 자주, 그리고 <그러려니>의 가사를 필사하고 이 글을 쓰는 내내 든 생각.


…다들 잘 지낼까? 다들 잘 지냈으면.


기억을 돌이키고 있노라니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를 처음 봤을 때의 감상도 떠올랐다. 커가면서 저렇게 많은 사람을 만난다고? 새삼스러운 사실을 한 소년의 성장 연대기로 끊김 없이 보고 있으니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잊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영영 못 잊고, 어떤 사람은 어쩌다 한번 떠올리게 되고 그러면서 계속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니. 그 생각에 미쳤을 때 나는 조금 슬펐던 것 같다.


나는 조만간 또 하나의 헤어짐을 앞두고 있다. 한 달 조금 넘게 듣던 수업 하나가 끝나간다. 수강생 수가 많지 않아 더 친밀한 느낌이 들던 수업이어서 선생님도 다른 수강생분들도 앞으로 못 만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아쉽다. 코로나 시국이 아니었다면 수업 이후 그냥 친구가 되었을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더 그렇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 새로운 사람들을 여럿 만나기도 했다. 새로 만난 분들과는 또 새로운 것들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헤어짐이 만남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데에 서글픔을 느꼈던 모양이다.


 

끊어진 연에 미련은 없더라도 / 그리운 마음은 막지 못해

 

(...) 잘 지내겠지 / 대답을 들을 수 없으니

 

쓸쓸히 음 음 / 그러려니 그러려니

  

- 선우정아, <그러려니> 中

 


그러니 정말 다들 잘 지냈으면.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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