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 [도서/문학]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을 읽고
글 입력 2022.02.0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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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 내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말이 있다. '사연 없는 사람 없다', '그럴 수도 있지', '그 사람도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야.'

 

사람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안고 살아간다. 나는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상식적이고 윤리적인 테두리 안에 존재한다면 모두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타인의 이야기를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은 역지사지의 태도와 사람 사이의 연대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싶다.

 

'책을 읽으면 행복해지는 게,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겨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남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책이 우리에게 주는 미덕이라 생각합니다.' 박완서 작가의 말처럼, 타인이 쓴 글을 읽는 것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의 어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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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은 53명의 주인공이 각 장에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내가 53명의 삶을 짧게나마 훔쳐서 사는 느낌이 든다. 취미로 배운 폴댄스 영상이 인터넷에 퍼져 갑작스레 직무 이동을 하게 된 권혜정이 되었다가, 가습기 살균제로 가족을 잃고 전공 학과가 통폐합되면서 위태로운 삶을 살다 결국 자해를 한 한규익이 되었고, 책상이 있는 보통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자신의 처지에 안심하는 한편 대출로 어렵게 들어간 아파트에서 층간 소음으로 고통받는 김시철이 되었다.

 

책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 학과 통폐합, 층간 소음, 성소수자의 시선, 싱크홀 추락 사고, 대형 화물차 사고, 산업 재해, 이별 살인 등 우리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사회 문제를 담고 있다. 그동안 나는 뉴스나 기사를 통해 제삼자의 시선으로 그 문제들을 보아 왔다. 말 그대로 '보기'만 했던 내가, <피프티 피플>을 통해 문제의 피해자나 관련자가 되어 그 문제들을 간접적이지만 짧게나마 '겪어'보았다.

 

그리고 그 짧은 경험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바탕의 한 겹을 이루었다. 최근에 발생한 건물 붕괴 사고를 보면서도 서진곤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건설 현장에서 중고 비계와 질 낮은 자재 때문에 발생한 사고로 인해 그를 포함한 인부 9명이 부상을 입게 된다. 진곤은 그러한 노동 현장이 참 지리멸렬하고 더러운 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고가 자신의 탓으로 느껴져 자책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러한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내가 하던 생각과 너무나도 결이 같은, 소현재의 말이 떠오른다. '누구도 그런 환경에서 일해서는 안 되었다. 설령 아주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아주 잠깐 일하는 비정규직이라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게 당연한 직업 같은 건 없어야 해요. 공장이든 병원이든 모조리 다 사람을 갈아 넣고 있어요. 믹서기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건 나약한 게 아니에요."

 

연이어 보도되는 이별 살인 사건을 보면서는 조양선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이혼하고 올 테니 제발 헤어지지 말아달라던 남자에게 살해당하는 딸을 눈앞에서 보게 된 그녀의 이야기가. 책에는 그녀의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었지만, 나는 감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절망이, 분노가, 애통이, 참혹이, ·····.  소리 없어서, 마음을 더 찢어지게 하는 비명이 책을 뚫고 전해지는 듯했다.


*

 

정세랑 작가는 말했다. <피프티 피플>의 한 사람이라도 당신을 닮았기를, 당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바란다고. 책 속에는 사회 문제가 담겨 있기도 하지만, 누구나 가질 법한 개인적 고민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작가의 말처럼, 글에서 나와 닮았거나 내가 닮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김한나는 책을 사랑하고 사서의 일도 사랑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임상시험 책임자가 된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직업의 일을 해 나가던 어느 날, 삶이 무료하다는 친구에게 몇 권의 책을 추천해준다. 이후 자신이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며 덕분에 재밌어졌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녀는 다시 책을 골라 이번엔 직장에 가져가기 시작한다. 시험 참가자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들로 골라서.

 

'아무도 한나가 사서인 걸 모르지만 한나는 사서로 살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몰라도 비밀리에는 사서일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든 놓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현실에 타협하더라도 정체성만은 잃지 않는 모습은 닮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고백희는 영화관 아르바이트생이다. 백희의 생각은 지금의 나와 많이 닮아있어서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서비스직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만은 되지 않을 것이다. 백희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아직 몰랐다. 사람들은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까? 확신을 가지고 대학생이 된 다음, 확신을 가지고 직업을 가지나?'  직업을 가진 수많은 사람을 보며 어떻게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왜 선택했는지, 혹시 후회는 없는지, 궁금하면서도 부러운 요즘이다.

 

'아파도 괜찮아. 한심해도 괜찮아. 너의 엉망인 부분들까지 사랑해'라는 가사를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또 나를 본다. 혼란스럽고 흔들리는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나의 모습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나를. 미완성의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나를.


그 외에도 강인함과 지지 않는 마음을 사회적 약자에게 옮기고 있는 이설아, 후배에게 같은 사람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며 예술과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배윤나, 어려움 없이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감사히 여기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호,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괴로워하기도 하는 소현재를 닮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피프티 피플>속 53명의 사람들은 따로, 또 같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들은 의사와 환자로, 직원과 손님으로, 가족의 친구로, 친구의 가족으로 얇거나 굵게, 느슨하거나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 장에서 우연히 한자리에 모이게 된 그들은 협력하면서, 배려하면서, 도와주면서 다 같이 무사히 화재 현장을 빠져나온다. 그 모습은 평소 내가 바라던 이상향과 같아서 읽는 동안 마음이 울렁거렸다.

 

인생은 각자도생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공존동생의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결국 사람은 서로의 노동에, 관심에, 배려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선은 우리의 생각보다 빽빽하고 촘촘하게 이루어져 있어 하나의 망이 되고, 그것은 곧 우리를 둘러싼 안전망이 된다. 그리고 그 안전망은 서로에게 위안이 되기도, 위험이나 절망에서의 구원이 되기도 한다.

 

세상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잡아매는 것은 무심히 스치는 사람들을 잇는 느슨하고 투명한 망이라고 생각한다는, 정세랑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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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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