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별과 밤

글 입력 2022.01.2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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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마룻바닥에 커피콩을 쏟았다. 이삭을 줍듯 볶은 콩들을 주웠다. 오늘의 원두는 세게 볶아져서 향이 제법 강했던 터라, 주운 후에도 나무의 결 사이로 냄새가 스밀 것이다. 무릎으로 기어 거실 중앙까지 굴러간 콩을 손바닥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밤하늘에 쏟아진 별들도 이렇게 주워 손에 쥘 수 있다면. 별을 한아름 따다가 볶고 갈아서 우려낸 음료는 어떤 맛이 날까?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빠트리면서 나는 지구 너머의 맛을 생각했다. 한낮의 실없는 몽상은 금세 끝난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까먹고 싶지 않아서 일기장 한 켠에 오늘의 궁금증을 적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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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일기장엔 언제나 그런 이야기가 적혔다. 여름밤 이야기. 시베리아 벌판을 겨드랑이로 끌고 오는 방법. 열대야를 즐기는 나만의 팁. 불면에는 와인 한 잔을 처방.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고소한 반찬냄새. 올빼미 라이프. 달밤에 체조. 몸이 제일 가벼운 시간은 자정. 조금은 엉뚱하고 그저 그런 이야기들. 하지만 너무 수수해서 오히려 특별하게 기억되는 것들. 일기장에 축적된 초단위의 묘사들은 그 시간과, 시간 속의 나에 대한 사랑스러움으로 치환됐다. 그 순간이 인상적이었다는 기록에서 기실은 그 순간 속의 내가 좋았다는 본심을 읽어내곤 했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별을 조용히 바라보는 일이 퍽 좋았다’는 문장을 읽으면 ‘별을 보던 순간의 나를, 이렇게나마 보관하고 싶었던 거군’. 그런 생각을 했다. 지난 여름은 과거의 나를 지속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계절이라고.

 

팔월엔 짤막한 감정의 연대기들을 더듬으면서 방충망 사이로 들어오는 여름밤의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풀벌레들의 교향곡이 어느 순간 변주구간에 접어들면, 강렬한 가로등 불빛 사이로 별이 점멸하는 듯이 깜빡거리는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펜을 딸깍거렸다. 충만함이 가슴팍으로 사정없이 파고들곤 했다. 자주 죽고 새로 태어났다. 반복되는 블러디 나이트. 그러나 언제나 가운데엔 생명이 있었고, 선연한 찔림은 매번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 결코 질리는 일이 없었다.

 

찾아온 영감들을 하나도 흘리고 싶지 않아서 항상 허겁지겁 글을 썼다. 뭉개지는 검은 펜촉 끝에서 재현되는 밤의 모습들. 아득한 별과 커다란 밤을 그렇게 손 안에 가득 움켜쥐었다. 무형의 것을 조금이나마 잡은 데서 오는 기쁨! (잡았다고 생각하고 싶은 인간의 자만일지도 모르지만.) 시장에서 사온 토마토를 씹어 먹으며 여름을 몸 안에 저장했던 것처럼, 별과 밤에 대한 지극히 사소하고 사적인 기록을 통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었다.

 

갈아 마시지 않아도 별이 내 안에 있었다. 밤이 내 안에 있었다. 심지어 우주까지도. 끝없이 팽창하는 나의 몸을 감히 가늠해보면서 수마에 빠졌던 매일.

 

혹한의 일월에 팔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두터운 창으로 막혀 들이킬 것이 부족해서다. 기근의 시기다. 자람이 없는 땅이라도 구경하러 호기롭게 나섰다가도 이내 종종걸음으로 돌아와 보일러를 높이게 되는 시기. 뜨겁게 팔팔 끓인 차 한 잔 없이는 아침을 시작할 수 없다.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겠노라 엄숙히 선언하던 스물의 객기는 시리다 못해 찌르는 듯한 공기 앞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물론 오늘처럼 가끔은 호시절을 회상하듯이 얼음 몇 덩이를 컵 속에 살며시 밀어 넣기도 하지만 말이다.

 

온도를 높이고 얇은 옷을 입은 채 가짜 팔월을 집안에 불러와도, 그건 너무나 연약해서 창을 열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다시 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다. 행성과 위성의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넣어 밤하늘의 북슬북슬한 흰털을 빗어주던 날이 그립다. 고작 다섯 개였던 감각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던 계절. 잔뜩 두터운 스웨터를 몇 겹 씩 껴입고 뒤뚱거리는 사람처럼 무겁고 무감한 몸을 침대에 뉘인 채로 창 밖을 본다. 별과 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런 까닭으로 여름을 기다린다.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몇 달 전 종이 위에 선명히 남아있는 흔적을 그저 손끝으로 문지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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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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