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 가지 시선으로 본 역사 [도서]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 - 1768년 중국을 뒤흔든 공포와 광기>를 읽고
글 입력 2022.01.2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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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8년, 청나라는 건륭제 즉위 33년을 맞이한다. 겉보기엔 태평성대처럼 여겨지는 시기였다. 한족 집단은 이제 만주족과 융화된 듯 보였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시기였다는 것이 수치와 함께 증명되고 있었다.


그러던 이 시기, 전국에 ‘요술’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요술사들이 변발을 자르고 그것에 마술을 걸어 영혼을 훔친다는 낭설(浪說). 이 소문은 점차 커져 건륭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그는 진노하여 관료들을 문책한다. 사건 초기에 소문을 은폐했던 관료들은 뒤늦게야 황제의 분노를 막기 위해 ‘요술사’로 의심 가는 이들을 몰아세웠다.

 

그러나 당연하다시피 요술에 대한 소문은 거짓이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억울한 죄를 받게 된다. 거대한 청 제국은 왜 이러한 소문 하나에 혼란을 겪었을까. 오늘은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 - 1768년 중국을 뒤흔든 공포와 광기>를 읽고, 그 해답을 세 가지 테마로 분석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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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중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백성, ‘고발’이라는 권력


 

‘요술’이라는 행위가 시작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소문의 시작점인 백성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1768년 중국 동부와 중부를 뒤흔든 광기의 배경에는 요술에 대한 지역민들의 맹신이라는 문화적 토양이 있었다.” (p.49)

 

 

저자는 이렇게 말하며, 요술 사건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커진 배경을 분석한다. 18세기 중국은 아직 주술이나 미신에 대한 믿음이 민간에 확고히 존재했다. 유아 사망률이 높은 가부장 사회에서 어린아이(사내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이 요술 사건에선 어린아이의 변발을 노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또한 요술사들은 목표물이 된 사람에게 정신을 잃게 하는 가루를 뿌려 저항할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백성들은 요술이 불러올 위협에 대해 광기 어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대를 이을 후손을 노린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의심의 시선을 던졌던 것이다.

 

이러한 백성들의 예민한 시선의 배경에는 경제적 요인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요술 사건이 청 왕조를 뒤흔든 것은 쇠퇴기가 아니라 ‘태평성대’라고 불리던 시기였다. 건륭제의 조부인 상희제가 삼번의 난을 진압했고, 타이완의 세력도 소탕한다. 이 덕분에 국내에는 평화의 시기가 다가오고, 급속한 인구 증가와 상업 발달이 이어진다.

 

여기서 저자는 ‘중국에 유입된 백은의 양’을 표로 정리하며 설명해준다. 1760년대 초부터 대외수출품에 대해 지불받은 멕시코의 백은이 유입되며 백은의 공급량이 증가하였고, 1780년에 이르러선 급증하는 수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재화는 평화의 시대에 빠르게 증가하는 인구압을 완화하는 효과를 거뒀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그 경제적 성과는 전국으로 고르게 배분되지 못하였고, 이것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인 장난 구역도 마찬가지였다. 2022년, 현재의 우리도 경제 정책의 성과를 두고 많은 정치인과 경제학자들이 갑론을박한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은 정부의 호전됐다는 경제 수치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를 체감하기 어렵다. 이와 비슷하게 당시 중국의 일반 민중들은 쌀값과 같이 자신의 삶과 관련한 부분에서는 경제 성장의 실효를 맛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늘어나는 인구와 이를 부양하기 위한 식량의 높은 가격은 당시 민생을 무척이나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런 시기,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관용이나 동정심을 잃기에 십상이다. 평소였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사건에도 사람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이 시기엔 단순한 신체접촉이나 친근함의 표시가 요술 행위로 오해받았다.

 

특히 그런 사회적 불안 시기를 지날 때 가장 먼저 분노의 표적이 되는 것은 외지인과 부랑자다. 요술 사건에서 요술의 주체로 자주 호명 받는 것이 바로 탁발승들이다. 이들은 각지를 떠돌아다니고 종교적인 행위를 하며 사람들의 보시로 생계를 연명했다. 이러한 주술적 면모를 가진 탁발승 등 외지인의 방문은 “요술이 유행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위협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렇듯 공포에 휩싸인 백성들은 이를 없애기 위해 요술을 펼쳤다는 죄를 씌울 희생양이 필요했다. 요술을 펼쳤다는 ‘고발 행위’를 통해 일종의 권력을 맛본 민(民)들 사이에서 요술 사건의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건륭제, 의심과 공포를 조장하다


  

요술 사건의 시작이 백성들로부터였다면, 이것이 더 크게 번졌던 데엔 건륭제의 태도도 한몫했다. 건륭제는 요술 사건에 대한 보고를 지방관에게서 들으며 이것이 민족적 반의식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기 시작했다. 건륭제는 요술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은 초기에는 그것이 한족의 저항 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에도 이를 애써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지방관과 나눈 주접 문서를 살펴보면 건륭제가 단순히 요술 행위를 그치게 하라는 명령만을 내린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요술 사건이 가지는 다른 측면을 생각하게 됐다. ‘왜 하필 변발인가?’ 건륭제는 머릿속에는 이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백성들은 변발을 잘릴 경우, 나머지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려야만 요술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건륭제는 십여 년 전 마자오주 사건의 악몽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다 깎아버리는 방법은 요술사들이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 만주족의 지배를 적대시하게 할 것이라는 편집증적 생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또 한 번 건륭제의 역린을 건드렸던 것은 요술 사건이 벌어진 지역 때문이었다. 1768년의 요술 사건은 장난 지역에서부터 시작됐다. 장난 지역은 한족들의 문화가 강한 지역이었다.

 

 

“두려움과 불신, 존경과 질시 등은 모두 영혼을 훔치는 일이 시작되었던 장난 지역에 대해 만주족이 느끼고 있던 감정들이었다.” (p.117)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장난 지역은 풍부한 농산물과 활기찬 상업 활동 덕분에 우아한 기풍과 학술적 성과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황제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규정된 비율보다 더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고 관직을 차지함으로써, 콧대가 높아진 장난의 학인 지도층을 통제하기 위해서 골머리를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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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의 모습, 요술 사건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최종적인 판결을 내린 사람은 언제나 건륭제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건륭제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장난 지역은 만주족들이 가장 한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문화의 중심지로서 가장 부유하고 어느 지역보다 학문적, 예술적으로 뛰어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는 만주족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가장 반(反)만주적인 공간이었다. 이에 건륭제는 장난 지역에서 발생한 요술 사건이 혹여나 모반의 시작은 아닐지 염려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관료들을 무섭게 몰아붙였고, 많은 관료들은 황제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요술 사건의 주동 인물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그가 지방의 순무 등과 나눈 주접을 살펴보면, 그는 지방관이 요술 행위가 아니라고 잘 판단한 사건에도 마치 요술 사건이 실재한다고 믿는 듯 관료들을 다그친다. 건륭제는 만주족 관료들에게 너도 정난의 악습에 물든 것이 아니냐며 무능하다고 일갈했고, 요술 사건의 주범을 반드시 잡아 오라고 관료들에게 요구했다.

 

아마도 건륭제는 영혼을 훔치는 요술사보다 만주족의 미덕을 훔치는 한족을 더 두려워했던 것 같다. 건륭제가 1768년의 요술 사건을 대처하는 일련의 자세를 살펴보면, 마치 조선 선조의 선위 소동이 떠오른다. 선조가 선위 소동을 일으키며 자신의 신하들을 가려냈듯, 건륭제 또한 이 요술 사건을 계기로 관료들의 태도를 의심하며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건륭제는 자신의 기준에 비춰보았을 때 요술 행위자 검거에 소극적인 관료들을 만주족 전통을 잃어버린 이들이라고 치부하며 향후 요직에 배제하려고 한다. 이처럼 건륭제는 요술 사건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확산시키고, 재확인 받고 싶었던 것이다.

 

 

 

관료제 시스템과 요술 사건의 해결


 

상황이 이에 이르자, 관료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이들이 있다면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관아로 끌고 와선 이들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모진 고문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건륭제는 고문을 되도록 피하라고 말했지만, 동시에 빠르게 요술 행위자를 발본색원할 수 있길 원했다.


결국 이 지점에서 건륭제는 바로 이 두 문제를 성급 관료들에게 떠넘긴 꼴이 됐다. 관료들은 이러한 복잡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일부는 황제의 눈치를 보며 많은 요술 행위자들을 잡아들이며 자신의 일 처리를 과시했고, 다른 일부는 사건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며 겉으로는 황제의 명을 따르는 듯했지만, 실상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요술 사건의 전개와 해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들은 바로 관료 집단이다.

 

 

“용의주도한 정보 은폐, 아주 조심스러운 자기 보호, 사적 관계들을 보호하기 위한 진상의 은닉, 일상 절차들에 대한 흔들림 없는 선호와 같은 뿌리 깊은 관행.” (p.369)

 


타성에 젖은 관료들은 이처럼 예측 가능한 절차들을 통해 일을 처리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비록 관료들이 황제의 명에 따라 힘없고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으로 죽였으나 더 이상의 광기가 확산하는 것을 막는 데는 기여했다.

 

또한 소수의 고위 관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올린 직언 덕분에 소탕 작전이 철회되기도 했다. 저자는 초기 청 제국에는 사회적 문화적 제도를 기반으로 이러한 진취적 기상을 가진 이들이 존재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찾아보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이렇듯 저자 필립 쿤은 관료제가 가진 그 안정성을 옹호하며, 그것이 사회가 광기에 물들 때 최소한의 안전망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관료제 시스템이 모든 사안이나 사건의 처리를 일상화 내지는 규범화시켜 사회의 안정적인 틀을 만들어내는 긍정적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관료제는 변혁적 면모나 혁신성은 없지만, 실제 사회에서 언제나 (최선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차선책으로 작용한다.

  

 

 

요술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것


  

요술 사건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사회가 광기에 사로잡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도자는, 관료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정치라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연민과 정의의 직물을 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릴 때, 우리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이 맨 먼저 고통을 받는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서문)

 


책을 읽으며, 이 구절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어느 사회든 위기를 겪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알다시피 이런 위기를 겪을 때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은 바로 상대적인 약자들이다. 요술 사건에서 이들은 외지인이나 부랑자들이었다. 우리 사회에도 위기가 닥쳐오면, 타인에 대한 공감과 감수성이 빛을 잃을 날이 올지 모른다(특히 코로나 위기 2년 동안 이런 경향은 매우 심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우리는 그것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지도자와 관료들에게 이러한 의식이 절실히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한국어판의 서문에서 쓴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맺자.


 

“한국의 독자들은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에 대한 재판 과정을 보면서 한국의 지난날, 선량한 사람들에게 반국가적인 위험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공포와 의심을 조장했던 지난날을 떠올릴 수도 있다.” (p.5)

 

 

우리 사회가 광기에 휩싸여 약자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역사가 그 거울의 역할을 다하길 소망한다.

 

 

[정주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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