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믿습니까? 믿습니다! [미술/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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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는 행복합니다. 저는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재능기부(volunteer) 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국에 왔습니다.
- 'BJ 체리 장 2018.9' 중
사진=유튜브 'BJ 체리 장 2018.9' 캡처
여기, 기괴한 분장과 요란스러운 옷차림으로 자신을 최초의 '일등 시민권자'이자 '국제평화기구 친선대사', '한민족 평화통일 홍보대사' 등 다양한 직함을 통해 소개하는 한 여인이 있다. 재능기부를 위해 한국에 오게 되었다는 그녀는 자신의 방송을 시청하는 이들을 '오빠'라고 지칭하며 자신처럼 '일등 시민권'을 발급받을 수 있는 비결을 전수한다. 출처 모를 정보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으며 특유의 언변으로 사람들을 순식간에 현혹시키는 그녀의 정체는 BJ '체리 장'이다.
BJ 체리 장은 누구인가
류성실 작가 / 사진=에르메스코리아 제공
체리 장은 지난 2021년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을 수상한 현대미술가 류성실이 탄생시킨 가상 인물이다.
온전한 진실보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대중을 선동하기 쉬운 자극적인 거짓 정보에 더욱 열광하게 된 사람들, 그리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집단주의적 편향과 불통은 다름 아닌 1인 미디어 시대의 폐해이다. 'BJ 체리 장' 시리즈는 이와 같은 1인 미디어 시대 속 마찰이 일으키는 불협화음을 향한 작가의 통찰을 섬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말투부터 표정, 그리고 제스처까지 체리 장의 모든 것은 디테일하게 연출되어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마치 체리 장이라는 인물이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체리 장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이질감이 느껴지면서도 B급스러운 콘텐츠 디자인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이유 모를 공포감을 일으키며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체리는 계획이 다 있구나!
사진=유튜브 'BJ 체리 장 2018.9' 캡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다 됩니다. Do your best!"
'일등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얻고 일등석 비행기를 타고 올 수 있었다는 체리 장. 한때 담뱃값도 못 벌었던 자신이 '일등 시민권'을 발급받아 부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전수해 주겠다고 한다. 일명 '부자 되는 3가지 필승 법칙'이다.
항상 웃고, 돕고 살며, EQ를 기르면 부자가 될 수 있다니. 겉보기엔 평범하고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이 법칙들 속에는 체리 장만의 특별한 논리가 숨어있다. 예컨대, 체리 장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우리 스스로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거지로 만들려는 경쟁상대의 '전파 공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이것을 이겨내고 이웃과 더불어 돕고 살아야 일등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유튜브 'BJ 체리 장 2018.9' 캡처
대체 전파 공격이 무엇이며, 그녀가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욕에 휘둘리고 남을 시기하며 살아온 것이 결코 우리 스스로의 탓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왠지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악마의 속삭임과 다를 바 없는 전파 공격에 속지 말고 더불어 돕고 살아야 일등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외치던 그녀는 이내 어려운 이웃을 돕자며 계좌번호를 슬쩍 공개한다.
사진=유튜브 'BJ 체리 장 2018.4' 캡처
어느 날은 갑자기 북한이 핵미사일이 약 6분 뒤 발사될 것이라며 국가 비상상황을 중계하는 방송을 켠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경고하는 듯한 타이머 소리, 예고 없이 울려 퍼지는 경고음은 어디론가 당장 대피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게 다 내가 지금 같은 순간을 예측하고자 연구한 자료에요. (예전엔)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미쳤다 그랬어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예언을 듣지 않은 벌이라고 주장하는 체리 장은 알 수 없는 자료들을 보여준다. 어느 날 꿈에서 나온 난수 번호를 해독한 뒤 풍수지리적 접근을 통해 핵미사일이 떨어질 곳을 분석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과 함께 출처를 알 수 없는 갖가지의 영상 자료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 때 즈음, 체리 장은 마지막 해법을 제시한다.
자, 여러분. 이제부터는 서울 시민이 아닌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 준비를 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시민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하늘에 미리 금은보화를 저축해놔야 해요. (...) 여러분들은 무능하기 때문에 하늘 아래 묶여있는 재산을 위로 올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대왕 오빠께서는 하늘로 여러분 재산을 올려주시거든. 여러분들이 아래 계좌로 돈을 저축하셔야만 천국에서 쓸 수 있어요.
- 'BJ 체리 장 2018.4' 중
체리 장의 연설은 누군가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한 약자를 향한다.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이들의 절박함을 이용해 이들을 구원해낼 유일한 존재로써 본인 스스로를 내세우고 있다. 돈 한 푼 제대로 벌기 어려웠지만 노력 끝에 일등석을 타고 여행하는 부자가 되었다는 스토리와 함께 누구나 자신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삶의 희망을 심는다. 이렇듯 마음의 평안을 안기는 달콤한 속삭임은 꽤나 중독적이다. 그래서일까. 동시다발적으로 샘솟듯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결국 때깔 좋은 거짓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진실을 등지고 더 큰 거짓을 추앙하며 확증 편향에 의해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현상을 야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정보를 공유하게 된 미디어 환경이 오히려 무분별한 정보 유통을 야기해 정보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1인 미디어 시대에 들어서면서 정보에 대한 정확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더욱 쉽게 선동되는 경향이 전반적으로 짙어졌으며, 특히나 정보 소외 계층이 그 영향을 크게 받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제법 그럴 싸하게 포장하는 체리 장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체리 장의 캐릭터가 이러한 1인 미디어 시대의 모순을 날 것의 형태 그대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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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 장은 2019년에 돌연 사망했다. 그녀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산 사람, 죽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1주기를 맞이하여 공개된 장례식 실황 영상에 달린 댓글들에 따르면 체리 장은 현재 살아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어쩌면 북한으로부터 쫓기지 않기 위해 신분을 바꿨거나 체리 장의 '지구 브라이트닝 솔루션'을 견제하던 환경 파괴 대기업에 의해 납치된 것일 수도 있다고.
한편 최근에는 체리 장이 살아생전 '대왕 오빠'라고 불르던 인물로 추정되는 '이대왕'과 함께 설립한 '대왕에어(구 대왕트래블)'가 정식 취항을 앞두고 시범 운항을 마쳤다. 지난 12월 9일에는 한 평생 직진만 해왔다는 체리 장의 '직진 정신'을 담아낸 대왕에어 취항 기념 앨범 '직진'이 발매되었다.
곳곳에 묻어나는 약간의 불쾌함과 4차원적인 감성이 매력적인 체리 장 시리즈. 엄청난 몰입감은 물론 이 센세이셔널한 작품이 불러일으킬 충격은 그 어떤 것을 상상하더라도 그것 이상일 테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 하루 체리 장과 함께 남부럽지 않은 일등 시민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정예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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