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눈길이니까 잠시 멈춤 – 대설주의보 연대기 [도서/문학]

최승호 시인과 윤대녕 작가의 ‘대설주의보’ 그리고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글 입력 2021.12.2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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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팔로 품는 게 나을 법한 짐을 들었을 찰나 뗀 걸음을 돌이키고 싶었다. 제법 눈송이가 굵어질 무렵 호기롭게 택시를 잡아탔다. 뻐적거린 흔적은 행선지를 말하는 내 목소리에 잠겼다. 이윽고 정체 구간에서 들려오는 기사님의 헛기침, 상황과 대조되는 달음박질의 음악, 끼어드는 상대를 향한 경적이 안전을 증명했다.

 

금일은 이것으로 장사를 마치신다는 기사님의 말씀에 길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차로 가면 에움길이지만 도보로는 직로이니 후자를 택하는 게 손님인 내게도 퍽 적합했다. 입김이 서린 안경에 눈이 내려앉아 녹았고 그 틈으로 시야를 확보할 즈음 빗방울만이 남아 비문증인 양 부유했을 때 다시 가다듬었다.

   

매번 지나가는 행로에서 눈이 덮였단 이유로 깊이를 짐작해보며 문득 꽤 많은 날 동안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려 애써왔음을 자각했다. 어김없이 울리는 구급차의 경적 가운데서 말이다. 느리게 동하는 게 답인가 싶다. 눈은 잠시 더디게 살아가라는 푯말이었을지도. 집에서 내려본 설경은 사뭇 반가웠으나 과연 내일도 그러할지는 대설주의보 직관 상황에 달려있다.

 

 


최승호 시인의 대설주의보


  

 

대설주의보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 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 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언제부터인가 첫눈이 주는 설렘보다 근심이 커졌는데 혹자는 이를 보고 나이를 곱절로 먹었다며 핀잔을 준다. 미온수가 언 손을 스치면 발갛게 제자리를 찾는 지엽 말단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쉽사리 환대할 수 없었다. 삼라만상을 얼싸안다가도 대척의 대상으로 남는 눈에 가닿는 심사는 빙판을 마주한 발걸음의 미련이기도 하다.

 

‘대설주의보(최승호, 1982)’는 필자를 얼어붙게 했다. 액면 그대로 자연의 고압적인 성질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다 해도 끝내 순순히 항복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1980년대 군부독재를 배경으로 한 해당 작품을 읽으며 당시의 시대정신을 헤아릴 순간보다 자연의 시간이 먼저 도착했다.

   

백색소음에 동화될 때 정작 소리는 사라지고 자신과 의식만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오판이 아니다. 이는 영에서 무한대까지의 주파수 성분이 같은 세기로 골고루 다 분포되어 있는 잡음으로서 출력이 무한대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거슬리는 소음을 덮어주는 백색소음처럼 설원은 고립의 하명을 내려 잠시 멈추게 한다. 지나온 길을 돌아볼 수밖에 없도록 한다. 지워진 발자국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전에.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사평역(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내리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이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밤눈이 깊다. 칠흑의 밤이 전등 아래 눈꽃을 피워낸다. ‘사평역에서(곽재구, 1983)’는 흑백을 가를 필요가 없다. 관조하는 화자가 눈물로써 같은 곳을 점유하는 타자에 감응했기 때문이다. 풍경은 정서를 환기한다. 눈에 얽힌 각자의 사연은 다르지만 하강하는 눈을 봄으로써 무엇을 떠올리는 자신과 타인을 발견할 수 있다. 시심은 그렇게 피어난다.

 

가히 낭만실조의 작금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작 소설은 등장하고 이롭다 평가될 문물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어 차마 감상과 이상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전염병으로 무원삼매(無願三昧: 일체를 바라거나 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경지)의 심정은 인지상정이라 고통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의 인물들처럼 그저 거리를 두고 있다. 제설제에도 미처 다 녹지 않은 눈은 도로가 귀퉁이에 즐비하다. 눈물로 질퍽거리는 심상처럼 말이다.

   

결코 경험하지 않을 법한 서사도 눈을 통해 실현된다. 사평역은 가상의 공간이지만 겨울밤 대합실은 실재한다. 교차로는 끝과 시작을 자각하게 하듯이 누군가의 종착지이며 동시에 출발지가 될 역내는 불특정다수의 과거가 곧 자신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작품의 창작 연대는 전술한 ‘대설주의보(최승호, 1982)’와 궤를 같이한다. 역사적 사건을 차치하더라도 눈에 개인의 감정을 머금는 실사는 나와 모두의 것이다.

 

 


윤대녕 작가의 대설주의보


 

 

“괜찮소. 16킬로미터를 왔는데, 6.3킬로미터를 왜 못 가겠소. 데려다줘서 고맙소.”

갤로퍼는 유턴을 한 다음 곧 눈발 속으로 사라졌다. 윤수는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눌러쓰고 주차장을 모로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산문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갈수록 바람이 잦아들어 그다지 추운 느낌은 없었다. 길은 완만했으나 정강이까지 눈이 차올라 걸음이 더뎠다. 손전등을 빌려오지 않았더라면 사위조차 분간하기 어려웠으리라. 윤수는 혜란과 백담사로 처음 소풍 왔던 날을 아득히 떠올리고 있었다. 돌아보니 그새 12년 전의 일이었다.

어디까지 왔을까.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위에서 윤수는 발을 멈추고 캄캄한 눈 속을 노려보았다. 어디쯤일까. 멀리 솜뭉치 같은 부연 빛이 윤수의 눈에 빨려들어왔다. 벌써 백담사 가까이 온 것은 아닐 텐데. 실눈을 뜨고 재차 노려보니 그 빛은 이쪽을 향해 느리게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전조등 불빛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차가 다가올 때까지 윤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눈을 잔뜩 뒤집어쓴 알브이 차량이 체인을 쩔렁대며 그의 앞에 다가와 커다란 짐승처럼 멈춰 섰다. 『대설주의보(윤대녕, 2010)』, 문학동네, 125면(교보eBook 기준).

 

 

애써 시련을 고수하는 이들이 있다. 의지가 없다면 불능한 것 중에 악천후의 등산만이 있으랴. ‘대설주의보(윤대녕, 2010)’에서 윤수와 혜란은 해후와 이별을 반복한다.

 

그들의 위태로운 사랑을 품기엔 필자의 식견이 얕아 책장을 겨우 붙잡았지만 반쪽짜리 통섭은 가능할 것 같았다. 윤수가 눈을 헤치며 나아가고자 했던 길은 어쩌면 혜란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소설가인 그가 그녀와의 서사를 자신의 미완작 중 하나로 여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설악산(雪嶽山)의 사계절이 있듯 그들이 목도한 눈꽃도 영원하지 않다. 생성과 소멸은 눈에 투영되어 진정 서글프다. 어제와 오늘의 겨울은 같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수의 시종여일함은 폭설을 멈추게 할 순 없어도 그 자신을 초인으로 곡해하게 하여 천변을 경시하게 했다.

 

흰 눈으로 과거를 지워낼 수 없지만 대소사를 구별할 수 있다. 무엇을 가장 중시하는지 알게 한다. 그의 동태를 확인할 여분의 시간이 주어진 것 마냥 눈이 흐르기 때문이다.

 

*


보름에서 하현으로 넘어가고 있다. 차면 기우는 달처럼 대설은 양가적이다. 오랜만인 대설주의보에 들썩거리는 심보와 안온을 찾아 헤매는 수족이 공존했다. 다칠까 조심스레 내딛는 걸음걸이를 보며 설경도 한때라는 상념에 보폭을 크게 넓혔다. 빠르고 힘차게 걸어보았다. 일순간 주춤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잠시의 찰나까지 시간의 결정체를 녹여보면 언제나 눈은 현재만을 간직하게 한다. 훗날을 기약하는 자신을 적발시키며 말이다.

 

 

 

윤하정.jpg

 

 

[윤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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