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야기'라는 신에 대하여 - 포르투갈의 높은 산

글 입력 2021.12.1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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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마텔의 장편 소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1904년 리스본에서 가족을 잃은 상실감에 젖은 토마스가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에게 세례를 주는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그가 만든 기독교 역사를 바꿀 만한 십자고상을 찾아 자동차를 타고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는 1부, 1939년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인근 브라간사에 사는 병리학자 에우제비우가 새해를 맞이하던 날 밤, 사무실에서 아내와 종교와 추리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 노부인의 부탁으로 그녀의 남편을 부검하게 되는 2부, 1980년대를 배경으로,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젖은 캐나다 상원의원 피터가 침팬지 ‘오도’에게 매료돼 거금을 들여 그를 구매하고, 그와 함께 고향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여생을 보내다 침팬지 형상의 십자고상을 보게 되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904년과 1939년, 1980년대로 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를 초월하는 긴밀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아내에 대한 상실이다. 인간과 신이 가장 크게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소멸’이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명제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의 화살이 나와 사랑하는 이를 비껴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슬픈 사실은 의사들이 뭐라고 하든 자연사는 없다는 점이에요. 모든 죽음은 살해로, 사랑하는 이를 부당하게 빼앗긴 것으로 느껴지죠.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의 살해를 맞닥뜨리죠. 바로 자신의 죽음 말이에요. 그게 우리의 운명이에요. 우리 모두는 자신이 피해자인 살해 미스터리에서 살아요.

 

- P.198

 

 

에우제비우의 아내 마리아의 말에서 ‘사랑하는 이를 빼앗긴 것으로’ 느끼는 이는 신에 대한 반발로 뒤로 걸으며 기독교학을 뒤집을 만한 십자고상을 찾아 헤맨 1부의 토마스를 연상케 한다. 토마스가 가장 극적인 행동을 취하긴 했지만, 사실 아내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세 주인공 모두 마찬가지다.

 

2부에서 에우제비우는 사무실에서 아내와 긴 대화를 나눴지만, 말미에는 그 실체가 일찍이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죽은 아내의 환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3부의 주인공 피터 역시 아내의 죽음으로 깊은 상실감에 빠지고, 아내 이외에 처음으로 자신과 진심으로 교감하고 있다고 믿는 침팬지 오도에게 매료된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후세계는 존재하고, 그 세계에서 우리는 신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 신도에게 죽음은 축복이 아닐까. 살아있는 동안 신실하게 신앙심을 유지했다면 분명 천국에 갈 것이고, 그곳에서 자신이 그토록 숭배하던 신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위와 같은 말이 얼마나 편협한 말인지 안다. 천국과 지옥, 축복과 저주 몇 개의 단어로 정의될 만큼 우리에게 죽음은 그렇게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인간은 절대로 사후세계를 체험할 수 없고 죽은 자와 대화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후세계를 상상하더라도 살아있는 한, 우리는 사랑하는 이가 사라진 이 세상을 묵묵히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린 이렇게 두렵고 괴롭고 무력한 것이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현세와 내세, 신과 인간,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인 구분에서 벗어나 현실 세상에 땅을 딛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을 다룬다.

 

토마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단숨에 앗아간 신을 향한 원망을 품고 그의 존재를 부정할 만한 십자고상을 찾아 험난한 여정을 떠나지만, 그 난관 끝에 찾게 된 십자고상 앞에서 토마스는 허무함과 서러움을 잔뜩 안고 통곡하기만 한다. 그 직전에 한 아이가 사고로 그의 자동차에 부딪혀 사망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사랑하는 이를 데려간 신을 원망했지만, 그가 겪은 진실은 죽음은 아이의 호기심 하나에 좌우될 만큼 허무하게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에우제비우의 아내 마리아는 아가사 크리스티를 신과 동격으로 보면서 성경을 추리소설에 빗댄다. 오랜 시간을 지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던 애거서 크리스티가 드디어 소설로써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파격적인 대화 이후 토마스에 의해 죽은 아이의 엄마 마리아는 2부에서 다시 등장해 사흘 전 죽은 남편의 부검을 의뢰한다. 에우제비우는 시신을 부검하며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는데, 부검이 막바지에 이르자 의뢰인 아내가 알몸의 상태로 남편의 시신에 눕는다.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는 믿음을 뒤로한 채 남편의 몸을 자신의 집으로 삼는다.

 

아내의 죽음으로 깊은 상실감을 느끼는 피터는 침팬지 오도에게 진심 어린 교감을 느끼고 그와 함께하고, 여생을 마무리하러 떠난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침팬지의 모습을 한 십자고상을 마주한다. 침팬지를 애완동물의 범주에 두지 않고 삶의 동반자로 삼는 피터의 모습은 언제나 종교계의 뜨거운 감자였던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논쟁에서 자유롭게 벗어난 태도처럼 느껴진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신도, 망자도 아닌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 어떤 절대적인 진리도 평범한 인간의 상실감을 메워줄 수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종교적인 진리가 아닌 스스로 정립해나가는 믿음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얀 마텔의 대표작 <파이 이야기>가 자주 떠올랐다.

 

이야기의 구조는 아주 단순했다. 동물원을 운영하는 파이네 가족은 이민을 결심한다. 동물들을 배에 싣고 긴 여정을 떠난 그들은 뜻밖의 폭풍우를 만나고, 소년 파이만이 몇 마리의 동물들과 구명보트에 살아남게 된다.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동물들 간의 먹고 먹히는 살육이 일어나고, 소년 파이는 최후로 살아남은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바다 위에서 긴 시간을 표류하게 된다.

 

과연 누가 처음부터 끝까지 뱅골 호랑이와 바다 위에서 표류하기만 하는 이야기를 만들까. 그리고 대체 어느 누가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장대한 모험과 함께한 끝에 마주한 예상치 못한 결말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믿습니까?’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폭풍우로 배가 침몰하기 전, 파이가 여러 가지 종교를 복합적으로 믿었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파이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작가 역시 그 부분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놀란다. 당연한 반응이다. 종교를 이루는 건 유일신을 향한 믿음일 텐데 여러 종교를 한 번에 수용하다니. 파이는 그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그러니까 파이에게 믿음은 처음부터 단일한 진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조립하고 창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파이가 겪은 허무맹랑한 표류기를 받아들이는 문제 역시 ‘무엇이 진실이냐’보다 ‘무엇을 믿고 싶으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끝까지 제시되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시험 문제를 찾듯 창작자의 의도를 찾는 건 무의미한 짓이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읽은 지금은 그가 믿는 신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신은 바로 ‘이야기’다.

   

 

왜 역사를 창조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하는 쪽을 선택했을까요? (중략) 그것은 다시 한번 예수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야기가 혼례식이라면, 우리 듣는 이들은 통로를 걸어 들어오는 신부를 지켜보는 신랑이죠. 상상의 완성이라는 행위 안에서 함께 어우러져 이야기가 탄생하는 거예요. 여느 결혼이 그렇듯, 또 결혼이 제각기 다르듯 이 행위는 우리와 관련되고, 그래서 각자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느끼죠.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듯 이야기는 우리 개개인에게 찾아와요.

 

- P.187

 

 

마리아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신에 비유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또 다른 창작자, 얀 마텔 역시 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역시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향유하는 우리에게 감동과 깨달음이라는 은혜를 베풀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게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나오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를 믿는 신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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