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상실의 앞에서 우린 – 포르투갈의 높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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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얀 마텔의 장편소설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지독한 슬픔을 겪는 세 남자의 상실과 이후 그들의 행보를 그린 책이다. 장편인 만큼 단출한 이슈들의 집합보다는 종교, 철학, 세계관 등 조금 무거운 문제들을 한데 모아 문학으로 녹여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그려진다.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세 명의 남자는 침팬지, 여행, 죽음, 포르투갈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들은 상실감을 없애기 위해 각자만의 여정을 시작한다. 제각각의 이유로 비슷한 상실감을 느끼는 이들은 과연 여정을 통해 정답을 찾았을까.
세 명의 남자, 세 개의 상실감
1부는 토마스의 이야기다. 그는 일주일 만에 사랑하는 연인과 아들,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그는 가혹한 운명을 선사한 신에게 반발하기 위해 어느 순간부터 뒤로 걷기 시작한다. 어느 날, 학예사인 그는 고문서에서 십자고상에 대한 기록을 발견한다. 그 기록은 율리시스 신부에 의해 남겨진 것이었고, 토마스는 그의 일기에 광적일 정도로 집착을 하기 시작한다. 필사하고, 수시로 꺼내 읽는 등 신부의 일기가 마치 혼자 남겨진 자신의 이정표라도 되는 듯 소중히 여기더니, 결국 일기를 빼곡히 채운 ‘집’에 사로잡히고 만다. 집을 잃은 그는 집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자신에게 비극을 내린 신에게 복수를 선사할 방법은 십자고상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가겠다고.
그가 뒤로 걷는 것이,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뒤로 걷는 것이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반발하면서 걷는다. 인생에서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긴 마당에, 반발 말고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22p
2부에서는 부검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그의 아내인 마리아가 종교와 죽음, 복음서와 소설을 설명하면서 문을 연다. 무거운 주제의 초점이 종교에 맞춰져 있다 보니 이에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조금 버겁게 느껴질 듯하다. 그러나 그녀의 심도 있는 이야기를 집중해서 여러 번 읽다 보면 그녀가 말하는 ‘이야기’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기도 한다. 얼마 뒤, 에우제비우의 사무실에 마리아는 다시 방문한다. 이날의 마리아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 그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 부검을 요청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그녀의 요청은 어딘가 좀 이상했다. 남편이 왜 죽었는지가 아니라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려달라는 것, 이것이 그녀의 요청이다. 이에 승낙한 에우제비우는 부검을 시작한다.
사람이 어떻게 일상적인 생활에서 영원한 개념을 실현할 수 있겠어요? 합리적인 게 한결 더 수월하죠. 이성은 현실적이고, 보상은 빠르고 그 작용은 명확해요. 하지만 슬프게도 이성은 맹목적이지요. 이성은 그 자체로는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지 못해요. 역경을 앞두고는 특히 그렇죠. -200p
3부는 상원의원인 피터가 아내와 사별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를 둘러싼 주변 가족들, 그의 전부였던 사람들은 현재 저마다의 이유로 자신의 곁을 떠났다. 물리적인 힘을 비롯한 마음의 관계까지. 그는 유인원 연구소에서 한 침팬지에게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고, 거액을 주면서까지 침팬지를 사들인다. 모두가 떠나 혼자 남겨진 그의 곁에는 어느덧 침팬지 한 마리가 자리하기 시작한다. 그는 침팬지인 오도와 지내면서 인간과 반대되는 순수함에 매료되었고, 자연스레 오도는 피터의 삶을 차지해버린다. 그렇게 그는 잃어버린 집을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오도는 그의 삶을 차지해버렸다. 피터는 침팬지의 기품에 감동 받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랑이다. -366p
상실의 앞에서 우린
셋은 모두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냈고, 상실감에 사무쳐 각자만의 방법으로 회생한다. 아니, 회생한 걸까. 모든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문을 닫았다. 그 누구에게도 상실감을 이겨낸 천사표 해피 엔딩 따위는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가 다소 무거웠던 2부보다는 1부, 3부에 좀 더 흥미를 느꼈다. 실제로 더 잘 읽히기도 했다. 그중 하나를 다시 꼽자면 토마스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는 미칠듯한 상실감과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 무모한 도전을 했고, 험난한 여정 끝에는 절망만이 남았다. 그가 끝없이 찾아 헤맨 신의 존재가 한낱 유인원에 불과했다는 사실, 신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에 주저앉은 그를 보며 인간은 결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음이 선명히 보였다.
과연 그는 정말 십자고상이 자신에게 큰 변화를 주리라 생각했던 걸까?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가면 마법 같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 믿었던 걸까? 목표를 달성하면 정말 신에게 복수할 수 있을 줄 알았나? 아무런 힘 없는 인간이 이미 지나버린 현실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걸까? 커다란 상실감이 판단력을 흐리게 한 건 아닐까?
정말 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후반으로 갈수록 그의 터무니없는 행동에 점점 효율성을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뻔히 답이 보이는 문제를 힘들게 빙빙 돌아가는 모습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터가 침팬지를 사들이면서 그의 선택에 관해 설명하는 한 구절을 본 순간 물음표가 하나둘 사라졌다.
커다란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긴요한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최소한 1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지 않던가? 크나큰 슬픔이 그의 지각력을 앗아 간 걸까? -288p
나는 사랑하는 이를 모조리 떠나보낸 상실감을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됐다. 토마스와 에우제비우, 피터의 상실감은 이러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었다. 비극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해지는 동시에 한없이 강해진다. 그들의 행동은 상실의 끝자락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실제로 높은 산이 아니라고 한다. 구원을 바라고 올라간 곳에는 황무지만 있을 뿐이다. 그곳은 유토피아도, 높은 산도 아니라 그들이 바라볼 현실에 불과하다. 슬픔은 그들을 높은 산으로 이끌었지만, 높은 산은 그들에게 구원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상실감에 맞서 행동을 취해야만 했고, 이를 없애기 위해 ‘집’을 향한 여정을 보냈다.
과연 인간은 상실의 끝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을까. 무엇을 해야만 하는 걸까. 우리는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상실의 앞에 선 순간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지은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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