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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버킷 리스트 말고 투두 리스트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부터

by 장미 에디터
2021.12.0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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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시작점, 나는 수능을 망쳐서 재수를 하게 되었다.

 

예정된 재수가 아니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기에 스무 살에는 불안이 얼룩처럼 묻었다. 남들보다 늦게 출발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게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모두 정해진 것처럼 스물이 되면 미성년자에서 성년으로,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레벨업하는데 나만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붕 떠있는 것만 같았다.

 

친구도 같이 재수를 했지만 둘의 상황이 다르다보니 혼자만의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남들은 이미 끝낸 일에 1년을 더 쓴다는 게 왠지 미래의 내가 쓸 시간을 미리 대출받아 쓰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어디선가 어떻게든 대가를 치러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재수가 끝난 후 삼수를 제안한 친척에게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이 없었다.


대학 4학년을 앞두고 휴학을 했다. 이대로 졸업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그랬다. 쉬는 동안 자격증이나 어학 성적, 대외활동 등 계획은 많이 세웠는데 제대로 해낸 건 거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졸업할 때쯤 취업시장이 학생 신분을 유지한 상태의 구직자를 선호해서 선배들이 졸업을 유예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선배들은 그랬지만, 친구들은 그렇지 않아서 나는 그냥 졸업했다. 졸업하고도 한동안 자리를 못 찾고 헤매고 다닐 줄 알았다면 유예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막학기부터 스트레스가 빚어낸 피부염과 동네 병원의 오진으로 한동안 고생하다가 소견서를 들고 상급병원으로 향했다. 그래서 나는 졸업하고 10개월의 공백을 만든 뒤에 조급하고 초조하게 첫 취직을 했다.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다.


첫 직장에서 나오고 신입과 중고신입의 애매한 상태로 구직활동을 이어나갔다. 구직활동은 생각보다 길어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뭘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시간을 여기저기 버리고 다녔다. 생산적인 활동은 별로 없었고 취직하기 위해 토익을 보거나 뭐했거나 아주아주 기본적인 것만 했다. 그때의 나는 불안하다기보다 살면서 이렇게 쉬는 날이 언제 또 오겠냐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공백기는 야금야금 길어졌고 면접에서 공백기 얘기가 나오면 그동안 취준을 했는데 잘 안되었다고 대답했다. 반은 사실이었다. 입사 지원을 하면서도 ‘이정도면 오라고 해도 내가 거절할 수도 있지’라고 호기로운 태도가 서류탈락이란 결과를 빚어내기도 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하나하나씩 모여서 남들이 승진할 때 나 홀로 중고신입에 머물러있었다. 남들이 경력을 쌓을 때 조각난 이력을 들고 새로운 자리를 찾아다녔다.

 

*

 

시간에 중점을 두고 보면 그렇다. 시선을 옮기면 다른 생각이 치고 올라온다. 나는 스무 살 이후의 삶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을 배우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삶에서 어느 곳에 비중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스쳐지나가기만 했던 장소,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 생각, 독서가 아니라 쇼핑이 되어버린 책. 그리고 집 구석구석 쌓여있는 재료가 될 수 있는 것들.


생각해보면 몸을 몇 시간만 움직였더라도 놓치지 않았을 전시가 열 손가락을 넘어갈지 모른다. 확진자가 급증해서 외출을 자제해야 할 시기가 되니까 시간이 있었을 때 향유하지 못했던 것들이 더 아쉽게 느껴진다. 내 문제가 아니라서 언제까지 미뤄둬야 할지 기약이 없으니 조금 허탈한 기분도 든다.


그래서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려고 한다. 미루고 미뤄서 12월까지 넘어온 건강검진을 해치우고 날이 추우니까 실을 꺼내서 다시 위빙을 하든 코바늘을 찾아내든 손을 움직이는 거다. 그게 재미 없다 싶으면 수틀에 완성되지 못하고 멈춰있는 자수를 하면 되고, 냉동실에 몇 달째 꽁꽁 얼어있는 타피오카를 녹이고 사둔지 오래된 찻잎을 꺼내 버블티를 만들어 먹어도 좋고, 좋아하는 톰얌쿵을 재료 사다가 처음부터 만들어 먹는 것도 해볼만한 일이다.


한동안은 버킷리스트 말고 체크리스트를 마음에 두고 다니려고 한다. 할 만한 일부터, 만만한 것부터, 하지 않고 지나쳤던 것들부터.


화원을 지나치지 않았더니 방 안에 스토크 향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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