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문제적 인간, '폴 버호벤' - 베네데타

밀폐된 공간에서 금지된 욕구에 전율하는, 어느 아웃사이더의 육체를 은밀하게 응시하는 카메라
글 입력 2021.12.08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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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르톨로메아의 증언은 필경사가 받아 적기에 매우 곤란한 문제였고, 이 때문에 그는 일상적인 평상심을 잃었다. 이제까지 간결하고 규칙적이던 그의 필체는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변했고, 심지어 그는 몇 몇 단어와 일부 구절에 줄을 긋고 삭제한 후 새로 쓰기까지 했다. 바르톨로메아의 이야기를 들은 관리들에게는, 그녀가 묘사한 그와 같은 유형의 행위들을 구체화할 수 있는 지적 혹은 상상의 어법이 부족했다."

 

- 수녀원 스캔들, p.203

 

  

굵직한 발자취를 남기며 영화사를 수놓은 일련의 비타협주의자들이 존재했다.


난해한 주제의식과 상식 밖의 표현방식들 덕분에 대중과 이들 사이의 거리는 좁히기 어려운 간격을 늘 유지해왔다. 절대 다수가 아닌, 자신이 상정한 진실을 수긍할 수 있는 소수의 누군가를 위해서 그들은 오늘도 제작 현장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장터의 예술이라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관객 없는 영화는 상상할 수 없다. 관객에게 인정 받지 못한 작품의 감독들은 산업 내 생존을 기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스크린으로 표출시키는 그들의 투사정신을 기리고자 사람들은 작가라는 타이틀을 건넨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오늘의 주인공, <베네테다>를 연출한 '폴 버호벤'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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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문제적 인간, '폴 버호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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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love seeing violence and horrible things. The human being is bad and can't stand more than five minutes of happiness. Put him in a dark theater and ask him to look at two hours of happiness, and he'd walk out or fall asleep"


- 폴 버호벤, Showgirls: Portrait of a Film

 


과거 '샘 페킨파'가 살떨리는 폭력 묘사로 영화계의 007이라는 이명을 얻었다면, '폴 버호벤'에게는 여지없이 욕망 면허를 안겨줘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그 방면에 도가 튼 남자다.

 

올해로 활동 50주년을 맞은 네덜란드 출신의 노장은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학력과 대조적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욕망의 메커니즘의 대대로 카메라 포커스를 맞췄다. 유럽에서 한창 악명을 떨치며 할리우드의 호출을 받은 그의 첫 미국 영화 <아그네스의 피>만 하더라도 날 것의 욕망으로 들끓던 중세 사회를 배경으로 피와 살점들이 시종 흩날리는 잔혹무도한 풍광들이 러닝타임을 꽉 채웠다. 오늘날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여과 없는 표현 스타일이 고스란히 투영된 미국 데뷔작은 시원하게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명성을 지탱해준 주요한 영화 3편(로보캅-토탈 리콜-원초적 본능)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 석자를 끈적하게 각인시켰다. 물론, 성역 따윈 무시하는 그만의 노골적인 표현 기법은 주류 시스템 안에서도 여전히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꿋꿋이 고수해온 특유의 B급 테이스트가 한껏 반영된 노골적인 폭력 묘사는 그 자체로 관객의 등골을 섬짓하게 만드는 이미지들을 통해서 자비없이 농락 당하는 인물들의 육체를 조망한다. 24시간 욕구 불만인 인물들의 나신裸身은 카메라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욕망에 철저히 지배된 상태에서 인물들은 조금의 수치심도 없이 주체 못할 자신의 욕구를 어떤 식으로든 충족시키기에 이른다. 살색의 이미지들로 가득한 감독의 속된 쇼트들은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혼란스런 와중에도 끝까지 훔쳐보고 싶게 만드는 마력을 발휘하며 관객의 윤리성을 대놓고 실험한다. 이같은 급진적 태도는 비단 폭력과 섹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미래 사회와 대조적인 군국주의 시스템을 등장시킴으로써 파시즘을 가열차게 조롱하는 통렬한 비판정신은 직설적인 표현 방식과 시너지를 이루며 감독의 성역없는 태도를 부각시킨다(토탈 리콜/스타십 트루퍼스). 더불어, 남녀의 구별이 전무한 영화 속 공간 활용은 감독 특유의 진보적 사고가 적극 투영된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다(로보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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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그네스의 피>, 1985년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그의 진보적 사고 방식은 특이하게도 자신이 구현한 주인공의 행보와 맥을 같이한다. 피와 정액이 끈끈하게 뒤섞인 그의 작품세계는 언제나 사회 언저리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아웃사이더들이 중심을 차지한다. 이들은 저마다의 육체적 혹은 성격적 특징들을 기반으로 자신이 속한 무리 내에서 군계일학에 가까운 성과들을 성취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때문에 메인 스트림에 속하지 못한다. 특유의 독단적 성격은 주변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의 운명을 자초하며(원초적 본능/쇼걸/할로우 맨), 인간 중심의 공동체에서는 쉽게 적응하기 어려운 신체적 특징 혹은 결함은 뛰어난 스펙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사회 언저리로 내몬다(로보캅/할로우 맨). 사회 중심부의 외면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처지는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로부터 너무나도 앞선 관계로 발생한다. 이는 공동체에서 지정한 금기를 넘어선채 자신들이 갈구해온 바를 이행하는데 주저 없을 뿐더러, 그에 따른 수치를 충분히 감내하고도 남는 위닝 멘탈리티를 형성한다(아그네스의 피/엘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주저없이 솔직하게 담아내는 감독의 응큼한 시선은 스크린이 선사할 수 있는 충격을 선사했지만, 이는 파격적인 이미지를 통해 관객을 놀래키는 단순한 메커니즘에 기인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그의 커리어 가운데 가장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쇼걸>만 하더라도 한 여인의 적나라한 몸짓으로 도배된 이미지들은 댄서로 성공하기 위한 그녀의 거침없는 야욕과 라스베가스라는 배경의 상징성이 시시각각 조응을 이루며 순간의 자극을 위해 탄생된 쇼트들이 아니라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텐트폴 영화에서는 쉽게 마주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이미지들의 향연 속에서서도 감독은 인물이 욕망을 발화하는 과정들을 능수능란하게 조율하며 보는 이의 호흡을 쥐락펴락한다. 그 과정에서 (특히 여성이 주인공인)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 앞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이를 시인함으로써 자신의 본능을 적극 포용하는 주체적 면모를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뭘 좀 아는 변태 감독의 문제적 스타일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밀폐된 공간에서 금지된 욕구에 전율하는, 어느 아웃사이더의 육체를 은밀하게 응시하는 카메라 "

 

 

 

금기를 탐한 아웃사이더


 

 

"쓰디쓴 고난의 여행을 통해 과거에 알려진 다양한 인간의 죄로 스스로를 이끌었던 단테는, 지옥에서도 그리고 연옥에서도 여성 *소도미티를 포함하지 않는다."


*오늘날 동성애를 지칭하는 호모섹슈얼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이전까지는 유럽 사회에 등장하지 않았다. 서양 중세나 르네상스 기에는 이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소도미타sodomita, 복수형으로는 소도미티sodomiti라 불렀다.

 

- 수녀원 스캔들, p.29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신앙심을 지녔던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신을 향한 맹목적 믿음과 사랑을 유지 중인 수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예수의 환영을 그녀가 목격했다는 소식이 수녀원을 넘어 마을 전체에 퍼지면서 마을 주민들은 그녀를 성녀로 추앙하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한편,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수녀원으로 새롭게 귀의한 '바르톨로메아'(다프네 파타키아)는 특유의 짖궃은 성격을 기반으로 도발적인 시선과 손길을 견지한 채 베네데타의 육체를 은밀하게 농락한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감흥에 서서히 도취된 베네데타는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달리, 서서히 중독되어가는 육체에 의해 조금씩 내면의 욕망과 마주한다. 그렇게 그녀가 목격했다는 환영의 진위 여부를 파헤치기 위한 공방전이 촉발될때 즈음 평생의 우선순위였던 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그녀의 욕망 앞에서 영원한 1순위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영화를 둘러싼 파장은 성스런 공간에서 수많은 금기 중에서도 터부시되었던 욕망을 추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다. 신의 환영을 목도했다는 명성을 기반으로 베네데타는 당시 30세에 수녀원장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그녀가 겪은 무아경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한 조사단이 두 차례 파견될 때 즈음, 당시 사회를 뒤흔들만큼 충격적인 추문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그녀를 둘러싼 공방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의 권위가 막강했던 중세 사회에서 발생한 동성애적 행위는 그 자체로 경종을 울리기 충분했다. 더불어, 아직 호모섹슈얼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 당시에 남성이 아닌 여성이 주체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환영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신성 모독이라는 미명 하에 사형과 즉결될 만큼 치명적인 사안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당시 주류 사회가 용납하기 어려운 욕망을 추구했던 주인공, 베네데타의 사회적 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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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폴 버호벤 감독의 주인공이라면 응당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외톨이 포지션을 베네데타 또한 선점하고 있다. 이는, 그녀의 출신성분에서부터 먼저 짐작할 수 있다. 베네데타의 행적이 기록된 원작(수녀원 스캔들, 주디스 브라운 著)에 따르면 당시 이탈리아 사회는 산지 출신 주민들을 향한 평지 출신들의 경계심이 암암리에 존재했으며 그에 따른 차별이 미묘하게 자행되었음을 명시한다. 산지 출신의 영주의 딸이었던 베네데타 역시 그러한 시선으로부터 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애초부터 평지 사회권에 속한 페샤 내에서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다. 그런 의미에서, 파국을 피해서 바르톨로메아와 함께 산속으로 피신한 그녀가 다시금 페샤라는 평지로 내려가는 영화의 엔딩은 비주류에서 주류로 편입되었으나 다시금 비주류로 회귀한 그녀의 파란만장한 처지를 은유한다. 태생과 더불어 베네데타를 비주류로 이끌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모순되게도 그녀의 뛰어난 학구적 면모에 있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맹률이 컸던 당시 몇 안되게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그녀의 능력은 30세에 수녀원장에 오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였다고 원작에 기록되있으며, 영화 속에서는 수녀원의 주요 생업이었던 베틀 짜는 일에서 벗어나 장부 기록과 같은 사무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얼핏 이름 그대로 '축복 받은' 그녀의 뛰어난 학습 능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목격한 모든 환영들이 이전에 읽었던 성경 내용을 토대한 사적인 꿈에 불과했다는 음모론을 지탱하는 근거로 작용된다.

 

베네데타의 은밀한 욕망을 부추긴 주범이자 사이드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바르톨로메아' 역시 처지는 비슷하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을 주입받은 다른 수녀들과 달리 여러차례 세상의 쓴 맛을 경험한 그녀는 종교인으로서 금해야 하는 스스로의 욕구에 누구보다 솔직하게 행동한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수녀 사회 내에서 유달리 튀는 그녀의 행동은 얼핏 오랜기간 구축되었던 수녀원의 질서를 뒤흔들만큼 예측불허한 생기가 내재되있다. 어디까지나 장난에 불과했을 그녀의 짖궃은 시선과 손짓은 자신을 거둬준 사수의 내면에 작은 불씨를 뜻하지않게 지피는 나비효과로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명약관화해진다. 물론, 베네데타보다도 출신 성분으로나 사회적 위치로서나 주류에 편입되기 힘든 한 인물이 금단을 넘어선 설정은 영화에 내포된 불순한 기운을 유발하는 근원으로 자리매김한다. 감독의 성역 없는 태도를 몸소 체현해내는 바르톨로메아의 몸짓은 이를 여과 없이 담아낸 카메라를 통해서 작품 전체를 휘감는 관능적 바이브를 한껏 고취시키는데 일조한다. 그 과정에서, 자극적인 이미지로 일관하는 작금의 작품들과 차원이 다른 영화의 충격은 금기를 넘어서는 두 여인의 행보를 은밀하게 염탐하는 응큼한 시선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제3자라는 우월한 위치에서 이 모든 광경을 관람하던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영화가 펼치는 진실게임에 참여자들 중 하나로 전락당한다.

 

영화 <베네데타>의 영악함은 바로 이에 기인한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엄밀히 말해서 영화 <베네데타>는 이미지 자체를 놓고 봤을 때 의외로 자극적인 지점들이 전무하다.

 

오늘날 여러 미디어 매체들을 통해 노출된 여러 자극적인 이미지들과 비교해보면 차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혹은 그저 순간의 주목을 위해 비윤리적인 시선과 표현을 탑재한 이미지들의 출몰로 사람들의 말초신경은 이미 헤질대로 헤졌다. 이러한 작금의 행태들을 감안했을 때 레즈비언 수녀가 다른 수녀와 관계를 맺는다는 설정 자체의 파격과 대조적으로 감독의 악명에 걸맞지 않게 쇼트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수준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 <베네데타>는 보고 나면 정신이 얼얼해지는 충격과 함께 끊임없는 혼란으로부터 관객들을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폴 버호벤의 걸출한 역량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여기서 빛을 발휘하는 대목은 감독의 영악한 시점 활용이다. 이와 관련해서, 2017년에 개봉한 영화 <엘르>의 인트로가 좋은 본보기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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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르>, 2017년

 

 

화면이 제대로 켜지기도 전에 울려퍼지는 무자비한 소음이 관객의 귓가를 때리면서 영화는 시작부터 불길한 기운을 증폭시킨다. 화면이 켜지는 순간 관객은 무기력하게 쓰러진 한 여인과 그녀를 겁탈하는 괴한을 마주한다. 주체와 객체 뿐인 밀폐된 공간과 프레임에 담겨진 피사체의 동선,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부동자세로 일관한 채 담아낸 카메라 구도의 조합은 흡사 봐서는 안되는 행위를 몰래 염탐하는 뉘앙스를 은연 중에 자아낸다. 추후 펼쳐질 그녀의 관능적인 복수극의 서막을 알린 영화의 도입부 시퀀스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주인공의 비밀을 남몰래 알고 있는듯한 심리를 관객들 몰래 심어준다. 제3자라는 관객의 특권을 역이용한 영화의 끈적한 서스펜스는 타자의 개입이 불허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관객의 시점을 허용한 감독의 영악한 의도에서 비롯된다. 이전처럼 제3자라는 안전한 위치에서 스크린을 바라볼 수 없는 관객은 다른 작품들보다 더 큰 감정의 진폭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은 뒷통수를 때리는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분명한 원인으로 인해 깊은 혼란에 휩싸인다. 인트로에서부터 자신들 모르게 밑밥을 깔아놓은 감독의 영악함이 빛을 발휘한 대목이다.

 

영화 <엘르>가 그랬듯이, 영화 <베네데타> 역시 그러하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상술했듯이, 영화 <베네데타>의 논쟁적 이미지는 이를 관람하는 우월한 객체로서 관객의 시선을 능수능란하게 지배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수녀로서 첫 걸음을 내딛던 그날밤, 그녀의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 성모상이 그녀를 향해 덮친다. 어린 베네데타의 기도와 동시에 그녀를 뒤덮은 거대한 석상의 이미지는 기적이 발현된 성스런 순간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성모상의 가슴을 탐하는 어린 소녀의 몸짓이 몇 초 뒤에 등장한 순간 분위기는 반전된다. 그녀를 도우러 온 수녀들은 그저 무너진 석상만 목도한 채 쉽게 발생할 수 없는 상황에 따른 의아함만 표출한다. 하지만, 이 모든 순간들을 지켜본 관객들은 그 자체로 파격적이면서도 차마 공존하기 어려운 이미지들의 나열 앞에서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한다. 성녀와 악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저울질하는 영화는 교차로 등장하는 두 이미지들의 대조를 통해 시종 관객을 교란시킨다. 관객에게 시선을 허용함으로써 얼핏 진실을 가리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듯 영화는 카메라 제스쳐를 취하지만, 실상은 저멀리 불구경하는 관객들을 혼란의 중심 속으로 밀어넣는 감독의 사악한 술수가 발휘된 순간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들은 지극히 은밀하게 진행된다.


여기서 영화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관객의 시선이 개입할 수 있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철저하게 구분짓는 쇼트들을 통해 베네데타를 향한 극 중 인물들과 관객의 입장을 조금씩 벌리기 시작한다. 타자의 시선이 개입하기 어려운 특성이 명확한 요소로서 서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베네데타의 환영만 하더라도 오로지 그녀의 시점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는 극히 당연한 사실은, 이 모든 사단을 유발한 그녀의 무아지경이 정말 신의 계시인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제3자라는 우월한 위치에서 그녀의 환영을 유일하게 관람할 수 있는 관객들 역시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환영이 지속 될수록 급변하는 전개양상은 보는 이에게 되려 혼란만 안겨줄 뿐이다. 예수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 조우한 도적의 그것으로 전환됨과 동시에 자신을 강간하려는 전개로 이어지면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흡사, 성聖에서 또 다른 성性의 영역으로의 변화 과정이 묘사된 쇼트들 또한 그녀와 관객들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의 시점이 개입되있지 않다는 점에서 도입부와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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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하지만, 관객에게 자비로이 은밀한 시점을 허용하던 영화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관객의 그것마저 차단시키며 진실에 접근하려는 발걸음에 강력한 제동을 건다. 십자가에 묶인 예수의 환영을 목도한 이후 베네데타의 육체 곳곳에 성흔이 아로새겨진 사건이 발생하면서 수녀원 수뇌층은 이와 관련한 진의 여부를 논의한다. 그 과정에서, 수녀원장 '펠리시타'(샬롯 램플링)는 역대 성자들이 기도하던 도중에 성흔이 발생했다는 점과 더불어,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처럼 이마에도 상처가 났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조작 가능성을 암암리에 거론한다. 이를 조용히 귀담아 듣던 베네데타는 잠시 재판 현장을 비운 사이,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이마에 선혈이 가득한 상태에서 예수에 빙의가 된 듯 자신의 성흔을 재단하려는 신부와 수녀원장을 향해 무시무시한 일갈을 던진다. 제3자의 시선이 전무한 상황에서 발상한 그녀의 성흔 추가 과정은 이제까지 그녀와 함께 환영을 엿본 관객의 입장에서도 너무 탐탁치 않은 정황을 내포한다. 마치 관객들이 진실에 접근하려는 걸 어떤식으로든 막으려는듯, 영화는 뜻하지 않은 타이밍에 시점을 차단하며 관객의 혼란을 조장하는 정황들을 적소에 추가한다.


이밖에도 영화의 사악한 시점 활용은 관객을 교란시키는 것과 더불어 작품 전체를 감싸는 바이브를 형성시킨다. 그 과정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베네데타가 자신의 욕구에 눈을 뜨는 순간 모두 보는 행위를 통해 촉발되었다는 점이다. 의도치않게 물에 젖은 바르톨로메아의 나신을 마주한 베네데타는 이어서 예수의 환영을 목격하며 서서히 내면의 욕구가 증폭된다. 그 가운데 핵심은 은쟁반에 비친 스스로의 신체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얼굴을 시작으로 옷에 가려진 자신의 유두를 은쟁반에 반사된 이미지로 마주한 그녀의 행위는 스스로에게 시점을 부여함으로써 지금까지 은폐되었던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가 마주했다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시선 활용을 토대로 욕망에 서서히 눈을 뜬 한 개인의 변화 과정을 능수능란하게 묘사한다. 스스로의 욕망에 서서히 눈 뜬 베네데타와 이를 부추긴 바르톨로메아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명적인 이미지들의 향연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의 팔짱을 해제시킬만큼 강렬한 감흥을 선사한다. 그 과정에서 금남의 공간에 따른 남근의 부재를 대체하고자 마련한 성모상 딜도는 욕망 앞에서 무기력한 신성을 드러내는 영화의 태도를 상기시키는 단 하나의 이미지다.

 

엄청난 속도로 타오르는 불길 마냥 커지는 그녀의 욕구는 오직 신을 섬겨야 하는 종교인으로서의 소명 의식과 동등등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게 수녀원장의 직함과 함께 타자의 개입없이 자유롭게 욕정을 해소할 수 있는 사적 공간을 향유하는 순간, 비등했던 성聖과 속俗의 대등관계가 역전된다. 하지만, 타자의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확신과 함께 자신의 파트너와 정을 나누는데 치중한 나머지, 자신을 쳐다보는 어느 누군가의 시점을 베네데타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다. 이제까지 신의 환영을 위시한 채 시선을 독점해온 그녀는 언제나 타인의 개입이 금지되었을 때를 전제하에 자신의 영향력을 마음껏 누렸다. 굳건히 지켜온 신성의 자리를 욕망이 전복시킨 것처럼, 수녀원장이자 성모라는 그녀의 실질적 위치 또한 순식간에 역전 당할 위기에 처한다. 욕망의 주체와 이를 유일하게 목격하는 관객 이외의 또 다른 누군가의 시점이 개입되는 순간을 기점으로 영화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영화의 새로운 국면은 성모의 위악을 처단하기 위한 또 다른 어머니의 개입과 함께 시작된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그녀들의 컴패니언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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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영화의 대립항은 두 어머니의 암투를 통해서 형성된다. 말 그대로 만인의 원죄를 보듬아줄 신성한 존재로서 성모라는 상징을 지닌 베네데타이며, 그 반대편에는 신에게 귀의한 여인들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대모이자 '크리스티나'(루이스 샤빌롯)라는 친딸을 둔 생모로서 펠리시타가 자리하고 있다.

 

시작은 상명하복에 입각했지만, 베네데타의 무아지경이 발현된 순간을 기점으로 둘 사이의 관계는 조금씩 비등해진다. 신의 환영을 마주했다는 소식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명성과 함께 수녀원 내 그녀의 입지는 기세 좋게 커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베네데타가 맞이한 불분명한 기적에 정치/경제적 프레임을 추가한다. 실제로, 중세 사회에서 형편이 여의치 않은 집안의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진로는 단 2가지, 좋은 집안에 결혼을 하거나 수녀로 귀의하는 길 밖에 없었던 관계로 많은 여인들은 별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수녀원에 들어가길 희망했다. 치열한 경쟁이 점철되었던 수녀로서의 길은 누가 더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오느냐에 따라 대다수 중세 여인들의 미래가 가로지어졌다. 면죄부와 더불어 돈 없으면 천국도 못간다는 그 당시의 만연한 종교적 악습을 감독은 결코 가볍게 치부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딸을 수녀원에 들이기 위한 과정에서 아버지가 펠리시타와 벌이는 도입부에서의 가벼운 논쟁부터, 아버지를 피해 수녀원으로 급히 들어온 바르톨로메아를 향한 펠리시타의 발언을 통해 암시된다("수녀원은 자원봉사하는 곳이 아니에요").

 

이러한 대목들을 기반으로 영화는 성과 속의 대립 한 가운데 정치적 면모를 첨가함으로써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프레임을 제시한다. 그 과정에서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소식과 함께 수녀원장은 교황청의 관심 속에서 큰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발생했음을 언급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그녀의 환영 내용에 의심을 거두지 못했던 펠리시타의 행보는 사적인 견해와 별개로 수녀원의 이득과 직결된 부분들을 재빨리 계산하며 잇속빠른 관리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어떤 상황에 놓여도 침착함을 잃지 않던 노련한 수녀원장은 그러나, 베네데타를 향해 지속해서 의심하던 자신의 딸 크리스티나의 성급한 행동과 함께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다른 수녀들과 달리 베네데타의 발언을 믿지 않던 그녀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 과정에서 베네데타의 성흔이 조작되는 과정을 목격했다는 거짓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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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여기서 영화는 서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으로서 진실공방을 부각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위증죄의 위험성을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수차례 설파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 또한 이 게임에 참여시키게끔 최면을 건다. 하지만, 다른 수녀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난 크리스티나는 위증의 댓가를 톡톡히 치룬다. 영화의 비정함은 그녀의 위증을 밀고한 이가 다름아닌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생모라는 점에서 절정을 이룬다. 딸의 발언을 부정하는 대목은 차마 거짓을 말할 수 없다는 한 개인의 양심, 혹은 자신의 자리를 온전히 지키고 싶은 수녀원장으로서의 욕심에 따른 선택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선택에 관계없이 크리스티나의 시점에서는 어머니의 무기력함과 배신만이 남는다. 믿었던 혈연 관계의 붕괴에 따른 그녀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와 함께 펠리시타가 보는 앞에서 자결한다. 관객이 기존에 인지해온 모성은 영화 <베네데타>에서 더이상 작동하질 않는다.

 

누구보다 베네데타의 발언을 경계해온 펠리시타는 허황된 이미지를 맹신하던 당시 중세 사회의 몰지각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허나, 크리스티나의 위증 사건 이후 베네데타를 향한 수녀원의 경외는 더욱 깊어진 나머지 그녀에게 차기 수도원장 자리를 위임한다. 불미스런 사건으로 한순간에 자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상실한 노년의 수녀는 섬뜩한 독기를 품은 채 자신을 밀어낸 또 다른 어머니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들이민다. 그 과정에서, 의욕만 앞섰던 자신의 딸과 달리, 다년간의 수녀원 생활을 토대로 터득한 공간적 특성을 활용하여 성모로 추앙받던 한 여인의 은밀한 욕구 충족 행위를 두 눈으로 염탐하는데 성공한다. 펠리시타라는 타자의 시선이 개입할 수 있었던 수녀원실의 구멍은 시선이 곧 권력이라는 점을 이용하며 오랜기간 수녀들을 지배해온 역대 관리자들의 은밀한 질서 유지 수단을 상징한다. 이를 역이용한 펠리시타는 그길로 겹겹이 쌓여진 거짓된 성모의 껍데기를 박살내고자 교황대리가 머무르는 피렌체로 길을 나선다. 물론, 영리한 성모는 그녀가 나서는 길을 바라봅으로써 자연스레 자신에게 다가올 역경을 미리 눈치챈다. 그렇게 두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싸움은 교황 대리의 등장과 함께 전면전에 들어가지만, 그와 동시에 유럽을 지배하던 죽음의 그늘 또한 페샤에 들이닥치기 시작하면서 뜻하지 않은 국면 속으로 대결의 행방이 결정된다.

 

앞서 상술한 모성의 배신이라는 테마는 비단 펠리시타에 국환된 내용이 아니다. 그녀의 뒤를 이어 새롭게 수녀원장으로 등극한 베네데타는 수녀원실이라는 유일한 사적 공간에서 사랑하는 연인과의 끝이 없는 욕구 충족 행위를 일삼는다. 그 과정에서, 금기를 넘어선 영화의 대담함을 상징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로서 어린시절 베네데타가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성모상이 딜도로 변하는 순간을 관객들은 마주한다. 딸 아이의 밝은 미래를 염원하며 전달한 친모의 선물은 금남의 공간에 따른 남근의 부재를 대체할 완벽한 욕구 충족 수단으로 활용된다. 친모의 의도와 철저히 배척되는, 동시에 성모로서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행위를 촉발시킨 베네데타의 행보 역시 모성의 배신이라는 모티브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펠리시타와 함께 공유한다.

 

베네데타의 불순한 욕구 충족 행위를 하늘에서 경고라도 하듯, 불길한 기운을 다분히 풍긴채 페샤의 하늘을 새빨간 유성들이 가득 메운다. 여기서 자신을 둘러싼 성모라는 상징성을 베네데타는 십분 활용하며 모든게 다 자신을 향한 신의 계시이며 페샤는 흑사병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는 메시지라는 뜻을 군중 앞에서 전한다(후술하겠지만, 그녀를 둘러싼 진실 공방에 더 큰 혼란을 안겨주는 계기로 작용한다). 페샤 주민들의 불안을 순식간에 불식시킨 베네데타의 모습은 자비로운 성모의 이미지보다 대중의 심리를 간파하는데 능한 어느 정치꾼의 그것과 훨씬 부합하며, 이마저도 과거 관리인으로서 노련한 모습을 보였던 펠리시타와 너무나도 유사한 형태를 띈다. 극단적인 대립이 무색할만큼 피카레스크적 측면에서 상당수가 동일한 두 여인의 관계는 사뭇 복잡미묘하다. 하지만, 이 또한 폴 버호벤의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으로서 그의 작품 세계를 형성시키는 또 하나의 주요 키워드인 컴패니언쉽이 적용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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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쇼걸>, 1995년

 

 

폴 버호벤의 영화 속 주인공들, 특히 여성들은 껄끄러운 관계의 외피와 다소 대조적인 일종의 동업자 정신을 형성한다. 시종 라이벌 관계를 구축하며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표출하던 '노미'와 '크리스탈', 그리고 친구의 남편과 바람을 피었다는 불편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끝내 우정을 회복하는 '미셸'과 '안나'의 관계가 바로 그러하듯, 폴 버호벤의 여자들은 자신과 동일한 업종 혹은 유사한 경험을 공유한 상대방과의 연대를 느슨하게 구축한다. 그리고 이는, 베네데타와 펠리시타에게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의도치않게 흑사병에 걸린 펠리시타는 쇠약해진 기운을 극복하지 못한 채 침상 위를 전전하며 다가올 죽음을 무기력하게 기다린다. 한편, 펠리시타의 폭로와 동시에 모진 고문 끝에 자신의 은밀한 행각을 고백한 바르톨로메아에 의해 이단으로 몰린 베네데타는 화형 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 과정에서 베네데타는 펠리시타를 찾아가 둘 만의 은밀한 전언을 주고 받는다. 죽음을 눈 앞에 둔 두 수녀의 컴패니언쉽은 곧이어 등장할 일생 일대의 쇼에서 각자가 맡을 역할을 비밀리에 배분하는 과정에서 완벽하게 완성된다.

 

그렇게, 영화는 파멸을 향한 마지막 질주에 돌입한다.

 

 

 

불안은 교황도 잠식시킨다

맹신도들의 아포칼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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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사회적으로 터부시되었던 베네데타의 호모섹슈얼 행각이 폭로되면서 서사는 급속도로 그녀의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흥미로운건, 그녀의 판독 불가능한 환영이 더이상 주목할 만한 사회 문제로 거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형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수많은 페샤 군중의 모습에서 이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간 베네데타의 언사에 감화된 주민들은 그녀를 향한 굳건한 믿음을 견지한채 성모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알폰소'(램버트 윌슨) 교황대리의 판결을 거세게 반대한다. 물론, 시간이 흘러 성모로서 추앙받지 못한 그녀의 비참한 말로를 감안하면 페샤 주민들의 행동은 진위 여부가 파악되지 않은 허상을 향한 맹신이 유발한 의미없는 몸짓으로 바라보아도 전혀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중세 사회상이 짙게 투영된 주민들의 무비판적 태도는 성역 없는 감독의 비판 정신이 다시한번 발동된 순간이다. 허상에 매몰된 인간들의 맹신은 베네데타가 기획한 한 편의 쇼를 위한 적절한 밑밥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영화의 진정한 신성 모독이 등장한다.

 

영화는 흡사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듯 클라이막스를 구성한다. 모진 고문 끝에 베네데타의 동성애를 입증할 증거의 폭로한 바르톨로메아가 화형장으로 그녀에게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한다. 이에 베네데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래야만 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비취지만, 이는 영락없이 포스트 유다로서 바르톨로메아를 섭외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제국에 맞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예수의 아우라를 재현하고 싶었던 그녀의 부탁과 더불어, 베네데타를 향해 화형 집행을 내리는 교황대리의 모습에서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내렸던 빌라도 총독의 그것과 사실상 일치한다는 점은 베네데타의 뻔뻔한 모방 시도를 강하게 입증해주는 심증들이다.

 

이같은 영화의 대담한 레퍼런스 활용은 베네데타와 펠리시타의 협업이 촉발시킨 소동극의 묵시룩적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흑사병으로 온 몸이 시꺼매진 자신의 얼굴을 펠리시타가 노출시키자, 베네데타는 그 즉시 죽음의 그림자가 마을에 잠재 되었다는 공포감을 조성하며 페샤 주민들을 단번에 선동한다. 페샤를 지키던 자신이 이제 곧 죽게 되었으니 마을에 흑사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그녀의 서늘한 암시는 교황대리라는 사회적 전지전능을 잠식시킬만큼 주민들의 극심한 불안을 조장한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현장에서, 그간 타락한 종교인의 전범을 제시해온 알폰소 교황대리는 어느 성난 여인의 시퍼런 칼날에 의해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여담으로, 폴 버호벤의 여인들은 언제나 허울뿐인 수컷의 권력을 전복시키는 과정에서 보는 이들에게 짜릿한 카트리시스를 안긴다.

 

메멘토모리에 입각한 베네데타의 선동에 즉각 반응한 군중의 날선 의지는 그렇게 최고 권력을 무너트린다(감독의 급진적 사고를 감안하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너무나도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교황대리는 죽기 직전 베네데타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관객을 피말려온 지지부진한 진실공방의 진상을 간접적으로 폭로한다. 잠시나마 천국에 다녀왔다는 베네데타의 과거 발언을 기억한 그는 그녀에게 묻는다. "자네가 본 지옥에는 내가 있었나?" 그의 알량한 속내를 금새 눈치채듯 그녀는 답한다, "...아니". 그동안의 시덥잖은 행보들과 달리, 자기객관화를 어느 정도 구가 할 수 있었던 알폰소는 베네데타의 미적지근한 대답을 접한 뒤 교황대리로서 그녀를 향한 최후의 판결을 내린다,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군".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세속적이었던 교황대리의 허무함이 짙게 묻어난 마지막 유언은 실제 페샤의 역사(유럽 전역을 휩쓸던 와중에 페샤만 흑사병을 피해갔다)와 대조를 이루며 관객의 찝찝함을 배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형태로서 베네데타를 둘러싼 진실 공방은 이분법적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영화의 마지막 암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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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네데타>, 2021년

 

 

영화는 외관상 그녀의 언사가 모두 진실인지 아니면 거짓에 불과한지를 판가름 하는 전개 속으로 관객들을 그럴싸하게 몰아넣는다. 사형과 직결될 만큼 치명적인 죄목으로서 수차례 인물들의 입을 빌려 언급되는 위증죄는 뼈저린 댓가를 치룰 정도로 중대한 사안임을 누차 강조한다. 그 과정에서 거짓을 말한 죄로 수녀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를 처절하게 벌하던 크리스티나의 채찍씬은 이를 부각시키는 대목으로서 진실을 파악하는 행위 자체에 막중한 책임감을 관객들이 느끼게끔 유도한다. 하지만, 정교한 타이밍에 맞춰서 한 인물의 명암을 동시에 드러내는 이미지들의 교차는 관객들을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견인한다. 안타깝게도, 그 중심에는 그토록 찾고자 하는 진실 대신 텅빈 공백만이 자리잡고 있다. 관객을 교란시키는데 더 큰 의의를 두고 있다는 듯, 영화는 대중 앞에섰을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전혀 다른 그녀의 몸짓을 관객들이 마주하게끔 주도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외피에 은밀하게 가려진 스스로의 내피를 조금씩 대담하게 노출하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폴 버호벤은 영화를 통해 그녀가 정녕 성녀인지 아니면 악녀인지에 관해서 크게 주목하지 않을 뿐더러, 그와 관련된 자신의 견해를 어느 정도 상정한 듯한 뉘앙스를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 다소 의외일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거스른 연출을 철저히 지양하는 폴 버호벤의 작가로서 신념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 평생 지녀온 필생의 테마와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폴 버호벤에게 유일한 진실은 딱 하나, 주체못할 욕망 앞에서 예측불허한 형태로 반응하는 몸 덩어리 그 자체다.

 

 

 

단 하나의 진실, 육체


 

성모로 추앙받던 한 여인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안락한 산골 생활을 뒤로 한채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페샤로의 귀환을 결심한다. 잠시 욕망에 우선순위를 내어줬음에도 일생을 신을 모시는 데 투신한 그녀는 세간의 따가운 인식을 감내하고서라도 자신의 정체성이 성聖에 귀속되었음을 수긍하는 제스쳐를 취한다. 자연스럽게 평지를 향해서 하산하는 그녀의 뒷모습에는 우리가 원하는 형태의 진실은 끝내 담겨있지 않다. 바르톨로메아는 물론, 관객 또한 이해못할 그녀의 선택에는 단지 수순에 맞게 귀결되어야 한다는 본인만의 굳건한 윤리 의식만이 내포 되었을뿐이다. 평생을 바닥에서 식사해야 했던 그녀의 비루한 말년과, 유럽을 휩쓸던 흑사병의 그늘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났다는 페샤의 후일담을 소개하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성녀와 악녀 사이를 정신없이 저울질 하며 관객의 이성을 헤집던 진실의 추를 한 가운데에 완벽히 정지시킨다.

 

영화 <베네데타>를 둘러싼 단 하나의 확실한 이미지는 욕망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육체다. 수차례 관객을 교란시킨 환영과 소음, 그리고 혼란을 주도한 의도적 시점 허용은 이 모든 사태를 목도했음에도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한 깊은 의문만을 제기한 채 극장 문을 나선다. 이분법적 형태의 결론은 애초부터 염두하지 않았다는 감독의 무신경한 태도는 수많은 음모론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공백을 은밀하게 숨겨둔 채 정답 없는 게임을 만들어낸다. 충격과 소름, 그리고 금단의 현장을 마주했다는 사실이 유발하는 약간의 흥분을 관객들이 느끼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베네데타>는 비로소 완성된다. 욕망에 반응하는 육체를 관람석에서 마주한 또 다른 육체가 또 다시 반응하는 쌍방의 교감 형태는, <베네데타>를 넘어 전 작품들을 통해서 관객들이 마주하길 바랬던 폴 버호벤의 작가로서 타협할 수 없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장 50년간 스크린에 표출하고 싶었던 진실의 핵심은 이성을 무장해제시키는 가장 기본적이고 순수한 욕망이 투영된 육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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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비르지니 에피라', '폴 버호벤', '다프네 파타키아'

 

 

영화 <베네데타>는 역사적으로 죽음과 제일 밀접했던 시대에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솔직했던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고백이자 다분히 공적인 증언이다. 모순으로 점철된 서사의 주인공은 신실한 소명의식을 지닌 종교인이나, 허황된 믿음을 심어주며 대중을 농락한 위선자, 혹은 사회의 압제 속에서 욕망 투쟁을 벌인 소도미타sodomita라는 프레임들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온전한 실존에 불과하다. 오로지 의문만 표할 수 있을뿐, 그저 욕망에 솔직했던 역사적 현존의 이야기에 그 이상의 첨언은 불필요하다. 핵심에 전혀 접근할 수 없는 불필요한 시도들이기 때문이다. 온갖 추측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들로 가득하다는 것과 대조적으로, 그 모든 언사言辭가 진실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 영화 <베네데타>를 둘러싼 가장 명징한 사실이다.

 

가히, 문제적 인간에게 걸맞는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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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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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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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te95
    • 처음 접하는 감독의 작품이어서 사실 베네데타를 처음봤을 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점이 많았는데, 에디터님 덕분에 새로운 해석의 맥락을 잡을 수 있었네요 ㅎㅎ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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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현준
    • gate95우와! 이른 새벽에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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