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있다

그리고 나의 낙원을 이루는 영화와 음악
글 입력 2021.11.2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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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나를 소개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른다.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 존재하며,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나는 가지지 못한 것들도 많다. 혼란스러웠던 스무 살을 지나, 수면 아래 잠겨있기 바빴던 스물한 살을 넘어 스물두 살의 끝자락에 도착한 지금, 나는 내 안의 도망자를 인정하기로 했다.


관계를 잘 끝맺는 법을 아는 게 진정한 어른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아직 어른이 되기에는 한참 멀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잘 맺는 법’에 매우 서툰 사람이었다. 어떠한 관계에서 스트레스 상황이 반복되거나, 갈등 상황이 지속되면 그 원인을 마주 보고 맞서는 법이 없었다. 일정 선을 넘어가면 스위치를 끄듯이, 상황 자체를 나에게서 차단하고 도망쳤다. 달려가는 나를 누군가가 가로막고 끌어내지 않는다면 나는 도망가 숨어버린다.


나에게는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었다. 누군가는 합리화라 여길 수도 있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붙잡기 싫었고, 끝이 보이는 관계에 사과와 화해라는 임시방편을 만드는 일이 어려웠다. 도망침으로써 관계들을 끊어내고 나면, 산책하며 노래를 듣거나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런 시간이 낙원과도 같았다. 약간의 자기혐오와 해방감 그리고 공허함으로 가득 찬 머리를 다른 곳에 집중시키고, 영화나 책의 등장인물과 노래의 가사에서 공감 가는 지점을 찾는 순간들은 위로 아닌 위로가 된다.


아직도 어린아이인 나에게는 일방적인 관계가 더 쉽다. 내 속상함과 서운함을 설명하고 상대방에게 이에 대한 해명이나 위로를 받는 것 보다,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일방적으로 찾을 때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것들이 쉽다.


이기적으로 도망만 다니는 나는 언제쯤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친구와 맥주를 마시다가 푸념처럼 말해 본 적이 있다. 친구는 도망을 멈추게 하는 건 사랑이라는 대답을 했다. 삶에는 수많은 예외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예외를 스스로 만들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참 삐딱한 사람인 건지, 사랑에도 결국은 끝이 있고 사랑이 끝나면 나는 또다시 도망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끝이 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고 싶게 만드는, 그래서 도망가지 않고 싶게 만드는 그런 사랑을 언젠가 해 보기를 바란다. 아직 그런 사랑을 해보지 못한 나는 여전히 도망치는 것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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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영화가 좋다. 영화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이며 세상을 보는 창이다. 나는 영화학도도, 영화에 대한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영화가 너무너무 좋다. 영화제 상영관 자원봉사를 할 때였다. 게으름 많고 아침잠 많은 내가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꼬박 2주일 동안 아침 6시에 일어나고 집에 저녁 11시가 넘어 도착하며 출근하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영화 얘기를 할 때가 가장 즐겁다.


영화 속에는 참 다양한 삶들이 등장한다. 한 번의 생을 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상상하고 그려낼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영화는 이런 경험과 상상의 한계를 깨 주는 가장 좋은 친구다.


영화를 처음 좋아하기 시작한 게 아마 고등학생 때였을 거다. 지금 생각하면 참 귀엽지만 나름 삶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십 대는 유명하다는 로맨스 영화들과 명작들을 찾아보았다. 어릴 때는 마냥 재미있기만 했던 영화가, 대사를 곱씹기 시작하니 내 것이 되기 시작했다. 본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면, 볼 때마다 좋아하는 장면이 바뀌었다.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공부가 잘 안 되는 날이나, 시험이 끝난 주면 밤에 꼭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봤다. 언젠가부터 영화는 내가 홀로 있는 시간에 가장 자주 찾는 친구가 되었다.


영화를 보다 진지하게 좋아하게 된 건 스물한 살 때였다. 스무 살 때는 오히려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참 별것 아닌 일들인데, 스무 살 때에는 처음 누리는 대학생의 자유와 그에 수반하는 공허함이 크고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다. 자기연민에 차 있기 바빠 영화를 보기는커녕 멍한 상태로 잠들기 바빴다. 스물한 살 새해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가타카>를 다시 봤다. 한동안 멀리했던 영화를 내가 왜 그리도 좋아했었는지 다시 실감했다.


청승맞던 나를 끌어올린 건 영화였다. 나는 다시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찾기 시작했고, 다양한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별 탈 없이 잔잔히 흘러가는 내 일상이지만 영화를 통해 나는 여러 나라와 시대의 여러 삶을 본다. 그리고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영화에서 고민의 답을 찾기도 한다. 영화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슬픈 날에도, 행복한 날에도, 생각에 잠기고 싶은 날에도 그저 영화 한 편을 틀면 된다. 나의 일방적인 영화에 대한 사랑을 영화는 배신할 리 없는 것을 알기에, 영화는 나를 성장시키므로, 그래서 나는 그저 영화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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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나는 이모 키드(EMO kid)였다. 초등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에이브릴 라빈의 를 배웠다. 짙은 아이라인에 나시에 배기팬츠를 입은 금발의 에이브릴 라빈은 어린 내 눈에 참 멋져 보였다. 그때부터 팝송이 좋아졌고, 록이 좋아졌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예전 미국의 10대들이 밟았던 전철을 그대로 밟듯, MCR과 같은 이모 밴드들의 노래를 들으며 이모 키드를 자처했고, 너바나를 들었다. 이유 모를 반항심이라는 10대들의 고루한 습관을 나 역시 피해 가지 못했다. 록밴드로부터 시작해 참 많은 장르의 음악을 접하고 좋아하게 됐다.


음악 취향은 사람을 참 쉽게 친해지게 만든다. 이어폰 없이는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많은 음악을 듣게 되었고, 음악 취향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누군가와 친해져 좋은 노래들을 추천받기도 했다. 멋진 노래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제일 멋져 보이고, 음악 취향이 비슷하면 쉽게 사람을 좋아하던 때가 있기도 했다.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음악을 너무 좋아했던 나머지 플레이리스트와 사람을 동일시하는 실수를 자주 범하곤 했다. 나와 같은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나와 같은 사람은 아닐 텐데, 무작정 나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고 혼자 실망했다. 지금은 음악 또한 취향의 일부분일 뿐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음악은 삶을 영화같이 만든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답답한 민원 지하철도 더 버브의 Bitter Sweet Symphony를 들으며 가면 사회의 부품으로 소비되는 노동자의 퇴근길처럼 느껴진다. 무더운 여름날에 가벼운 힙합을 들으며 생각 없이 머리와 몸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힐 수 있고, 산책하며 듣는 라디오 헤드나, 바다를 보며 듣는 라나 델 레이의 노래 같은 것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노래는 우리의 일상에 스며든다. 결국 나중에는 어떤 노래를 들으면 삶의 어떤 시기가 떠오르고,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아직도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누군가를 짝사랑했을 때 매일같이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들으면 그 여름의 공기와 햇빛이 가끔 떠오른다.


취향이 도대체 뭐길래, 라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나부터도 ‘나’를 소개하는 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인 영화와 음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니 그 ‘무언가’가 개인을 이루는 참 중요한 요소이긴 한가 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큼 나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같은 대상을 좋아해도 그 대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모두 다르지 않나.


그래서 가장 인정하기 싫었던 나의 모습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무작정 적어보았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잘 드러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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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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