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를 가로막는 것들에 대하여 [사람]

4일간의 방황
글 입력 2021.11.17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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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차



번아웃에 한동안 시달렸다. 사실 아직도 번아웃 상태다. 올해 여름의 막바지에 시작했던 학과잡지의 2번째 호가 끝났다. 문장들과 씨름하고, 사진들과 다투고, 게으른 나를 겨우겨우 다그쳐서 책을 내놨다. 창간호보다는 잘 만들어야지. 저번보다는 더 잘 만들어야지. 욕심을 잔뜩 부리고 일을 벌인 터라 수습할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중 하나가 인터뷰 영상을 만들어 게재하는 건데, 진이 빠져버려서 후임 편집장인 P 학우에게 모든 걸 다 위임했다. (위임이 아니라 그냥 짬 때린 거다)

 

이 글도 어찌어찌 마감일을 넘겨버렸다. ‘번아웃에 한동안 시달렸다.’라는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글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나. 마냥 그런 것도 아닌데 글을 쓰는 게 버거웠다. 에디터 활동을 끝내고, 컬쳐 리스트로서 쓰는 첫 번째 글이라 힘을 잔뜩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라도 쥐어짜는 게 맞을 텐데. 흰 여백을 보는 게 두려웠다. 손끝으로 말을 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커서가 점멸하는 것만 멍하니 봤다. 글을 쓰는 게 버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나에겐 밥 먹기 만큼 쉬운 게 글쓰기였다. 잘 쓴다는 게 아니라 그냥 술술 잘 나왔다. 어딘가 나에게 있어야 할 자양분이 없어진 것처럼 적절한 문장을 찾는 것이 힘들었다.

 

 

 

2일 차



근래 내가 썼던 글들을 되돌아봤다. 난 무언가를 쓰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썩 마음에 드는 글들은 없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나를 글을 쓰고, 밤을 지새우며 문장과 씨름했던 시간은 무엇을 위했던 것일까. 마감일을 지키려고 그랬던 걸까. 야심 차게 시작했던 검정 치마 3연작은 마지막에 그냥 고꾸라져 버렸다. 성실함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갑자기 벽이 가로막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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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차



 
막 학기를 맞이했습니다. 저에겐 멀리 있는 일처럼 느껴졌었는데 결국 다가오고야 말았네요. 사실 이번 학기를 시작할지 말지 망설였습니다. 대학교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 대학생이란 신분에서 벗어나는 게 두려웠거든요. ‘학생’이란 신분이 사회적 결핍이 내포되어 있긴 하지만, 불완전성 때문에 사회에서 용인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직 미숙하고 서툴더라도 ‘학생이니까’ 하고 용서가 되는 것들 말입니다. 대학교를 나가면 그런 따듯한 시선에서 멀어집니다. 사회에선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수하고, 가끔 삶의 선상에서 휘청거리며 번민하는 시간이 용서되지 않겠죠.
 

 

벽의 근원을 찾기 위해 잡지 원고를 인쇄소에 넘기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다. 이놈은 뭔데 이렇게 굳건히 서 있는 걸까. 글을 쓰는 걸 막고, 올해 초부터 열심히 달려온 내 앞에 떡하니 있는 이 벽에 이름을 새겨줘야 ‘번아웃’이란 감정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벽을 어루만져보니 어디선가 만져 본 기분이 든다. 심지어 이름도 내가 달아줬다. 언제였더라. 더듬거리며 과거에 썼던 글들을 뒤적거렸다.

 

그래. 이 벽의 이름은 ‘강하’였다. 들꽃 VOL. 2 CONATUS 펴는 글에 쓰려고 공들여서 썼던 글이었다. 대학생이란 신분을 곧 벗어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대학생으로 6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얻은 나만의 것에 관해서 썼었다. 대학이라는 이름의 수송기에 올라타 이젠 사회로 뛰어내려야 한다는 중압감을 솔직히 적었다. ‘강하’. 내 앞에 있는 벽은 사실 이전부터 있었다. 올해의 시간이 끝나감에 따라 내가 걸어온 길만큼 가까워졌을 뿐이다. 언젠가 뛰어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막상 내 차례가 다가오니 두려워진 것이다. 막상 저 글을 쓸 때는 ‘강하 준비 끝!’ 이런 식으로 썼었는데 진짜 뛰어내릴 순서가 오니까 다리가 벌벌 떨린다.

 

 

 

4일 차



요즘 부쩍 취업 사이트를 자주 드나든다. 어디를 가야 할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지금도 변함없지만, 주변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한참 뒤에 있을 것 같던 사람이 자신만만하게 나를 제치고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인정하기 싫지만, 어느새 열등감에 뒤범벅되어 있었다. 관심도 없던 분야의 채용정보를 보고, 직무보단 회사 이름을 보면서 혼자 생각이 많아져서 담배를 태웠다. 내가 ‘ 되지 말아야지. 남들 부러워서 내가 좋아하는 걸 놓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했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를 짓누르는 감정은 ‘번아웃’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객관적으로 나를 봐도, 정신없이 하나에 매몰해서 달려왔다고 호언장담할 순 없다.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어서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은 셈이다. 일 년 동안 옆에 끼고 왔던 프로젝트 하나가 끝났으니, 이만한 구실도 없지. 그래. 번아웃으로 정하자. 이런 절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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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글을 쓸 때 깨끗해져야 한다. 하나라도 더 배우고, 알아볼 수 있도록 마음 한쪽을 비워놔야 한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잔뜩 매워지면 글을 쓸 때 필요한 영감들을 담을 공간이 없어진다. 스스로 얽매이지 않고 준비한 것들을, 훈련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잘 뛰어내릴 것이라 자신했건만. 경계했던 감정들과 상황에 매몰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란 건 잘 알고 있었는데, 눈앞에 들이닥치니 두려움이 덜컥 들었다. 그런 감정들이 한가득하다 보니 글을 쓸 수가 없을 수밖에. 난 이렇게 선언했었다.

 

 
제 코나투스는 ‘Edit’입니다. 세상에 숨겨진 가치 있는 이야기를 찾는 것. 사람들에게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 저를 움직이는 연료는 그런 것들입니다. 대학교 4년 동안 학생이란 신분 아래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얻은 값진 코나 토스입니다. 영원한 가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순 없지만,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번 학기가 지나면, 저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야 겠죠. 아직 마냥 두렵지만, 요령껏 준비하려고 합니다. ‘준비되셨어요?’라는 질문에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네 준비됐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게끔.
 


유감스럽게도 책으로 나온 이상,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 한 번 더 새겨놓으려고 한다. ‘강하’라는 벽을 피할 수 없다면 부수던가, 단념하던가 해야 하니까. 이정표를 다시 새운다는 기분으로, 컬쳐 리스트 첫 글은 이걸로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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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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