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위무불위'를 실현시킨 가수 [사람]

글 입력 2021.11.1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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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도덕경> 제 3장에서 ‘허기심 실기복’을 토대로 ‘무지-무욕-무위’의 3단계를 주장한다. 우리는 저 3단계를 이룸으로써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우선, ‘무지’해야 한다. ‘지’라고 하는 것이 타자의 욕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때, ‘무지’는 세속적 가치를 습득하고 욕망을 생산하는 과정을 중단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지’를 추구함에 타자의 욕망의 내용으로서의 가치체계를 습득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화된 욕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것을 비워내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무지’하고자 할 때, 우리는 ‘무욕’할 수 있다. ‘무욕’이란 욕망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를 해체시키는 것이다. ‘무욕’의 상태에서, 불필요한 욕망이 제거되며 적절한 욕망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럴 때 비로소 ‘무위’의 상태에 도달한다. 억지로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도 타인의 욕망과 충돌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타인과의 다툼과 경쟁이 줄고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다. ‘무위’함과 동시에 되지 않는 것이 없는 ‘무불위’의 상태를 이뤄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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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무지-무욕-무위’의 3단계를 배우고 난 후, 필자의 삶에 이것을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온전한 무위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지’를 추구하고 이를 ‘욕’하기 때문에 갈등과 혼란이 생겨난다는 것에 적극 공감한다. 다른 사람에게 서운한 것도,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것도, 불편한 상황이 생기는 것도 모두 저마다가 추구하는 ‘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각자의 나름대로 추구하는 가치관과 그에 따른 행동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에 불만을 가지고 혼란스러움을 마주한다.

 

도교를 공부한 후, 필자는 ‘흘러가는 대로’를 추구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모든 어려움에 대해 ‘흘러가는 대로!’를 외치며 살아가는 필자에게 너무 회피하기만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오기도 했다. 그러나 도교가 말하는, 그리고 필자가 추구하는 ‘흘러가는 대로’의 삶은 모든 것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정, 모든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치관을 내세워 타인에게, 세상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까지도 함부로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노자가 말한 ‘무지-무욕-무위’에 가까워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필자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장자는 ‘부자유’에서 벗어난 ‘자유’를 찾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지금 세속적 인식과 가치로 이루진 닫힌, 갇힌 마음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낸 일종의 ‘꿈’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타자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고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자아는 고립된다. 절대적이지 않은 기준을 비우고, 꿈에서 깨어나고, 세속적 지식을 끊임없이 없앰으로써 각 개인은 자유와 소통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이는 ‘제물’, 그리고 ‘물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제물’은 절대객관의 인식에서 계 내 사물들은 그 존재 형식이나 양태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근원과 바탕이 동일하며 상호변화라는 과정을 통해 각 개별자들의 속성과 형식을 공유한다. 모든 만물은 독립적이고 고정적인 존재가 아닌 상호 변환되는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자기동일성을 파악하게 하고 절대적 선과 악의 가치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절대객관의 시선에서 삶과 세상을 바라본다면 사사로운 것을 넘겨 선택과 집중을 돕는다. 우리의 ‘변화’, ‘비상’은 ‘꿈에서 깨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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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론을 보면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와 나비의 꿈 이야기에서 나비는 세속적 자아를, 장주는 참자아를 뜻한다. 꿈 속, 즉 세속적 세계에서 나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관이 실제라고 믿는다. 그러나 꿈을 깨는 순간, 그것이 세속적 세계였음을 알고 참된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결국 장주와 나비가 혼동되는 상태에 이른다. ‘물화’는 사물 사이의 변화, 사물에 따른 나의 내적 변화, 사물 자체의 변화(인간의 경우, 인간 개인 자체의 완전한 변화)를 모두 포함한다. <장주와 나비의 꿈> 이야기에서는 마지막 단계의 물화까지 온전하게 일어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둘의 차이를 구분함을 넘어서, 나비와 장주의 일치를 경험했고, 더 나아가 나비와 장주의 구분이 사라져 나도 아니고, 나비도 아닌 ‘오상아’의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1) 꿈을 꾸는 나, 2) 꿈 속에서 꿈을 꾸는 나, 3) 완전히 꿈에서 깨어난 나, 이렇게 세 가지의 주체를 가진다. 2)의 꿈에서 깨어난 것을 ‘소각’이라고 부르고, 1)의 꿈에서까지 깨어난 것을 ‘대각’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꿈에서 깨어난 후에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고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총 두 차례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꿈을 깨는 과정을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 것’에 빗대어 설명을 할 수 있다. 우선 ‘유분’의 상태가 가능한 것은 꿈을 한번 깬 ‘소각’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내가 나비인지, 장자인지가 구분 가능하다. 그러나 ‘물화’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대각’의 사태이다. 나비와 장자는 차별이 없는 대상이며 평등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소각’의 상태 역시 꿈이었고 깨어보니 두 대상은 다른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절대객관 시선에 도달할 수 있다.

 

장자의 나비의 꿈 이야기를 읽고, ‘몰입’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현재에 대한 집중, 즉 물아일체를 통해 완전히 내가 없어지는 경험, 내가 어떠한 것에 온전히 몰두하여 즐길 때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깊이 와 닿았다. 필자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 또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오롯이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자유’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고 그 시간을 즐긴다면 여유롭게 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끊임없이 타인과 스스로를 비교했다.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고, 우월감에 취하기도 했다. 결국은 모두 동등한 존재인데 말이다. 혹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서 행복의 정도가 달라지기도 했다. 좋은 모습, 행복한 모습에만 집착했고, 불행한 모습은 외면했다. 결국은 똑같은 한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 나아가 만물은 차별되지 않은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상호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결국 죽음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앞서 말했던 ‘흘러가는 대로’, ‘그러려니’를 추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나만의 주관적 판단 기준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 절대 자유, 절대 행복에 도달하고 싶다.

 

도교의 사상은 초연한 자아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대상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모든 욕됨을 비워내며, 그러려니 살다보면 자연히 이루어짐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필자 역시도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모르는 사이 끊임없이 바라는 점이 생겨났고, 현실과 바람이 달랐을 때에는 쉽게 좌절했다. 생각하는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습에 화가 났고, 좋아하는 만큼 좋아해주지 않는 친구들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원하던 상황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급기야 신을 탓하기도 했다. 과연 ‘무위’, 그리고 ‘절대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tv를 보다 우연히 ‘sg워너비’를 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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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워너비’는 2004년에 데뷔한 3인조 남성 보컬 그룹이다. 2000년대 초중반의 가요계를 휩쓸다가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출연한 후, 역주행을 했었다. 음원차트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했고, 노래방 인기차트에도 등장했다. 기존의 팬들부터 새로 유입된 팬들까지 역주행으로 마주한 그들의 인기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보여준 sg워너비 멤버들의 반응들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차트, 그리고 인기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 뜨거운 열기가 계속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이미 충분한 인기를 누렸던 사람들이여서일까, 인기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그들은 노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만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아도 되나 싶습니다. 그냥 좋아하는 걸 하는 사람일 뿐인데요.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또 조용해지겠죠. 앞이 아닌 뒤에서라도 늘 그랬던 것처럼 노래하고 있을 테니까 가끔씩 찾아와주세요.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분께서 좋아해주시니 제가 더 뭉클해지네요. 요즘 코로나로 다들 너무나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실 텐데 오늘 저희의 노래가 조금이나마 여러분들의 가슴에 위로가 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역주행 1위 소식 들었어요. sg워너비의 1위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추억이 1위예요. 여러분들의 그때 그 시절이 이렇게 강하고 귀했다는 것을.’ 역주행 후 차례대로 멤버 이석훈, 김용준, 김진호의 sns에 기재된 글들이다. ‘무위무불위’를 실현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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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반응에 흥미가 생겨 그들의 노래를 더 자세히 듣게 되었다. 그러던 중, 김진호의 개인 노래 중 ‘폭죽과 별’이라는 노래를 찾게 되었고, 그 가사가 마치 도교사상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느꼈다. ‘폭죽과 별’은 김진호가 직접 18년간의 연예인 생활을 대입해 작사, 작곡한 곡이다. 아래는 ‘폭죽과 별’의 가사이다.


나를 터뜨려줄 힘 있는 사람만 기다렸네

하늘 위로 날아올라 반짝이고 나면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겠지 소리쳐주겠지

나 그 기분이 좋았고 딱 그 위치가 좋았어

그러다 보니 내 옆에 별이 닿을 것 같네

별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만 싶네

날 다시 하늘 위로 날려줄 사람만을 찾고

그들 손에 길들여져 버린 폭죽 하나로 남네

난 다시 하늘 위로 떠오르고 사람들은 날 보고 소리 지르고

난 다시 재가 되어 땅에 내리고 사람들은 나를 밟고 떠나가고

하늘에 잠시 떠올랐던 그 순간 별들에게 물어봤어

너희들은 좋겠다고 계속 빛나고 있으니

폭죽에게 별들이 말해줬어

사람들은 잊곤 한대 계속 빛을 내고 있으면

빛인 줄도 모른다고

외롭거나 누군가 그리운 날들이 오면

그제서야 가끔씩 별들을 바라본다고

환호 속에 반짝이는 커다란 폭죽보다

침묵으로 빚어진 외로운 빛일 뿐이야 별은

난 다시 하늘에서 내려오고 사람들은 날 보고 끝났다 하고

난 다시 재가 되어 땅에 내리고 사람들은 나를 밟고 떠나가고

별은 계속 하늘을 빛내겠지

폭죽은 흙이 돼 땅을 빛내겠지

하늘과 땅 그 사이에 머물던

우리들의 모습들을 바라보네 


1절의 가사를 보면, 폭죽의 이야기가 나온다. 폭죽은 하늘에서 밝게 터질 때의 사람들의 환호를 원하고 있다. 하늘 위로 날아올라 터질 때, 사람들이 쳐다봐 주고, 소리쳐 주고, 모든 관심을 받을 때의 그 위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 벅참이 좋아 그 자리에 계속해서 있고 싶어 한다. 그러나 폭죽은 결국 재가 되어 떨어진다. 폭죽일 때 환호하던 사람들은 재가 된 폭죽을 밝고 떠나간다.

 

폭죽은 평범한 우리 사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별, 즉 높은 곳에서 항상 밝게 빛나고 있는 존재가 좋다는 가치관, ‘지’만을 가지고 그 별이 되고 싶다는 ‘욕’을 가진다. 자신의 ‘욕’대로 실현되었을 때의 만족감을 동기로 하여 삶을 살아간다. 결국 자신이 ‘위’한 결과는 일회적으로 실현된 후 사라지지만, 또 다시 그 위치에 올라갈 자신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별과는 다른, 모두가 외면하고 알아주지 않는 위치로 떨어져 재(흙)이 되었을 때에는, 좌절하며 별을 동경한다. 1절에서의 폭죽은 ‘도’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이 공을 세웠을 때에도 그 공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바라며, 결국 그 긍정적인 반응을 바라고 공을 세우는 격이 된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는 ‘공을 이루고도 고요히 있으면 저절로 그 공이 높아진다’와 정반대되는 맥락이다. 또한 ‘도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과도 반대로, 폭죽은 낮은 곳에 위치하는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2절에서는 폭죽과 별의 대화내용이 나온다. 폭죽은 동경하던 별에게 부러움을 전한다. 그러나 별은 사람들은 계속된 빛에 대해서는 환호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아마 이 별이 sg워너비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별이야말로 도교에서 추구하는 ‘도’의 경지에 가까워진 존재이다. 사람들의 환호 여부에 관계없이 항상 침묵으로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위에 언급된 멤버들의 sns 글에도 나와 있듯, 그들은 언제나 뒤에서 묵묵히 노래하겠다고 약속한다. ‘무위무불위’처럼, 그저 자신들의 노래를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했을 뿐인데 그 노력이 빛을 다시 보게 된 경우이다. 가사 속의 별들도 평소에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화려한 존재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정말 힘든 상황이 닥치면, 결국 별을 찾게 되고 별로부터 힘을 얻는다. ‘침묵으로 빚어진 외로운 빛’, 이것이 별이자, sg워너비이자, ‘도’이다.


마지막 3절에서는 폭죽의 인식 전환이 나온다. 폭죽은 드디어 재가 된 자신의 모습도 인정한다. 그리고 별은 별대로, 폭죽은 폭죽대로 저마다의 역할이 있으며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빛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늘과 땅을 빛내며 세상이 이루어진다.

 

‘폭죽과 재’는 ‘곤과 붕’, ‘장자와 나비의 꿈’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게 된다. ‘소각’과 ‘대각’을 인식하고 결국 폭죽과 재는 같은 존재임을, 상호 변화된 관계임을 알게 된다. ‘물화’가 일어난 것이다. 둘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호변환, 순환한다. 결국 무엇이 우수한 존재이고, 미천한 존재이고 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따라서 폭죽은 더 이상 하늘에서 빛나는 자신의 모습만을 추구하지 않고, 땅에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곤과 붕이 둘 사이의 자기동일성을 인식하고, 붕이 다시 곤의 자리에 가서도 막힘없이 소통하는 것처럼, 나비와 장주가 세속적 세계와 참된 세계를 더 이상 혼돈하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것처럼, 폭죽과 재(흙)도 저마다의 역할을 철저하게 수행한다.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하늘에서만 빛을 내는 별보다도, 하늘의 영역과 땅의 영역을 모두 넘나들 수 있는 폭죽이, 하늘에서 빛을 내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다가도, 땅에서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는 발판을 묵묵히 만들어주는 폭죽의 모습이, sg워너비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김진호의 sns에 기재된 ‘폭죽과 별’ 곡 해석을 좀 더 들여다보면 더욱 더 그들의 가치관이 분명해진다. 아래는 김진호의 sns 글 일부분이다. ‘폭죽은 화려하게 터져 주목을 끌고 찰나의 기쁨을 주지만 소비된 이후 재가 되어 가라앉은 것들이 더 많아요. 그 재가 흙과 섞여 경이로운 것을 피어내기도 하지만 피어내는 마음을 갖기도 전에 스스로를 버려졌다 여기기도 합니다. 대중성은 합리화하기 좋은 말이에요. 그 말에 숨어 폭죽을 터뜨리고 재미와 웃음을 드리면 충분하다 포장하는 젠틀한 위선 속에 순수한 꿈을 쫒는 이들이 기회를 얻거나 후회를 얻고 누군가는 시청률과 화제성+꿈을 얻습니다. 다만, 재가 쌓여가는 땅을 인지하지 못하면 폭죽을 터뜨릴 땅조차 사라짐을 기억해야 한다고 늘 제 가슴은 울렁였어요. 제가 꿈꾸는 스타는 하늘에 있는 별이 아니라 땅에서 우리 걸음 견디며 길이 되어주는 흙과 모래입니다. 그 길 위를 같이 걷는 사람이란 별이 제가 꿈꾸는 스타입니다.’


필자는 스타의 삶을 살아 본적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린 적도 없지만, 또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 본 적도 없지만, 그들의 마음과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결과에만, 또 다수가 원하는 옳다는 ‘지’에만 자신을 맞추고 싶지 않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앞서 언급했던 긍정적인 ‘나’의 모습과 부정적인 ‘나’의 모습. 둘 중 절대적인 옳은 것이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이 ‘나’의 고유한 모습이기에 받아들이며 그러려니 살아가고 싶다.

 

 

[윤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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