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 로테/운수 [2편]

여성주의 시각으로 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운수 좋은 날>
글 입력 2021.11.08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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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과 이어집니다.

 

 

본 공연에는 스토킹 범죄와 가정폭력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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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운수>는 베르테르가 사랑했던 여인 ‘로테’와 김첨지의 아내 ‘운수’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각각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운수 좋은 날>에서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로, 남성 주인공의 관점에서 사랑이라고 해석되어 온 기존의 로맨스 서사를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해석된 연극에서는 스토킹을 당하는 와중에도 자기 삶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로테’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하고 법정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운수’가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여성이란 존재가 배제되고 스토킹과 가정폭력 등의 범죄가 미화되는 형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원작 『운수 좋은 날』


 

『운수 좋은 날』은 현진건의 단편소설로, 일제 강점기 시절 인력거꾼의 비애를 그린 현실 고발적 사실주의 소설이다. 가난한 하층민 인력거꾼으로 등장하는 김첨지의 하루 동안의 ‘운수 좋은 날’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궁핍상을 볼 수 있다. 열흘 동안 병들어 누워있는 아내를 두고 나가 일하는 참담한 처지에 놓여있는 김첨지에게 운수 좋은 날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붙여 가난한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했다.


김첨지의 ‘운수 좋은 날’에는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가난한 그에게 가장 필요한 돈을 벌게 된 순간 그의 아내가 죽었기 때문이다. 삼십 원이라는 고액의 돈을 벌었지만, 정작 돈을 사용할 아내가 사라졌다. 착각과 같은 행운 뒤에 아내의 죽음이라는 큰 불행이 있음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전개 부분의 비와 작품 중간에 나타나는 불안한 예감에서도 알 수 있다. 김첨지에게 장차 다가올 인물의 불행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한 예감은 실제로 ‘운수 나쁜 날’이라는 복선에 가까웠다.


따라서 『운수 좋은 날』은 식민지 기대의 궁핍한 하층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는 평을 받으며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비애를 토로한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김첨지의 시각으로 시대와 노동에 집중하여 근대 식민지인의 처절한 현실을 고발한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소설에서의 아이러니는 김첨지에게만 나타날까?


 

"이런 오라질 년, 주야장천(晝夜長川)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라는 소리와 함께 발길로 누운 이의 다리를 몹시 찼다. 그러나 발길에 채이는 건 사람의 살이 아니고 나무등걸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중략) 발로 차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남편은 아내의 머리맡으로 달려들어, 그야말로 까치집 같은 환자의 머리를 들어 흔들며,


"이년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 년!"

"……."

"으응, 이것 봐, 아무 말이 없네."

"……."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죽었나 버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 창이 검은 창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루 보지 못하고 천정만 보느냐, 응.”

 

- 『운수 좋은 날』, 책꽂이

 

 

우리는 김첨지의 아내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 ‘김첨지’라는 남편을 통해 소개되는 아내가 남편이 일하러 나갈 때 그를 붙잡으며 설렁탕이 먹고 싶다고 했다는 사실도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 아내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남성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인 반면, 김첨지는 그를 외면하고 밖으로 나가 돈을 벌고 친구와 술을 마시고 들어온다. 죽기 직전 먹고 싶다는 설렁탕을 사서 말이다.


소설의 아이러니는 김첨지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아내에게도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인용한 글에서 볼 수 있듯 자신에게 폭력을 행세하는 김첨지가 나간 날 죽었으며, 바로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설렁탕을 사 왔기 때문이다. 또한, 김첨지의 아내가 며칠을 앓고 있는 이유를 잘 살펴보면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첨지는 “병이란 놈에게 약을 주어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온다는 자기의 신조”대로 아픈 아내를 병원에 보내지 않는다. 돈이 없어서 약값을 내지 못했을 뿐 실제로 아내의 병을 악화시킨 것은 그의 신념이었다. 즉, 김첨지에게 시대적 울분과 비애를 만들어내기 위한 서사적 도구로서의 아내가 소설의 주인공인 남편에 의해 죽은 것이다.


연극에서는 당시 남성이 가진 우월성을 이상적 가치로 여기며 권위주의적으로 여성을 폄하하고 폭력적으로 지배하려는 김첨지를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편으로 그려내었다. 또한, 원작에서 김첨지의 아내로 있던 그에게는 ‘운수’라는 이름을 주고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등장시켰다.

 

 

 

“나는 살인을 한 게 아니에요. 살기 위해 나를 지킨 거지”


 

연두색 죄수복을 입은 두 명의 운수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한 죄로 기소된 운수는 무대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판사, 검사, 변호사의 질문을 차례로 받으며 답한다. 또 다른 운수는 물음에 착실히 대답하는 운수에게 고래고래 소리치고 하얀 벽에 검은 먹으로 글씨를 쓴다. “이년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 년!” 김첨지가 아내에게 고함을 치듯 말이다.


지속된 가정폭력으로 불안정한 그녀의 내면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판장에 서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운수가 그동안 겪은 일에 비해 충분히 말하지 못하는 모습에 한심해서 목소리를 곤두세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원작을 떠올려보면 김첨지의 노기 어린 폭언이 내면화되어 가정폭력으로 온전치 못한 사고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오랜 폭력으로 깊이 자리 잡은 남편이 또다른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녀를 위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한 모호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체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의 운수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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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인을 한 게 아니에요. 살기 위해 나를 지킨 거지.” 운수는 가정폭력을 당하고 몇 차례 신고하기도 했으나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 로테가 스토킹을 당해도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답했던 것처럼 운수에게도 가정의 일이라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다시 돌아간다. 운수는 이제 신고하지 않았다. 살인 당일에도 남편에게 맞아 누워있었다. 병원에 가지 않은 이유는 남편이 병원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며칠을 앓으며 누워있었는데 술에 취한 남편이 설렁탕을 사 들고 온 것이다. 그리고 그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을 때 운수는 설렁탕 그릇으로 남편의 머리를 내려쳤다. 지금이 아니면 자신을 죽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검사는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 신뢰성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교묘히 바꿔가면서 운수의 말을 확인한다. 운수가 살기 위해 저지른 살인에 증명할 자료를 내놓으라고 말이다. 또,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운수에게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의혹을 제기한다.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는지, 폭력을 당했음에도 어째서 그동안 이혼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말을 해, 말을!” 운수의 내면이 소리치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는 공간에서 그녀의 말은 사라져버렸다.


판사는 반항할 의지를 잃은 남편을 몇 번이나 뚝배기로 가격한 운수의 잔혹성을 거론하며 심신미약으로 보지 않고 형벌을 내린다. 운수 좋은 날이었다.

 

 

 

그는 사랑을 했을까요?


 

<로테/운수>에서 운수의 이야기는 가정폭력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작에서 ‘비애’란 말로 포장된 김첨지의 행동을 가정폭력으로 드러내었다. 연극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회 구조와 관습의 체계를 체화하여 그대로 보여주는 김첨지에게 고통받던 아내, 운수에게 이름을 붙이고 무대 위로 올렸다. 원작과 다르게 그녀를 가해자로 내세우며 역설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한 남자가 아내의 뺨을 때리고 울먹였다면, 그것을 아내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첨지가 아무리 아내를 사랑했다고 말하더라도 그가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서 남성 우월적 가치를 지향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첨지는 권위적인 주체로 아내를 폄하하고 억압했으며 상하 주종의 지배적인 복종의 관계로 여겼다. 자신의 부속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분에 따라 학대하고 외면했다가 다시 애정을 보이며 사랑이라는 말로 덮으려 했다. 철저한 위계관계 아래에서 아내는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남성의 타자로서 자리했다. 그 때문에 아내는 소설과 동떨어진 채 서사적 도구로 표류하게 되었다. 그런 아내에게 설렁탕을 사 온 김첨지가 느낀 감정을 비애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의 폭력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고 아내가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하는 말과 같다. 그가 진정 사랑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운수 또한 마찬가지이다. 계속된 가정폭력으로 온전한 사고를 하지 못한 채 남편의 행동을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 스스로도 사랑을 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데 자신을 세뇌하고 있다. 이는 그의 또다른 내면에서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과연 그는 사랑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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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운수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만약의 상황들은 암담하기까지 하다. 운수의 행동이 정당방위라고 입증할 자료를 내놓으라고 독촉하는 말에서 운수가 범죄 예방을 미리 하지 않았다는 질책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설령 운수가 가정폭력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살인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몰아세운다. 그런데 운수가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더라면 살인까지 하지 않았더라면, 운수는 살아 있었을까?


가정폭력으로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이는 운수에게 심신미약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만약 살인을 저지른 이가 남편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술에 취해 들어와 아내를 죽였으니 심신미약으로 보았을까? 그래도 가정폭력을 했던 전적이 있으니 더한 형량을 받았을까? 아니면 그 와중에 아내를 생각해서 설렁탕을 사 왔다고 보고 우발적 범죄 행위로 여겼을까? 연속적으로 떠오르는 질문들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원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운수 좋은 날』에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스토킹과 가정폭력 문제를 조명하여 <로테/운수>가 처음에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두 개의 원작을 배울 때 무의식적으로 남성중심적인 시각으로 해석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소설의 주제, 시대적 배경, 인물의 감정을 외우느라 그 틀이 이제껏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무비판적으로 그렇게 해석한 것을 그동안 당연하다고 수용했다.


연극을 보고 단일한 시각이 주는 불편함에 거북했으며, 묻혀있던 질문들이 너무 많이 떠올랐다. 남성중심적인 작품에서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세계의 외부에 있는 여성은 남성의 타자로 주체성을 갖는 데 실패하고 좌절했다. 더 나아가 이는 고정된 여성성뿐만 아니라 남성성까지 만들어내어 모두에게 억압적이고 잘못된 역할을 강요했다.


본 연극은 여성도 그 세계에서 살아 숨 쉬고 감정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원작을 현대에 맞게 각색하여 현재 벌어지는 사건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한 번 트인 시각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독점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왜곡된 시선에서 벗어나 주체적 인격체 형성을 위해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는, 그들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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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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