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세상이 무너졌을 때

글 입력 2021.08.2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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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런 그가 밥을 먹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나 요즘 우울해.”

 

이유를 물으니 지원한 기업에 1차부터 떨어졌다고 했다. 역시 안 되는 걸까. 그의 얼굴에서 씁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런 그에게 담담히 위로를 건넸다. 어차피 네가 원하는 부서는 이번엔 뽑지도 않았다며. 하반기는 뽑는 인원도 적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 말을 듣던 J는 멋쩍게 웃었다. 다음 주말에 선배 누나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 누나도 이번에 취직에 실패했다고 했다. 그래서 같이 술을 마시며 쓰린 속을 달래 볼 작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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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차 소방서에서 일할 때였다. 여자친구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준생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1차와 2차를 모두 어찌어찌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3차 면접을 보고 난 며칠 뒤였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도 없는 옥상으로 올라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에도 결국 떨어졌던 모양이었다. 한참을 가만히 울기만 하던 그녀가 메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건넬 수 있는, 가급적 따뜻한 말들을 서둘러 찾았다. 나라에 매인 몸이라 당장에 곁으로 달려가 달래 줄 순 없었지만, 적어도 힘내라는 위로라도 건네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가족을 떠올렸다. 이른 아침의 출동이었다. 구급대원 반장님과 함께 신고 현장에 도착했을 땐 반나체의 젊은 남자가 소파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동공은 풀렸고, 근육은 경직되어 있었다. 우연히 붙잡은 다리는 마치 냉동육처럼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호흡과 맥박도 없었다. 들고 온 AED가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갑작스레 남편의 죽음을 마주한 아내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함께 맥주를 마시고 내일을 이야기했던 사람이 아침이 되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발견된 것이다. TV를 마저 더 보다가 들어가 자겠다는 남편의 말은 그대로 그의 유언이 되어버렸다.

 

미스터리한 죽음에 함께 출동한 경찰은 우리에게 형사들이 올 테니 현장 보존을 위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그들의 안내를 받아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그의 장모가 맨발로 뛰어나와 우리 앞에 무릎을 꿇더니 빌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소리쳤다. 아직 심장은 따뜻하다고, 잘하면 살아날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제발 좀 아무 조치라도 좋으니까 취해만 달라고.

 

때아닌 소란에 동네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구급대원 반장님은 안타까운 눈길로 두 사람을 일으키며 그들을 달랬다. 그 모습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비참했고 미안했다. 그리고 그날의 풍경을 시간이 많이 흐른 오늘에도 나는 이따금씩 떠올린다. 그들의 목소리는 그대로 남아 마음속 무거운 짐이 되었다. 종종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남겨진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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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무너져 버릴 때가 있다. 어제까지 내가 알고 지낸 세상은 폐허가 되어 버리고, 숨을 쉴 때마다 따가운 공기는 폐를 찔러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걸 다른 말로 우리는 ‘절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나는 종종 만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주했거나, 불행한 사고로 평범한 일상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을.

 

꼭 소방서에서만 그런 사람들을 만났던 건 아니다. 취업에 실패한 나의 연인이나 내 친구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취준생을 서럽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또다시 연장된 백수생활?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아니. 그 질문의 대답을 나는 여자친구가 했던 말에서 찾았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취업을 위한 글쓰기’란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교수님은 잘 뽑히는 자소서의 기준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 기업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많은 자소서들이 분류되는지를 알려주셨다. 그 수많은 서류들이 어떻게 통과와 보류와 탈락으로 갈리게 되는지를 들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일종의 이질감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이 그렇게 몇 분 만에 평가되어 합격과 불합격으로 갈리는 현실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 비록 결과에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과정이 지닌 가치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무시할 수가 없다. 하지만 경쟁사회 안에서는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그러니 취준생을 서럽게 만드는 건 초라한 나의 처지와 타인의 시선 같은 게 아니라,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자부했던 나의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평가되어버린다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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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늘 궁금했다. 슬퍼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무너져버린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단순히 ‘힘내’, ‘잘 될 거야’ 같은 그런 상투적인 말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말들을 말이다. 물론 거기에는 개인적인 차원의 방법과 구조적인 차원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어떤 문제의 경우엔 구조를 뒤집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아파하는 사람에게 구조를 탓하며 그것이 해결되기를 기다리자 하는 것은 너무 지난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부분은 개인적인 차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 두었으면 좋겠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그 위로가 힘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을 염두 했으면 좋겠다.

 

그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도 무너진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나의 생각을 말할 뿐이다. 대학교 2학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이 끝나고 슬픔에 잠긴 우리는 어두운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우셨다. 사흘 내내 흘렸던 눈물에 진이 빠지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부엌으로 들어가 요리사를 자청하셨다. 동생은 청소기를 돌렸고, 나는 걸레질을 했다. 닫힌 안방 문을 바라보면서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겨 내실 수 있을까. 어머니를 여읜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걱정했다. 당장에 내일부터 닥치게 될 새로운 세상에서 어머니는 그 슬픔을 묵묵히 이겨 내실 수 있을지를.

 

그러나 그건 나의 기우였다.

 

다음 날이 되자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구마를 삶았다. 빵을 구워 토스트를 만들었고, 버터를 발라 나와 동생에게 건넸다. 그러고 나서는 어머니는 빨래를 삶았다. 세탁기도 돌렸다. 하도 이불을 안 빨았더니 퀴퀴한 냄새가 난다는 불평도 하셨다. 점심을 챙겨 먹은 다음에는 아버지와 시장에 장을 보러 가셨다. 저녁엔 영화관에 가서 다 같이 영화도 보았다. 다음날엔 평소처럼 출근을 준비하셨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군인이 된 나는 휴가를 나와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할머니를 모신 납골당에 갔다. 내게는 장례식 이후 첫 방문이었다. 부모님과 동생은 그 사이에 몇 번을 다녀온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 앞에서 나는 손을 모으고 가만히 서 있었다. 1년 전 이맘때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울먹이며, '다음에 또 올게요, 엄마'라는 그 말. 하지만 오늘의 어머니는 온화한 미소로, 무릎을 굽혀 가만히 사진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떠올린 건 어떤 안도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어머니는 강했고, 또 담담하게 남겨진 슬픔을 이고 가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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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엔가 우연히 당신이 무인도에 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마치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선택지는 아마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버티거나, 절망에 빠진 채 가만히 앉아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거나.

 

만약 당신이 후자가 아니라 전자를 택했다면 당신에겐 곧바로 수행해야 할 과제들이 들이닥친다. 우선 불을 피워야 한다. 추위와 야생의 위협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불은 생존의 필수 요소다. 그다음엔 잠잘 곳을 해결해야 한다. 적당한 장소를 구했다면, 다음은 먹을 것을 구할 차례다. 사냥을 해도 좋고, 채집을 해도 좋다. 중요한 건 당신이 굶어 죽지 않도록 꾸준하게 모자라지 않을 양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겠지만 불행하게도 당신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구조를 위한 준비도 해야 한다. 비행기가 지나갈 것을 대비해 SOS 글자를 크게 만들어야 하고, 배가 지나가는 것을 대비해 깃발처럼 신호를 보낼 물건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직접 섬을 탈출할 수단인 뗏목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한바탕 이것저것 쓰고 나니 차라리 죽음을 기다리는 게 속 편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산다는 게 바로 그런 거다. 원래 성가시고 귀찮은 일들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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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세상 속을 살아가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취직에 실패했던, 누군가와 이별을 했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든, 불행한 사고를 당했든 간에 무너진 세상을 살아가는 첫 번째 방법은 우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깨끗하게 씻고, 든든하게 밥을 챙겨 먹는 것이다. 어질러진 집을 치우고, 밀린 빨래를 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또다시 밥때가 찾아올 것이다. 그럼 또 당신을 위해서 요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뒤처리를 해야 한다. 그 다음 끼니를 위해 장을 보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자잘한 일들을 끊임없이 해내야 한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다. 살아갈 이유가 없을 때 인간은 죽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실은 그 반대다. 인간은 오히려 이유가 있어서 죽는다. 늙거나 병에 걸려서, 사고를 당해서 등등. 사는 데에는 오히려 이유가 없다.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다.

 

울고 있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네게 필요한 건 '내가 왜 떨어졌을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네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싶으면 자는 거라고. 슬프면 실컷 우는 것도 괜찮다고. 중요한 건 쉴 새 없이 그 일들을 계속 해내는 것이라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 있을 것이고, 한 달이 지나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상처받았다는 사실도 무뎌질 거라고. 그 말이 그녀에게 힘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웃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내게 울며 통화를 걸던 그녀는 몇 개월 후 그토록 가고 싶었던 회사에 들어갔다. 내게 고민을 털어놓던 J도 얼마 후 어느 문화재단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물론 이후에 그들의 삶이 완전히 평안해졌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만큼은 안심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깨닫고 배운 것들이 말로만 그치는 위로는 아니었다는 걸. 이번엔 그 위로가 다시 출발점에 선 나를 도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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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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