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예술로 산책] #3. 여름의 끝자락에 떠난 밤 산책, 보라매공원

제법 선선한 밤, 오늘 공원으로 산책 어때요?
글 입력 2021.08.2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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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예술로 산책》은 매달 격주로 기고되는 예술 에세이입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좋았던 일상 속 예술 조각 또는 흔적을 보고 느끼며 열렬히 사유한 것들을 지극히 사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합니다.

 

*감상 포인트: 계획된 산책로는 없습니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습니다. 뜬금없이 걷기 시작할 수도,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도중에 지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이제 여름도 한풀 꺾이고 가을 장맛비에 젖어들었다. 바람도 불고 제법 선선하다.

 

개인적으로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중충한 하늘, 축 가라앉은 무겁고 습한 분위기 때문에 나까지 우울해지기 때문. 다만 한 가지 좋아하는 건 있다. 비가 내리고 난 후 특유의 풋풋한 풀 냄새와 물에 젖은 땅에서 올라오는 짙은 흙냄새. 특히 여름비가 내린 후에만 맡아볼 수 있는 냄새라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신기하게도 이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기나긴 작업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집 주변 공원 산책을 나섰다. 밤 산책은 정말 오랜만이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마스크 안으로 후욱 스며오는 무겁고 습한 공기. 여전히 적응하기 어렵다.

 

쓰읍- 하-마스크 안에서 아주 천천히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아가미로 숨쉬기 운동을 하듯 입으로 작게 뻐끔뻐끔 거렸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 보니 차츰 여름밤 공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부유하는 물고기가 되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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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라 그런지 희끗한 구름의 형체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또렷하진 않지만 흐릿한 대로 제법 분위기가 있다. 습습한 공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젖어 있는 상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비에 잠겨있는 듯 고요하고 차분하다.

 

뚜벅뚜벅.


*

 

Episode #3. 암흑 속 고요한 밤 산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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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공군사관학교 (현 보라매공원)
 

 

보라매공원은 옛 공군사관학교 대방동 캠퍼스 자리였다. 1985년 공군사관학교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그해 12월 20일부터 보수를 진행하였고, 1년 후 5월 5일에 공원의 형태로 개원하게 된다. ‘보라매’라는 이름은 공군사관학교의 상징인 ‘보라매’를 이어 받아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는 서울 서남권을 대표하는 공원이자, 각종 휴식, 운동, 문화 공간 시설을 갖춘 12만 평의 공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무엇보다 집으로부터 7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드넓은 공원이 있다는 건, 참 행운이다.

 

 

사실 나에게 보라매공원은 일반적인 동네 공원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어렸을 적 사생대회부터 백일장, 단거리 달리기, 졸업 사진 등 여러 축제와 이벤트를 이곳에서 다 치렀으니 말이다. 그만큼 이곳에는 유년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과 감정이 서려있다.

 

시간이 흘러 요즘에는 이곳을 자주 걷는다. 아주 가끔은 그 시절 내가 있던 자리에서 하던 행동과 말들이 한데 섞여 마치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여러모로 많은 복합적인 장면과 감정으로 기억되는 이곳. 신기하게도 들를 때마다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감정을 겪고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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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목이다. 공원 입구까지 최대 5분 거리. 이 길을 따라 벽이 쭉 세워져 있다. 원래 이곳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들어선 이곳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흰색으로 깔끔히 색칠된 벽. 그 위에는 삶과 관련된 짧은 메시지와 함께 각각 다른 모양의 조명들이 걸려있었다.

 

'내가 너의 별이 되어줄게'

 

마치 한강 다리 위에 있는 조명 같은 감성이었다. 밤의 감성으로 바라본 조명은 약간의 오글거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어두운 길을 환하게 비추는 역할은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 걸어가는 내내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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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말 벽화 길

 

 

사실 이 거리는 불과 4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낡고 어두웠다. 어떤 곳의 그림은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져 있었고,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에도 세상의 풍파를 다 겪어낸 듯 모든 먼지와 묵은 때가 끼어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아름다웠을 벽화. 그때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새로 벽화를 그려내면 참 예쁠 텐데'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이 벽화가 말해준다. 그리고 지금 이 벽을 흰색으로 칠했다는 것은 어쩌면 좋은 신호일지도 모른다.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니까. 다음에 방문했을 때는 이 흰 도화지에 무엇이 그려지고 걸려있을지 기대된다.

 

입구를 지나쳐 쭉 걷다보면 보라매공원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연못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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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조각 01 시원한 물줄기를 음악과 함께, 음악 분수


  

이 연못에는 특별한 비밀이 하나 있다. 원래 공군사관생도들이 조국의 영공을 지킨다는 의미로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만들었는데, 공원으로 재개장하면서 음악 분수로 바뀌었다고 한다. 12시, 17시, 19시, 20시만 되면 연못의 물이 여느 때보다 활기를 갖고 꿈틀거리기 시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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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튜브 [랜선공원산책] 보라매공원의 여름ㅣ서울의 공원 캡쳐본

 

 

음악 분수는 말 그대로 음악에 맞춰 춤추는 분수를 말한다. 매년 5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운영되며, 음악의 장르는 클래식, 가요, 트로트 등 폭넓은 세대를 아우를 정도로 다양하다. 이 점이 바로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어린아이들까지 너도 나도 음악 분수가 있는 주위로 모여들어 즐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이 음악 분수가 특별한 이유는, 시원한 물줄기의 움직임에 있다. 물줄기는 어디서 튀어나올 줄 모르는 채로 그저 음악의 리듬에 맞춰 작게 튀어 올랐다 극적으로 크게 솟아오르기를 반복한다. 정신없이 휘날리는 물줄기의 움직임에 몰두하여 복잡한 생각을 멈출 수 있다는 점이 참 매력적이다.

 

한 노래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지켜보다 보면 어떤 날에는 역동적인 물줄기가 속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다가도, 어떤 날에는 아래로 쳐지는 물줄기가 유독 눈에 띌 때도 있다. 그날의 기분대로 음악 분수가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느껴진다. 매일 봐도 지겹지 않을 장면이다.

 

특별 이벤트인 만큼 매일 12시, 17시, 19시, 20시 총 4회에 걸쳐 가동하는데, 특히 19시와 20시 야간에는 조명을 점등하여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낮에는 시원한 물줄기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집중해서 관찰하는 데에, 밤에는 휘황찬란한 불빛과 함께 즐겨보는 데에 매력이 있다.

 

다만, 우천 시에는 자동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내가 들른 날에도 며칠간 비가 계속해서 내리던 탓에 당분간 운영이 중지되었다. 그래서인지 어두운 공원이 빛 하나 없이 더욱 짙은 암흑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게 또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몇 분간 암흑 속에 빠져들어갈 듯 멍을 때렸다. 두 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암흑 속을 계속 헤엄치고 있었다. 그 뒤로 잔잔한 음악이 들려왔다.

 


  

예술 조각 02 당신의 밤길 고막을 책임질 노래



들리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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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 유일한 불빛, 가로등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 매달려있는 검은 스피커. 그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피아노의 선율. 마음에 들었다.

 

어떤 곡인지 알고 싶어 '음성 인식 기능'을 써 보았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많은 소리들이 겹쳐서인지 잘 인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연의 소리와 제법 잘 어울리는 듯했다.

 

바람 부는 소리, 바람결에 따라 잎들이 부딪치며 사각거리는 소리, 귀뚜라미가 우는소리,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소곤거리는 소리 등. 주변에서 다양하게도 사근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분명히 낮에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었다.

 

눈을 감고 듣고만 있어도 마음의 평안을 주는 느낌이다. 아래에서 이 곡이 끝날 때까지 벤치에 앉아 계속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뚜벅뚜벅. 계속 걸었다. 그러다 다다른 계단. 이제껏 굳이 올라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이번에는 한번?' 그 짧은 호기심과 동시에 이미 난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예술 조각 03 공원에 비행기가 있는 이유, 에어파크



공원의 또 다른 입구 끝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밤에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내비치는 거대한 물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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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다. 보라매공원은 옛 공군사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기억하기 위해 일명 '에어파크'를 세웠다. 사실 모형이지만 실제로 보면 사진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

 

'에어파크'에는 비행기 8대의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수송기 1개, 훈련기 2개, 헬기 1개, 통제기 1개, 전투기 3개가 설치되어 있다. 각각의 시설물 주위로는 많은 조명들이 있었다. 밤에도 둘러볼 수 있도록 고려한 장치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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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F-86F 전투기/ (오른쪽) C-123K 수송기

 

 

각각 비행기들 앞에는 표지판이 세워져있다. 어느 회사에서 생산되었고, 언제 최초로 비행했고, 어떤 목적으로 투입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게다가 해당 비행기의 길이, 폭, 무게, 최대 속도, 최대무장, 행동반경까지 꽤나 구체적인 정보들이 쓰여있다.

 

6·25전쟁 당시 긴급 투입되어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전투기부터 월남전에서 맹활약한 수송기까지 너도 나도 각자의 임무를 마치고 퇴역한 사연이 있는 비행기들이었다.

 

새삼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2007년에 세워진 공간이니 이제껏 산책하는 동안 한 번쯤 봤을 법도 한데, 거대한 비행기 머리조차 보지 못했다는 게 조금 충격적이었다. 이내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리고 또 몇 분을 걸었을까. 정말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암흑 속에서 오로지 감각만 치켜세운 채로.

 

*

 

더 보기) 산책자의 시크릿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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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밤에 보이는 게 있을까. 어두컴컴한 밤, 스스로 자처한 발걸음에 막연한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암흑 속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일상 속에서 지나쳤던 주변의 사근거리는 소리와 여름비에 스며든 풋풋한 풀 냄새와 땅 냄새. 눈으로 보이는 것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바람을 타고 귀로 흘러들어온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고, 코로 스며들어온 냄새에 편안해질 수 있었다. 짙은 암흑 속에서 고요하고 잔잔하게 사색에 젖어들 수 있는 이 순간, 바로 밤 산책의 매력이다.

 

- 2021.08.25 산책자의 기록

 

 

당신은 오늘 어떤 예술 조각을 마주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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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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