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서 최선은 - 이방인 [도서]

'이방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글 입력 2021.08.1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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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을 볼 때는 그래서 조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정말 악한 목적의 거짓말을 제외하고). 내 것이 아닌 상황과 감정들을 내 것인 양 말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수의 거짓들이 있었을지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거짓을 지어낼 필요가 없는 삶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중략)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애쓰지 않아도 자신이 ‘평범’의 기준에 들어맞을 수 있는 세상.
 


송세희 에디터의 2021년 6월 18일 자 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 요나단의 목소리’에 등장하는 단락이다. 거짓말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꿈틀거리는 본능은 여건만 되면 거짓을 입 밖으로 쏟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심지어 어린아이조차도, 무기력하게 진실을 말하기보다 일단 순간을 모면하고 보자며 거짓을 선택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별할 때 그 사람의 발언을 적잖이 참고한다. 만약 상대가 우리에게 알려준 자신에 관한 정보가 대부분 거짓이라면, 객관적이냐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그를 그냥 잘못 아는 것이다.


하지만 알 길은 전혀 없지 않은가? A와 B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100% 사실만 포함되어 기술할 수 있는 C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사실’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위험하고,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사건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 때문에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A와 B에게 각각 변호할 기회를 주고, 사회적 합의에 제일 들어맞는 결정을 내리는 판사에게 판단을 맡겨야 한다. 그리고 판사는 말이 언제나 거짓이 포함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설명력이 강한 객관적 증거를 종합하여 결론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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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에서 변호할 권리, 판결에 수반되는 책임은 필수 불가결하다. 그러나 잘 설계된 시스템이라도 빈틈은 있는 법. 분명 죄를 저질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반성 없이 조금이라도 형을 깎아보려는 파렴치한 사람도 너무 자주 봤기에, 필자는 이제 좀 질린다. 언론에 보도되는 재판의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A와 B 사이에 일어난 일을 그렇다면 C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여기,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마치 제삼자의 재판을 보듯 관조적인 태도로 임하는 한 남자가 있다. 형량을 깎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사건 이전의 행적 때문에 ‘악마’로 몰리고 있음에도, 그럴싸한 인과 관계를 통해 조금이라도 노력해보자는 변호사의 제안도 깔끔히 무시한다. 결국 어떠한 변도 하지 않은 채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죗값을 치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제정신이 아닌 걸까?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등장하는 주인공 뫼르소의 이야기이다.

 

 


평범과 특별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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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문학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제목, 작가, 그리고 이 문장은 들어봤을 정도로 익숙할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니, 어떻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짜도 정확히 모르지? 이상한 느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주인데도 슬픈 기색이 없고, 식이 끝난 후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시쳇말로 ‘썸을 타던’ 여자 마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수영을 즐긴다.


친구의 초대로 뫼르소와, 그와 친구가 된 이웃집 남자 레몽은 해변의 별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해변을 거닐던 셋은 자신들을 미행하던 아랍인 일행과 마주치고, 레몽의 전 여자친구의 오빠가 포함된 그들과 싸움이 붙는다. 상황이 종료되어 별장으로 돌아온 뫼르소는 갑갑함을 느끼고 물을 마시기 위해 샘물 가로 향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뫼르소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소설마저 미적지근하게 느껴질 정도다. 주인공은 승진하여 파리 본사로 파견되는 것과 지금 여기에서 계속 근무하는 것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레몽과 친구가 될 때도 ‘친구가 되든 안 되든 상관없다’는 입장이었고, 결혼하자는 마리의 고백에 ‘결혼을 하자니까 하겠다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는 모호한 답만 한다. 삶 전반에 대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략) 그러자 마리는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해 보는 듯했으나,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길이 없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의문점이 드는 순간, 이야기에 일대 파란이 인다. 뫼르소가 아랍인 중 한 명에게 총 다섯 발을 쏜다. 무난하게 흘러갔던 근 며칠이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부조리를 거부한다



곧바로 감옥에 갇힌 주인공의 법정 싸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뫼르소는 상술하였듯 자기변호를 일절 하지 않는다. 사건에 집중하기보다 과거 행적과 연관 지으려는 검사를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변론이 오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마 내 범죄에 대해서보다도 나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조심을 하기는 하면서도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견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있어요, 그래야 일이 잘됩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과거 행적마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매정함’, ‘어머니의 죽음 뒤에 여자와 놀고 코미디 영화를 보는 소시오패스’로 둔갑하지만, 그는 사형 판결을 받고 서른에 죽나, 늙어서 예순 넘어서 죽는 것은 하등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사형이 선고된다. 그런데도 뫼르소는, 판사가 뭔데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라는 모호한 개념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지 시큰둥해할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음표만을 자아내는 뫼르소. 그에게 사제가 면회를 온다. “나는 당신 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마음의 눈이 멀어서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겠습니다”라며 자신을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제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뫼르소는 폭발해버리고 만다.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중략)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다. 세상엔 특권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서 최선은


 

필자가 참여하는 온라인 북클럽 모임에서는 수수께끼 일색인 ‘이방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기독교적 색채가 짙었던 당시 사회에서 뫼르소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죽음을 해방의 일종으로 생각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재판에서 검사의 스토리텔링에 따라 결정되고 마는 부조리한 판단을 보여주고 싶었다’ 등...

 

이 소설은 법원에서 주인공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형국(부조리)에 맞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저항) 익숙한 포맷에서 벗어났다. 법원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등장하는 모든 가식과 허위(부조리)에, ‘이방인’과 같은 자세로 임하는(저항) 뫼르소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뫼르소는 왜 ‘이방인’이 되었을까? 사회적 맥락 때문에? 의욕이 없어서? 원래 성격이 그래서? 나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짜증이 왈칵 솟아올라서? 확실히 답을 내리기 어렵기에 읽은 사람 각자가 추측할 뿐이다. 다만 이 소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뫼르소는 ‘이방인’이 되기로 ‘선택했고’, 그 선택에 ‘행복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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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잣대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것이 곧 부조리함에 대한 반항이다. 선택의 연속인 인생, 최선의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다. 뫼르소는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신념을 가지고 있음에 해방감을 느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사형수인, 가장 불행한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라는 아이러니를 통해, 결국 카뮈는 비극적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비추어 선택투성이인 삶을 더 찬란하게 살자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방인’처럼 생각하면 뫼르소처럼 사형을 선고받는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말이다.


100쪽을 살짝 넘기는, 짤막한 소설은 쉬운 문장 뒤에 깊은 성찰을 함유한 채로, 소설보다 긴 비평과 논문을 쏟아내게 하며 몇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독자의 느낌이 어떤지 물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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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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