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논란의 중심에 선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 [공연]

글 입력 2021.06.3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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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이 아닌 공연을 둘러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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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이 6월 15일부터 20일까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무대에 올렸다. 가장 최근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공연은 2018년이었으므로 3년 만에 올린 공연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제11회 대한민국 발레 축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한 작품이다. 하지만 공연이 무대에 올라가기 전부터 잡음이 있었다.
 
논란을 크게 정리하면 두 가지이다. 우선은 <말괄량이 길들이기> 공연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시대적 서사와 장애인 비하의 연출이었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왈가닥 카타리나와 그녀를 현모양처로 길들이려는 남편 페트루키오’의 이야기가 중심 스토리이다.
 
여기까지 들어도 뭔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아내를 길들이겠다고 밥을 굶기고, 사람을 써서 위협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의 모습에 있다. 사실 페트루키오라는 남자는 원래 돈도 없고 술집 작부들과 난잡하게 노는 한량으로 공연 초반부에 묘사된다. 본인이 결혼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데 아내에게는 가정에 충실한 현숙한 모습을 강조하고 요구한다는 사실이 모순적인 작태다.
 
이런 문제적 서사 속에서 또 논란이 있었으니, 페트루키오가 사람을 시켜 카타리나를 위협할 때 뇌성마비나 뇌 병변 환자 등 지체 장애인의 행동을 과장되게 흉내 내는 장면이었다. 2분 남짓한 이 장면은 사실 원작에는 없지만 존 크랭코가 재미를 위해 삽입한 장면이다. (어디서 재미를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공연 전, 내용 전개에 반드시 필요한 장면도 아닌 장애인을 희화화하는 장면에 대한 공론화가 있었고, 결국 국립발레단 측은 존 크랭코 재단의 허락을 받아 문제의 장면을 수정하여 무대를 올리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까지가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일이다.
 
 

2. 16세기에 쓰인 작품을 21세기에 본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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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말괄량이 길들이기> 공연을 봤을 때 불편함을 느껴서 올해는 처음부터 티켓팅을 하지 않았지만, 안무 수정이 있었다길래 늦게 자리를 잡아 공연을 관람하고 왔다. 신승원 발레리나의 카타리나, 이재우 발레리노의 페트루키오, 박예은 발레리나의 비앙카, 허서명 발레리노의 루첸시오 연기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평소 좋아하던 무용수들의 연기라 더욱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레 무대 자체를 편하게 즐길 수는 없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2막으로 구성된 전막 발레다. 1막은 왈가닥 카타리나와 여동생인 요조숙녀 비앙카의 반대 성격 묘사, 술에 취해 작부들에게 돈이 털려 빈털터리가 된 페트루키오가 상속에 대한 욕심으로 카타리나에게 청혼하고, 그녀와의 결혼에 골인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2막에서는 페트루키오의 집으로 향하는 여정과, 집에서 아내에게 음식을 주지 않고 굶기는 문제의 장면이 있다. 또 이때 사람을 시켜 카타리나를 겁주는 장면에서는 기존의 지체 장애인을 희화화 묘사가 동물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바뀌었다. 춥고 배고픈 카타리나는 결국 페트루키오에게 항복하고, 둘은 화해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둘은 비앙카의 결혼식에 가는데, 여기에서 반전이 있다. 남편들이 아내들을 부르는데 카타리나만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페트루키오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요조숙녀인 줄 알았던 비앙카가 남편 루첸시오를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를 훈계하는 것도 카타리나다. 그렇게 공연이 마무리된다.
 
공연이 끝나고 국립발레단 프로그램북에 실린 공연 칼럼니스트의 에세이를 읽었다. 에세이는 16세기에 쓰인 『말괄량이 길들이기』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있었던 후대의 비판들을 짚어주었다. 이미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았던 존 플레처가 원작 발표 근 20년 후에 『여성의 승리, 길들이던 자 길들이기(The Woman’s prize, or the Tamer Tamed)』라는 작품으로 패러디했고, 1897년 조지 버나드 쇼는 원작에 대해 “점잖은 취향을 지닌 사람이라면 여자와 함께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작품”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고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다양한 해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해석으로 셰익스피어는 이 원작에서 ‘극중극’이라는 장치를 사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을 통해 당대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 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원작에 국한되는 해명일 뿐이다.
 
원작을 기반으로 한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에는 ‘극중극’의 장치가 없다. 따라서 ‘발레’공연에서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거나 풍자하거나 전복하려는 일말의 단초도 찾아 볼 수 없고, 그저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당시를 그대로 무대 위에 올려놓은 가부장제의 ‘재현’일뿐이다. 공연 제목과 시놉시스를 읽고 전근대적 작품이 아닐까 했던 의심은 공연을 보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쩌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긴 하는 원작보다 더 확실한 여성비하와 가부장제라는 봉건적 폐습으로 닫혀있는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21세기에 여전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되고 있는 게 아닐까?
 
 
 
3. 여전히 남은 의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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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고 나서 프로그램북까지 정독하고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구시대적 폐습을 답습한 작품이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의문이 생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공연을 수정할 것인가? 하지만 이 공연은 중심 서사 자체가 시대 역행적인데 이것을 어떻게 대대적으로 수정할 수 있을까? 고전 자체가 수정이 불가능하다면 시대의 가치관에 뒤떨어지는 작품들이 관객의 외면을 받아 도태되는 것은 필연적인 흐름이 아닌가? 공연장에 있었던 어린이들에게 현시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악습이 내재된 작품을 물려주며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 옳은가? 이러한 질문들은 문화예술의 관점에서 계속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다.
 
또 하나 남은 질문은 왜 국립발레단은 제11회 대한민국 발레축제의 개막작으로 하필 이 논란이 많은 작품을 선택했냐는 것이다. 발레 레퍼토리 중에서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유명한 것도 아니고, 긍정적 교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 작품을 선택한 저의가 궁금하다.
 
대한민국 발레축제를 통해 대중화 전략을 꾀하여 관객층의 저변 확대를 하는 것도 중요한 개최 목적일 터인데, 이 공연을 보고 그 누가 발레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나. 의미 있는 자리에 논란 많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선택한 국립발레단의 안목이 실망스럽다.
 
한 해의 몇 안 되는 발레 공연을 모두 관람하는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유의미한 가치관을 담고 있는 발레 작품을 많이 보고 싶다. 좋은 레퍼토리를 발굴하고, 관객을 유치하여 멋진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것으로써 문화예술의 순기능을 다하는 것이 문화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책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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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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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숴숴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굳이 생각지 않던 부분까지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기회가 되었네요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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