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배움의 발견' ③ 내 세상을 깨부수는 일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6.17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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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배움의 발견' ① '배움'의 둔갑]['배움의 발견' ② 다름과 틀림의 발견]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두 글을 먼저 읽으신 후에 아랫글을 읽으시길 권장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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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 바꿔 놓는 세상


 

타라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그중 하나는 ‘깜둥이(nigga)’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길 수 없게 된 것이다. 흑인 인권 운동과 노예 해방 역사에 관해 배운 후, 타라는 자신을 부를 때 ‘깜둥이(nigga)’라는 단어를 쓰는 숀 오빠를 경멸하게 된다.

 

 

“우리 깜둥이가 돌아왔군!”

 

… “나를 그렇게 부르지마.” 내가 말했다.  …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별명에 수없이 대답을 했었다. 사실 숀 오빠가 재치 있고 재미있는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그 말을 할 때마다 오빠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 에멧 틸, 로자 파크스,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이야기는 숀이 “깜둥아, 다음 줄로 옮겨” 하고 소리칠 때마다 내 마음속에 떠올랐다. … 나는 처음부터 불 보듯 바로 알아 차렸어야 할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평등을 향한 대장정에 누군가는 반대했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누군가의 손에서 자유를 쟁취해야만 했던 것이다.

 

p. 284

 

 

무언가를 알게 된 후, 웃겼던 농담이 웃기지 않게 된 경험이, 혹은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아무렇지 않지 않게 된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외모를 가지고 하는 농담이 웃기지 않게 된 게, “장애인 같다”는 말이 혐오라는 것을 알게 된 게, 동성 간의 사랑을 우습게 묘사라는 게 비하라는 걸 알게 된 게,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이제야 조금씩 타자의 세상과 언어를 배워가는 우리가, 전과 같이 웃고 전과 같은 언어를 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타라가 더 이상 숀의 말에 웃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배움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는 심지어 아주 가까웠던 사람을 멀게 느껴지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나는 아버지가 기른 그 사람이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나를 기른 그 사람이었다.
 

p. 506

 

 

 

때로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배움


 

이처럼 배움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역설적이게도 때로는 그 변화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만난 모르몬교 친구 마크는 어느 날 타라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교회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가 물었다.

“응” 내가 말했다.

“그게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어도?” … “일부다처제에 대해 알고 나면 믿음이 흔들리는 여성들이 많잖아.” “우리 엄마처럼. 아마 엄마는 그 부분을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p.382

 


마크는 모르몬교가 일부다처제를 찬성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믿음이 흔들려 괴로워하는 여성 신자를 예로 들며, 그럼에도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더 많이 알아서, 그동안 믿어왔던 세상이 흔들리고 불행해진다면 차라리 모르는 채로, 생각하지 않는 채로 남아있는 게 낫지 않을까? 비단 종교 공부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기존의 나의 세상을 넓히고, 때로는 바닥부터 박살 내는 것과 같다.

 

때문에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언제나 크고 작은 혼란과 갈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의문이 드는 것이다. 사람을 흔들리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게 배움이라면, 굳이 배움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지향점을 내가 정하기 위해


 

타라는 훗날 역사 기록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는다. 역사가 아니라 역사를 기록한 ‘역사학자’에 관해 공부하기로 한다. 이런 선택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라는 점과 그중 많은 부분을 수정하느라 훗날 자신의 모든 세상이 뒤집혔던 경험 때문이다.

 

타라는 이제 다른 누군가의 관점에 의존해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길 바랐다. 그리고 그 출발은 ‘아버지도 틀릴 수 있고 위대한 역사가들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역사를 기록한 사람’에 대한 공부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저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주관적 편견이 가미된 주장들을 서로 교환하고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내가 배운 역사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운 역사와 다르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들이 논쟁의 불을 지핀 후 남은 재로부터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발을 디딘 땅이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거기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p.373

 

 

‘역사학자’를 공부하기로 한 타라의 선택은 '왜 배움을 계속하는가'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맞는 의견’이나 ‘옳은 의견’을 찾고자 하는 게 아니라, 틀릴 수 있는 ‘자신의 의견’을 세우는 법을 배우기 위해. 어떤 농담에 웃을 것인지, 무엇을 믿을 것인지, 왜 어떤 농담에는 웃지 않고, 어떤 믿음은 바꾸기도 하는지- 이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우리는 흔들리더라도 배워야 한다.

 

 

 

배움의 발견 시리즈를 마치며


 

도입부에서 언급했듯 이 글은 <배움의 발견> 삼부작 중 마지막이다. 첫 번째 [배움의 둔갑]에서는 폭력을 교육으로 둔갑시키고, 교육을 주입으로 둔갑시키는 우리 사회를 보며 ‘무엇이 교육이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성을 알아보았다.

 

두 번째 [다름과 틀림의 발견]에서는 자신의 틀림과 타인의 다름을 마주하며 성장하는 타라의 배움의 과정을 들여다보며, 그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한국 사회의 안타까운 모습에 관해 논했다.

 

마지막 세 번째 글에서는 배움이 사람을 어디까지 바꾸어 놓는지, 그 변화가 고통스러움에도 계속해서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배움의 정의, 과정, 결과, 이유를 함께 다루어 보고자 이번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지구 어딘가에 사는 괴짜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 우리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고 함께 배움에 관해 고민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각 편마다 한국의 모습들을 함께 이야기했다.

 

부디, 이 글이 각자의 배움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배움의 이유를 찾는 데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길 바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또 한 번 자신의 세상을 깨부수려 노력하고 있는 당신에게 감사를 전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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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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