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증오하는 나의 딸, 그리고 나의 어머니 - 현기증 [영화]

사랑하는 나의 딸, 그리고 나의 어머니
글 입력 2021.06.03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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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약적 사자성어, 희로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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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어 기제로 이어지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이 표출하는 슬픔을 사랑하는 편이다. 단지 '나의 자식이 죽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라는 근본적인 아픔과 분노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괴물이 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에 더 깊이 공감한다.


스스로조차 자신의 감정을 읽어내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 온전한 사랑도 아니고 완벽한 분노도 아닌 애증, 변치 않으리라 맹세했던 마음도 상황에 따라 패배하는 현실. 희로애락이라는 사자성어가 지나친 비약으로 느껴질 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규정하기 쉬운 단편적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현기증>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둡고 짙은 감정을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본 영화의 논평에는 '심한 거부감이 느껴졌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당신 내면의 이기적인 본성은 이 영화와 만났을 때 무슨 효과를 일으키는가. 과연 당신이라면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인간의 도리를 저버렸다며 '순임'을 원망할 자격이 있을까?

 

 

 

모든 가족에게는 보이지 않는 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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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의 첫째 딸 영희와 사위 상훈은 유산의 아픔을 겪고 첫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영화 초반부터 그다지 화목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는 가족이었다. 어머니 순임은 심해진 건망증으로 걱정을 사고 있으며, 늦둥이 둘째 딸 꽃잎은 학교에서 심한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첫째 딸 영희는 아들 하늘이를 낳는 데 성공하고, 이 덕분인지 가족의 분위기는 이전보다 조금 화목해진다. 산후조리 중인 딸을 위하여 냄비에 사골을 끓이던 순임은 영희 대신 하늘이를 목욕시키러 욕실로 들어간다. 그러나 갑자기 정전으로 인해 심한 현기증을 느끼게 되고, 정신을 차린 뒤 하늘이는 이미 바닥에 부딪혀 죽어 있는 상태였다.

 

영희가 아들의 죽음을 알아내기 전까지 연출은 가히 비극적이다. 물 끓는 소리에 잠에서 깨 사골국의 불을 꺼도 되는지 묻는 영희와, 이불 속에 모로 누워 침묵하는 순임. 욕실화를 발견한 영희는 화장실로 달려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순임은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임은 뒤늦게 화장실로 들어와 비명을 지르지만 영희가 하늘이를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증오하는 나의 어머니, 나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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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는 치매인 어머니가 실수로 하늘이를 떨어뜨렸음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점차 순임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화해를 시도하며 가져온 식사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어머니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 이 와중에 꽃잎이 당하는 학교폭력은 점차 심해지고,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해보지만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가족들은 꽃잎의 말을 무시한다. 결국 영희와 상훈은 분가해 있기를 선택한다.


유난히 빗소리가 크게 들리던 날, 꽃잎은 빨랫줄에 목을 매달고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다. 다행히 순임이 이를 발견하여 구조에 성공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순임은 또다시 계단에서 굴러 정신을 잃는다. 그러나 이후 꽃잎의 행동은 기이해진다. 영희와 순임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내뱉어 순임을 자극한다. 어머니를 걱정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로 한 영희와 상호의 밥을 준비하는 순임의 곁에서, 꽃잎은 국이 너무 짜다며 물을 들이붓는다.


세 사람은 식탁에 앉아 대화를 이어가고 순임은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넨다. 그리고 국을 떠먹는 영희와 상호를 바라보며 순임은 자신도 국을 먹으려다가 멈칫하며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그 순간, 영희와 상호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꽃잎이 나타나 왜 국을 먹지 않았냐며 순임에게 비명을 지른다.


결말 부분에서 영화는 다시 하늘이를 씻기던 처음 장면으로 돌아간다. 사실 순임은 치매가 아니었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병이 있는 것처럼 연기했다. 둘째 딸 꽃잎도 이미 빨랫줄에 목을 건 순간 세상을 떠났으며, 순임은 복합적인 감정으로 꽃잎의 환영을 보았던 것이다. 물을 들이부은 사람도 사실은 순임이었으며, 그것은 물이 아닌 농약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딸,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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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나는 거북함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희열을 느꼈다. 여기서 말하는 희열이란, 기쁨의 감정에서 오는 희열이 아니라 인간의 추악하면서도 동정을 유발하는 본능에 대한 카타르시스의 폭발이었으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순임은 결국 딸을 사랑했기 때문에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치매 행세를 했으며, 그런데도 딸이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자 점차 방어기제로 영희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사실 증오해야 할 대상은 영희가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마주했을 때 스스로에게 닥칠 혐오의 감정이 두려워서 본인마저 속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꽃잎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 '영희가 증오할 만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아이에 대한 혐오감은 정당하다'라고 진실한 내면마저 세뇌한 것이다.


농약을 탄 국을 먹지 않은 순임에게 달려드는 꽃잎의 모습은 베일 속에 감춰진 죄책감이라 할 수 있다. 온갖 추악한 감정들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 순임이 영희를 원망하게 된 이유는 영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딸에게 미움받는 것이 두려워 자기방어의 기제로서 먼저 자신이 딸을 미워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사랑이 혐오로 둔갑하는 것은 이렇게 모순적인 일이다. 순임의 살고자 하는 이기심과, 모든 원흉이 자신이기 때문에 국을 먹었어야 한다는 숨겨진 본심. 과연 우리가 순임을 원망할 수 있을까?

 

 

 

인간의 방어기제, '나' 속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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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우리는 진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다른 감정으로 그것을 덮어버리고는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기 싫어서 차라리 미워하는 것을 선택하고, 언젠가는 불행해질 것이 두려워서 행복해지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맞는 건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는 시기가 온다. 방어 기제가 무너지고 점차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을 진짜라고 믿게 되는 시작점이다. 그 시점에서 개인은 두뇌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심장에 당황하고 통제력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분명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이것'이었는데, 실제로 그 상황이 닥쳤을 때 내면은 '반대의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과연 순임은 단순히 손자를 죽인 것을 감추고자 하는 이기적인 어머니였을까? 혹은 스스로에게 속아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피해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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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향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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