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방황하는 모든 이를 위한 뮤지컬 - 문스토리

글 입력 2021.05.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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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문스토리>는 채기웅 감독의 동명 단편영화를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로, 뮤지컬 <사의 찬미>로 호흡을 맞췄던 작가 겸 연출 성종완과 작곡가 김은영의 합작이다. 지난 2018년도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성공적인 트라이아웃 공연을 거쳤으며, 현재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4관에서 상연 중이다.


 

시놉시스

 

서울의 도심. 유령과도 같은 몰골의 전직 만화가 이자 택시 기사인, ‘이헌’, 택시를 몰고 도시를 질주한다. 그러던 중, 한 남자를 치게 되고, 겁에 질린 나머지 자신의 단칸방으로 데리고 온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남자는 깨어나 자신의 이름을 ‘용’이라 소개하며, 자신은 달에서 왔다고 말한다. ‘이헌’은 그가 머리를 다쳤다고 생각하고 망연자실한다. 그 순간, ‘이헌’의 어릴 적 단짝친구 ‘찬영’이 ‘린’이라는 이름의 여자(트랜스젠더)가 되어 나타나, 다짜고짜 ‘이헌’의 집에 함께 머물게 해달라고 떼를 쓴다. 그렇게 세 사람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된다.

 


이 뮤지컬을 보러 가기 전 아무런 사전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알고 있던 것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수식어뿐이었다. 시놉시스를 읽었지만 어떤 극인지 그려지지 않았다. 극이 시작하고 내용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왜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했는지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극이 중반 정도 진행되고 점점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이 극이 어떤 극인지 알게 되었고, 왜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표현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 눈물 흘리고 있었고, 극에서 표현된 객관화된 ‘상처’를 직접 마주하면서 나의 상처 회상하고 있었다.

 

이 극은 시놉시스를 보거나 초반만 봐서는 절대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작품이다. 극 전체를 다 보고 나서야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 이 작품의 가치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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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90년대 생이다. 우리 90년대 생은 다른 세대에 비해 큰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창 시절의 경험과 어른이 되어서의 삶이 연장선에 있지 않고,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어렸을 때 배웠던 것들이 우리가 어른이 되자 산산 조각 나버렸고, 바뀌었다. 우리는 학창 시절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성공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들은 하나의 직장에 평생 다니면서 저축하여 집을 사고 우리를 키워주셨다.

 

우리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의 가르침 속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12년의 학창 시절 동안 편안한 미래와 성공, 그리고 행복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우리가 20살이 되고 사회에 나갈 시기가 되자 공부를 잘하는 것이 곧 성공이라는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고, 평생직장 대신 N잡러를 지향하게 되었으며, 저축보다는 투자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처럼 지금까지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삶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비단 앞에서 말한 90년대 생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이다. 단지 조금 더 심할 뿐이라는 것이다. 세대, 성별, 국경을 넘어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등의 문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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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뮤지컬은 차별당하고, 소외 당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스토리이다. 이러한 과정이 ‘달’과 ‘지구’, 그리고 ‘달의 아이들’이라는 상징적인 소재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달’이라는 공간은 모두가 같은 속도로 살고 있으며 각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타인과 사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원시적인 상태이며 순수한 상태이다.

 

하지만, 달의 아이들은 푸른색으로 뒤덮인 지구의 모습을 보며 지구를 동경하며 하나둘씩 지구로 넘어가고 마지막에는 용밖에 남지 않는다. 달의 아이들이 보는 지구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관객)은 달의 아이들이 지구에 품고 있는 환상은 거짓된 것이며, 그들이 경험하게 될 지구에서의 삶은 결코 무지갯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상처받을지 걱정하게 된다.

 

달에서 온 아이들은 지구에 온 순간부터 소수자가 되어 소외받고 차별당한다. 그들은 ‘고아’가 되어 고아원에서 살게 되며 세상의 수많은 편견으로부터 맞서 싸운다. 더 나아가 린의 경우 달에서 지구로 넘어오면서 성 정체성이 바뀌게 된다. 린은 달에서는 여자였으나 지구로 오면서 남자가 된다. 하지만, 자신의 본래 정체성이 여자였음을 기억하는 린은 자신의 쌍둥이인 이헌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유지한다. 이에 동성애자로 인식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지구인들에게 배척받는다.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린은 (죽은 후 이헌과 융의 상상 속에서) 트렌스젠더가  되며, 자신이 여자가 된 모습에 진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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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린의 모습에서 ‘동성애’로 표명되는 사회의 소수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들의 어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필자는 극에서 드러나는 ‘동성애’가 단순히 동성애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포함한 사회의 소수자들을 모두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린은 대개의 사람들과 다른 자신의 정체성 탓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유일하게 자신이 ‘달에서 온 아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이를 믿지 않으며, 그녀와 가장 가까운 이인 이헌 또한 그녀를 믿지 않으며 단순히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헌의 태도에 절망하고, 사회의 날카로운 시선에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지속할 수 없었던 린은 결국 자살한다. 그녀가 더 이상 달나라로 소식을 보내지 않자, 용은 그들이 걱정되어 결국 달을 떠나 지구로 오게 된다.

 

그렇지만, 지구에 온 융은 린을 만날 수 없었고, 우연히 만난 이헌은 자신이 달나라에서 온 것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헌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깨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죽은 듯이 살아간다. 모든 것을 회피하고 삶과 단절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감싸고 있던 알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는 자신이 ‘달에서 온 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즉,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동시에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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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은 린과 달리 결국에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 그들과 자신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동시에 자신의 가장 큰 상처(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이를 극복해 냄으로써 삶의 의지를 다진다. 이는 융, 린 그리고 수연의 도움으로 가능했지만, 이를 받아들여 변하기로 결정한 것은 결국 이헌, 그 자신이다. 이러한 과정은 헤겔의 변증법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살아있는 실체야말로 참으로 주체적인, 다시 말하면 참으로 현실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실체가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이며 나아가서는 스스로 자기를 타자화하는 가운데 자기와의 매개를 행하기 때문이다. 실체가 곧 주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실체에 순수하고도 단순한 부정성이 작용하면서 바로 이로 인하여 단일한 것이 분열됨을 뜻한다. 그러나 이렇듯 분열되는 데서 오는 대립이 이중화됨으로써 분열된 양자가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이 차이와 대립을 빚는 그런 상태는 부정된다. 이렇게 해서 회복된 동일성, 다시 말하면 밖으로 향하면서 곧 다시 자기 자체내로 반성, 복귀하는 움직임, 즉 최초에 있던 직접적인 통일과는 다른 이 두 번째의 동일성이 바로 진리이다. 진리는 자체적으로 생성되는 것으로서, 이는 자기의 종착점을 사전에 목적으로 설정하고 이 지점을 출발점으로 하여 중간의 전개과정을 거쳐 종착점에 다다를 때라야 비로소 현실적인 것이 되는 원환과 같은 것이다.

 

- 헤겔 『정신현상학』 中

 


자신을 타자화한 것을 자기와 매개하는 것이 바로 자기 정립의 운동이며 주체로서 활동하는 과정이다. 존재가 본질을 포함하는 것으로 자기원인적, 즉 자기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정리하면 正(기존의 나)을 부정함으로써 反(나의 타자화)를 하고 이 두 가지가 대립하는 과정 속에서 절충된 合(새로운 나)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헌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이 과정이다. 그는 수많은 좌절과 회피, 분노를 겪으면서 결국은 자신이 ‘달의 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며 자신의 진실된 정체성을 찾는데 성공한다.

 

 

“난 달에서 왔어”

 


그 후, 이헌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융과 함께 달로 떠나지 않고 계속 지구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아직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이제 겨우 내 자신을 되 찾았고, 세상에 말해주고 싶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또 뭘 찾고 있는지. 잊은 채 살아가는 수많은 달의 아이들을 위해서”

 


그의 변화는 단지 한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가 변화되어가는 시발점이다.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이를 인정해 가면서.

 

*

 

논외로, 이 작품을 보고 나오면서 이 극의 형식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과 비슷하고, 말하는 메시지는 방탄소년단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극은 다른 극들과 달리 한 마디의 말로 정리하여 줄거리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운 극이다. 이러한 점이 <비극의 탄생>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형식은 보는 사람을 자신의 세계로 초대하며, 이에 동조하는 순간 우리는 기존의 세계와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저 널 지킬 거야 난 / Listen my my baby 나는

저 하늘을 높이 날고 있어 / (그 때 니가 내게 줬던 두 날개로)

이제 여긴 너무 높아 / 난 내 눈에 널 맞추고 싶어

 

-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전반적으로 이 노래는 본 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타인을 자신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작은 것’이라고 대표되는 소외된 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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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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