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무엇이 남을까 [도서/문학]

릴리 브룩스돌턴, [굿모닝 미드나이트]
글 입력 2021.05.0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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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천문대에 간 적이 있었다. 날이 맑아 망원경으로 직접 별들을 볼 수 있었는데, 별자리 이름도 모르고, 별자리를 보는 법도 모르지만, 하늘을 수놓은 별은 경이로웠다. 눈 앞에 펼쳐진 하늘은 한눈에 다 담기 어려울 정도로 넓었고, 또 깜깜했다. 선생님이 설명해주신 바에 의하면 별은 지구에서 그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밝게 빛나는지 신기했다. 우주의 신비라는 걸 어린 나이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내 친구는 망원경을 들여다보다가 울었다. 우주가 너무 넓어서 무서웠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렇게 예쁜데 뭐가 무섭다는 거지? 우는 친구 옆에서 나는 하염없이 망원경만 들여다봤던 기억이 난다.


조금 더 자란 후에야 나는 친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주는 너무 크다. 하물며 내가 서 있는 이 지구도 이렇게나 거대한데, 지구를 감싸고 있는 우주는 어떻겠는가. 더 많은 자료를 접하고, 더 많은 영상을 접하면서 나는 우주의 광활함에 잠식되는 걸 느꼈다. 우리는 우주 먼지였다. 우주 먼지라는 말은 단순히 밈으로 소비될 게 아니었다. 우리는 우주 안에서 먼지보다 작은 존재임이 분명했으니까.


그렇다면, 그 커다란 지구가 멸망해버렸을 때, 그 광활한 우주 속에 혼자 남겨졌을 때, 이 모든 것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껴버렸을 때, 그 시간 속에 살아남아 버렸다면 우리는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까.


릴리 브룩스돌턴의 첫 장편 소설 [굿모닝 미드나이트]에서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장엄한 공허 속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그들이 마주한 고독에 대한 이야기이다.

 

 

 

북극에서, 어거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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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천체학자 어거스틴은 칠십 평생을 바쳐온 연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북극에 거주 중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모든 연구원들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도 그는 북극에 남았다. 아무도 그를 데리러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군인의 말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그의 인생을 바친 모든 것이 북극에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북극에 남았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북극에 남겨져 버린 한 소녀, 아이리스를 발견한다.


북극 너머에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어거스틴도 알았다. 무신 송전기를 통해 지구의 그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어거스틴에게 응답하지 않았다. 지구는 핵 때문이든 화학 무기 때문이든 이미 망해버린 모양이었다.


어거스틴은 초연했다. 나는 그 점이 이해가 안 됐다. 무언가에 미치면 저렇게 되는 걸까? 하늘을, 천체를, 별을 너무 사랑해서 혼자가 되었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없는 걸까? 아이리스를 책임져야 한다는 공포는 없나?


하지만 그는 그저 결여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인간 공동체에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이 결여된 사람이었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사랑,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는 돌아갈 곳이 없어서 초연한 것이었다. 그의 모든 인생에서 그는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장소의 변화만 있을 뿐 크게 달라질 게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애초에 북극에 ‘죽으러 왔다’고 했다. 뚜렷한 삶의 목적을 상실한 어거스틴에게 망해가는 지구 따위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랬던 어거스틴은 점점 두려워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의 끝이 다가온다는 두려움. 그건 자신을 위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솔직하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그로 인해 상처받았을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려움이었다. 더해서, 황량한 북극에 혼자 남을 아이리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어거스틴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두려움의 원천을 찾았다.

그건 사랑이었다.

 

 

 

에테르 호에서, 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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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목성 탐사에 성공한 에테르 호는 탐사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던 중이었다. 목성의 아름다움과 우주의 경이로움에 매료된 에테르 호 선원들은 뿌듯함과 성취감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통신 전문가 설리는 지구와의 모든 교신이 끊어진 것을 발견한다. 주파수의 오류인 줄 알았던 통신의 두절은 몇 주 동안 지속됐다. 지구에 남겨진 가족들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지구에서는 더 이상 탐사에 대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에테르 호는 지시를 잃은 채 우주의 궤도를 타고 있었다.


아름다웠던 우주는 무한한 공포로 다가왔다. 에테르 호의 선원들은 점점 평정심을 잃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일과는 점차 무시되었고, 동료애가 가득했던 선원들 사이에서 불화의 씨앗도 생겨났다. 그들을 가슴 뛰게 했던 우주에 대한 연구는 그 수신자를 상실한 채 그들의 열정마저 앗아갔다. 에테르 호 안의 ‘작은 지구’에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광활한 우주에 겁도 없이 스스로를 던졌던 그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돌아갈 곳의 부재. 그들은 존재가 아닌 부재와 싸우는 중이었다.


정해진 궤도 내에서, 답신 없는 지구를 향해 가는 그 길고도 무력한 여행에서 그 긴 시간 동안 설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녀의 삶은 언제나 상실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딸과 가족을 잃었다. 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대신 붙잡았던 우주마저도 이제는 끝을 알 수 없는 공허함만을 돌려줄 뿐이었다.


그녀는 점차 깨닫게 된다. 그 상실의 원인은 전부 스스로에게 있었다는 걸 말이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고, 멀어지는 걸 그저 바라만 봤다. 마치 너른 우주에서 부유하는 우주 쓰레기처럼 설리는 그 모든 것을 쉽게 놓아버렸다. 여전히 지구의 교신이 없는 통신 칸에서 설리는 어두운 우주를 바라봤다. 그 안에서 그녀는 조금 후회를 했던 것 같다.


결국 설리는 그녀가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던 목성에 대한 데이터를 전부 잃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하나의 인류와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에테르 호 사령관 하퍼의 말처럼 그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이 있어야 했다.


하나의 위기를 맞이한 에테르 호는 새롭게 부여된 과업 아래에서 다시 한번 동료애를 확인하게 된다. 그 감정은 에테르 호 선원들을 고양했다. 다시 규칙적인 식사와 연구가 재개되었고, 다툼이 아닌 대화가 진행됐다. 하나의 목적이 그들을 다시 환기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구에 유일하게 남았을지도 모르는 인간, 어거스틴과의 교신에 성공한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다소 절망적인 지구의 상황을 접하면서 그들은 국제 우주 정거장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또 다른 절망과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설리는 세상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북극의 어거스틴과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도. 그 과정에서 설리는 어거스틴에게서 완연한 고독을 감지했다. 그 고독이 자신의 안에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리는 지구로 향한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지구를 향해 움직인다. 그곳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 모르는데도 그곳을 향한다. 그 먼 길을 돌아와 결국 죽게 된다고 해도 설리는 지구에 도달하고자 한다.


어쨌든 설리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언제나 옆에 있을 것 같던 모든 것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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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그걸 전부 말할 힘이 없다는 걸 안타까워했다. 설리 역시 과거에 용기 내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많았음에도 종말을 눈앞에서 확인해야만 그에 대한 회한이 그들을 아프게 했다. 그 회한은 이미 너무 늦어버려 마지막일 것이 분명한 여행의 연료가 되었다.


이 소설은 꼭 공허한 우주 같았다. 북극의 어거스틴이, 우주의 에테르 호가 느끼는 절망감과 무력함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나는 꼭 망원경을 보고 울던 내 친구처럼 울었다. 극한 환경에 놓인 인간들이, 그것도 공동체와 사랑의 교류 안에서 어려움을 느끼던 이들이 궁극적으로 찾은 것이 사랑이라는 게 나를 너무 막연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상투적이다.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상투적임에도 그것이 결여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싸우고, 질책하고, 혐오하고 그 모든 것들이 지구에 만연해있다. 솔직하지 않고 무례한 언사로 타인을 할퀴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 가득하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무엇이 남을까.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구에도 사랑이 남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 작은 존재를 향한 사랑, 과거의 과오로 인해 상처 입은 이에 대한 사랑. 결국 그 상투적인 개념인 사랑만이 종말을 견딜 수 있는 것인가.


소설과 달리 현재의 지구는 굳건하지만, 사실 우리는 당장 내일의 미래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지구라는 거대한 공동체에서 우리는 충분히 교류하는가?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옆에 있을 것 같은 모든 것에 소홀하니까. 자신의 능력에 과하게 취했든, 그냥 관심이 없든, 익숙함에 속아 특별함을 망각하든 우리는 여러 가지에 소홀하다. 스스로를 사랑하세요, 주변을 사랑하세요, 와 같은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작가 릴리 역시 그럴 것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얻은 메시지는 단 하나다.


세상이 종말하고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후회는 남는다.


가슴이 부서지게 염원하던 것들이 아니다. 심장 저리게 사랑하던 것들도 아니다. 후회. 나의 행동과 결과에 대한 후회는 어떤 형태로든 마지막까지 잔류한다. 그걸 느꼈기에 어거스틴과 설리가 마지막일 것이 뻔한 여정을 떠난 것이다. 더 이상의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어차피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우주는 광활하고 지구는 작다. 그 속의 인간은 더 작다. 까마득하게 보이는 별보다도 작은 존재인 우리는 결국 죽게 될 먼 길을 돌아가고 있다. 이 길의 끝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언제나 옆에 있을 것 같던 것들에게 솔직한 감정을 내비쳐야 한다. 어차피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은 완벽한 삶을 살 수는 없다. 공허한 우주에서도 궤도 이탈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공존할 수는 있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훗날의 후회를 덜어줄 테니까.


그래. 이건 결국 나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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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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