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디언들이 사는 법 - '로스트 인 더스트'와 '윈드밀' [사람]

글 입력 2021.03.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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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두 형제의 이야기다. 빚더미에 시달리던 두 형제 ‘토비’와 ‘태너’는 급기야 유일한 재산이자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마저 은행에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은 은행 강도를 계획하고 범죄에 성공한다. 한편 그들은 쫓는 베테랑 형사 ‘마커스’는 두 사람의 치밀한 범죄수법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포위망을 좁혀 온다.

 

그러니까 그 세계는 황량하고 쓸쓸하다. 곳곳에 세워진 대부광고와 파병을 3번이나 다녀왔지만 정부에서는 돈 한 푼 쥐여주지 않는다는 어느 군인의 원망 어린 목소리는 낡은 세계와 쉴 새 없이 부딪히며 회오리친다. 두 시간 남짓의 이 빈곤한 풍경이 끝나면 어느덧 당신의 입안에는 버석거리는 모래알들이 굴러다닌다.

 

테일러 쉐리던이 쓰고, 데이빗 맥킨지가 연출한 <로스트 인 더스트>는 마치 70~80년대의 고전영화를 보는 것 같다. 각본과 연출이 서로 공을 주고받듯 치밀하게 펼쳐낸 유머와 서스펜스는 그 질감과 양감이 풍부하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토비는 쫓기는 와중에도 호텔 프런트의 직원에게 생애 마지막 날엔 자신을 떠올리며 웃을 것이라고 여유를 부린다.

 

하지만 이렇게 넉살 좋은 미소를 흘리다가도 영화는 누군가의 죽음을 시작으로 끈끈한 긴장을 빚는다. 미처 슬퍼할 새도 없이 자신의 목적에 충실해야 하는 남겨진 사람들은 무거운 자취를 남긴다.

 

 

 

1. Lost in D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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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전염병 같아서 대를 이어 전해지면서 사람을 괴롭히죠.”

 

 

영화 속에서 토비와 태너는 빚더미에 올라있다. 은행이 그들의 어머니가 빌린 돈을 구실로 원전이 발견된 형제의 농장을 헐값에 꿀꺽하려 든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결국 총을 들었다. 은행을 털었다. 더 이상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한편 인디언 출신의 형사 알베르토는 은행 앞에서 잠복하다가 조상들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150년 전, 우리 조상들의 땅을 빼앗았던 놈들의 후손이 다시금 우리를 착취하고 있다’며 그는 자신이 보호해야 할 은행을 향해 삿대질을 날린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텍사스 사람들은 내몰리고 있다. 거리 곳곳에 놓인 대부광고들이 대표적인 증거다. 그 옛날 백인들이 텍사스 인디언들을 몰아냈듯, 은행과 자본세력은 토비, 태너 형제와 텍사스 사람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낸다. 하지만 그 누구도 텍사스 사람들의 사정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마커스가 들불을 피해 소들을 이끌고 도망치는 카우보이들을 보며 ‘그들의 책임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냉소적으로 말했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스트 인 더스트>의 진짜 갈등은 토비, 태너 형제와 두 사람을 쫓는 형사들 사이에 있지 않다. 대대로 땅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으려는 탐욕스런 자본의 갈등이야 말로 이 영화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2. Wind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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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혼타만이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땀을 흘렸다.”

 

 

박서영 작가가 쓴 단편소설 <윈드밀>은 푸드트럭을 모는 여자와 지방 행사를 전전하며 비보잉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여자는 남자(혼타)의 지방 행사를 따라 컵밥 장사를 하며, 혹여 언제 경찰의 단속이 들이닥칠까 불안해한다.

 

혼타가 어릴 적 고속도로에서 뻥튀기를 팔던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혼타만이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땀을 흘렸다.”

 

한편 여자는 주최 측에서 지정해 준 곳에서 컵밥을 팔아보지만 사람들은 축제장 뒤쪽 구석까진 오지 않는다. 결국 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다 못한 그녀가 번화가로 나가자 이번엔 자신을 건물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나 그녀에게 면박을 준다. “남의 땅에서 뭐 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윈드밀>의 남녀와 <로스트 인 더스트>의 형제는 서로 닮았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에서 태너는 카지노에서 우연히 만난 코만치 인디언의 후예에게 ‘나도 코만치야’라고 일갈했다. 어쩌면 그들은 모두 현대의 인디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윈드밀>과 <로스트 인 더스트>의 장르는 서부극이다.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지정된 구역이 아니라면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모두 ‘불법’이다.

 

 

 

3. 현대의 인디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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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건물은 누구의 것이고 지금 내가 딛고 선 이 땅은 누구의 것일까. ‘누구의 것’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나를 빚어낸 최초의 재료였다. 나는 누구의 땅 위에서 아빠의 것을 물려받아서 살고 있으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소유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태어나서 갖는 최초의 자기 것은 무엇일까. 그건 이름이다. 남이 지어주었더래도 그것은 내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조차 <윈드밀>의 두 사람에겐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가명이 채웠다. 혼타, 디즈니, 맥도날드, 코카콜라 등등. 하나같이 빌려온 이름이다. 이런 존재가 소설 속에서 반복된다. 신경이 죽어버린 손가락, 달릴 수 없는 트럭, 윈드밀을 할 수 없는 비보이, 이름이 없는 컵밥. 롤랑 바르트 식으로 말하자면 ‘텅 비어버린 존재’인 셈이다. 그들에겐 자신의 존재를 의탁할 무엇이 없었다. 그래서 혼타와 여자는 유령처럼 살았다. 모텔과 트럭을 집 삼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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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결국 로스트 인 더스트. 영화의 제목처럼 모든 인물은 먼지 속에서 길을 잃는다. 영화에서 식당의 할머니는 식당을 방문한 형사들에게 무엇을 먹지 않겠냐고 묻는다. 절망으로 뒤덮인 그 세계에서 그들의 선택은 언제나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향한다. 죄 짓고 멀쩡한 놈은 못 봤어.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태너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첫 범죄에 성공한 이후에 씁쓸하게 자조한다.

 

한편 소설의 두 주인공은 이 땅에서 자신들이 있을 곳이 없다는 걸 알고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가느다란 희망에 기대어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 역시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 소설의 말미, 자신들을 덮쳐오는 코카콜라를 보며 여자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다. “그것은 미국이었다. 단 한 번도 미국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땅이 없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한 여자와 혼타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정착할 수가 없다. 아메리칸드림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가지고 있는 조건까지 평등하진 않으니깐.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두 사람은 결국 자본주의라는 환경에 압사당한다. 이제 그들도 유령이 될 것이다. 먼지 속을 떠도는 유령이.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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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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