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광장에서의 자유로운 외침 - 스트릿 노이즈 STREET NOISE

글 입력 2021.03.12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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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피티란 벽이나 그밖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학교와 집만을 반복하는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던 내가 그래피티를 알게 된 계기는 <그래피티>라는 제목의 만화였다.

 


그래피티.jpg

 

 

<은밀하게 위대하게>로 유명한 HUN 작가가 2004년에 발표한 초기작으로, 내가 웹툰을 봤던 당시에도 이미 몇 년이 지난 작품이었다. 만화의 경우 시대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에 3, 4년만 지나도 촌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래피티>는 거의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 봤는데도 시대에 뒤처졌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다. 오히려 당시 유행하던 작품들보다 더 세련되고 신선한 느낌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오래 전 웹툰이 어떻게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피티 자체가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이기 때문이었다.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어원을 가진 그래피티는 어원 그대로 견고한 편견으로 둘러싸인 세상에 균열을 내고 아티스트 본인만의 정체성을 새긴다. 그래피티의 본질은 반항 정신이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리는 것만 그림이라고 믿는 사람들 틈에서 불법 딱지가 붙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벽에 스프레이를 뿌리던 사람들이 만든 예술이니 당연할 것이다.

 

만화 <그래피티>가 평범한 사춘기 학생의 마음을 움직인 건 바로 그 반항 정신이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부모님 심기 건드리지 않고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게 당시 내 삶의 원칙이었다. 나는 그런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살아가는 일상이 나쁘지 않았다. 굳이 일탈을 저지르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는 방황하는 청춘을 향한 동경이 있었다. 수많은 성장물이 나의 동경을 채워주었는데, 만화 <그래피티>도 그중 하나였다.

 

이제 난 더는 방황하는 청춘을 동경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어른의 역할을 연기하면서 내면의 방황은 무시하고 주류의 흐름을 따르는 게 더 편하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학창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성장물도 내 관심사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세상의 풍파에 찌들던 내가 다시 반항 정신을 동경하게 된 계기는 며칠 전 다녀온 [STREET NOISE]라는 전시였다.

 

 

210219_[Street-Noise]포스터-닉워커.jpg

 

 

[STREET NOISE]는 잠실 롯데월드몰에 새롭게 생긴 문화예술복합공간 P/O/S/T에서 열리는 첫 번째 전시로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10인의 작품을 비롯해 개성 있는 국내 아티스트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처음 롯데월드몰 POST를 찾아가는 것부터 당황스러웠다. 롯데월드몰에 방문한 적은 많았지만 POST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전시회가 이뤄지는 곳이라고 하면 이름이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끝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 롯데월드몰은 아무리 생각해도 전시가 진행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입점 업체들을 지나며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직원에게 POST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대로 쭉 가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말을 믿고 앞으로 걸으니 거짓말처럼 쇼핑몰 한 가운데에 전시장이 나타났다. 이대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싶어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냥 들어오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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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는 ‘힙하다’가 아닐까 싶다. 이 단어는 영어 단어 HIP에서 파생돼 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하다는 뜻을 지닌다. 세상엔 힙한 것들이 많다. 힙한 사진, 힙한 거리, 힙한 카페, 힙한 취향… SNS에 나오는 수많은 ‘힙’에 내가 부합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는 세상에서 가장 힙한 공간에 놓인 힙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원래 나는 ‘힙하다’라는 말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개성을 지니면서도 유행에 밝아야 한다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분명 처음에는 개성적이었으나 유행의 물결을 타고 여러 복제품이 나오는 걸 보면서 고유한 개성도 금세 정해진 틀에 갇힌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개성을 존중하는 ‘힙함’이 도리어 유행에 따르지 않는 것들을 매도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전시장에서 떠올린 그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개성 넘치면서도 세련된 면모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힙’과 같았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는 유행에 뒤처지는 것들을 매도하기는커녕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한 존중이 느껴졌다. 특히 유명 명품 로고에 흘러내리기 작법을 활용한 작품이 그랬다.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자본주의 기업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작품이었는데, 무조건적인 멋을 추구하지 않고 공존과 상생을 생각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붓이 아닌 스프레이로, 캔버스가 아닌 벽에 그림을 그리고 갤러리가 아닌 길거리에 작품을 전시하는 그래피티는 태생부터 비주류의 예술이다. 주류에 편승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나에게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표출하는 분노와 일탈은 묘한 해방감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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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은 길거리의 예술답게 그래피티 아트가 발전한 미국의 사우스 브롱스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기존 전시회에선 안내되는 동선대로 움직이면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작품을 보게 되는데 의 경우 모두 한 공간에 모여 있어 총 여섯 개의 섹션의 순서가 정해져있었지만, 자유롭게 섹션을 번갈아가며 관람할 수 있었다. 이 자유로움 역시 참 그래피티스러웠다.

 

나에게는 이 전시장이 하나의 광장처럼 느껴졌다. 현대사회에서 광장은 자유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중립국으로 도피했던 주인공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도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광장이었다. 섹션은 그래피티 역사의 시대순으로 이뤄졌는데, 각각의 작품들이 자신이 속한 시대를 향한 분노를 외치고 있었다.

 

평일의 전시장은 한산했다. 관람객은 나를 제외하고 한두 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공간이 쓸쓸하거나 허전하지 않았다. 전시된 작품들이 모두 세상 밖으로 나와 소통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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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모든 작품이 큰 공간에 한데 모여 있어서 그런지 전시회를 길게 체험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는 ‘벌써 이게 끝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래피티하면 벽에 스프레이로 뿌린 그림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현실적으로 전시장에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는 점도 아쉬웠다. 모든 작품들이 훌륭했지만, 그 역시 기존 전시회에서 만났던 그림들처럼 사각형에 갇혀있어 내가 그래피티를 처음 알았을 때 느꼈던 짜릿함을 안겨주진 못했다.

 

제일 아쉬운 건 나 자신이었다.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3D 펜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체험이 눈에 들어왔다. 주어진 전자기기에 그림을 그리면 그대로 벽에 투사되는 방식이었다. 효과를 사용해 그림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흥미로운 기회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려 하자 거짓말같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늘 온갖 상념으로 가득한 머릿속이 그 순간만큼은 완전한 백지가 되었다. 결국 엉성한 나무 한 그루 그리고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내 부족한 그림 실력을 부끄러워하며 옆에서 지켜보던 직원의 눈치를 봤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그림을 그려도 하찮을 것 같아서 결국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도망친 것이다. 주류에 반기를 들고 자신만의 작법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그래피티의 정신을 이어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

 

STREET NOISE

스트리트 노이즈

 

2.26 - 6.13

 

롯데월드몰 지하1층 POST

 

10:30 - 22:00

(21:30 입장마감)

 

연중무휴

 

평일 12,000원 / 주말 15,000원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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