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은 연인을 먹었다 [도서/문학]

죽을 때 까지 함께하는, 함께하지 않더라도 함께하는.
글 입력 2021.03.0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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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19p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 죽은 너와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20p

 

 

너를 먹을 거라는 말, 책 소개 글에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책에 대한 추측성의 말풍선이 어떤 내용으로 구성될까. 집착을 사랑이라 여기며 속삭이는 번뜩이는 살기, 증오하는 사람에게 절대 쉽게 죽지 말라며 내리는 저주, 사랑하는 연인의 영혼을 먹은 게 아닐까 하는 판타지. 너를 먹을 거라는 말은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오로지 한 가지만을 의미한다.

 

이 문장이 내포하는 것이 은유일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확신은 정확히 책장을 3장째 넘기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너를 먹는다는 것은, 빠지는 너의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삼키는 것, 직접 깎은 너의 손톱과 발톱을 씹는 것, 차갑게 식은 너의 피부를 쓸어내리며 살점을 뜯어 먹는 것. 너를 먹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직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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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구와 담의 이야기만으로 구성된다. 책은 담의 시점이 되기도, 구의 시점이 되기도 한다. 담의 시점일 때에는 왼쪽 상단에 ‘○’로 표시되고, 구의 시점일 때에는 ‘●’로 표시된다.

 

그들의 사랑, 이별, 슬픔, 분노, 행복, 쓸쓸함, 이기심, 처연함, 공백, 두려움, 그리움. 구와 담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감정과 사건들로만 빼곡하다. 그 누구도 구와 담의 사이에 끼어들 수는 없다.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존재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왜’라는 단어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런 관계의 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사랑이 내가 살아가는 동시대에 존재하기나 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저 동화책이나 만화, 혹은 설화로 내려오는 이야기에서만 접했던 처절하고도 서로를 미칠 듯이 갈구하는 그런 사랑 말이다. 구와 담에게는 그 무엇도 방해될 수 없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절대 멈출 수 없는, 무언가 필연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귄다는 단어를 채우고도 그 단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넘쳐흐르는 관계였다.” -76p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83p

 

 

 

● 열심히 사는 게 정답이 아닌 세상


 

어릴 적 구는 담과 함께 담의 이모 주머니에서 돈을 훔쳤다. 열아홉 살 때는 남의 집 빨랫줄에 걸린 리바이스 티셔츠를 훔쳤다. 구가 남의 것을 훔친 경험은 그게 전부였다. 그런 구에게 본적도 만진 적도 없는 거액의 빚이 넘어왔다.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서 급식을 먹을 때 공장에서 일했고, 어느 대학을 갈지 고민할 때 편의점에서 일했다. 구가 노동의 대가로 얻은 돈은 전부 사채업자에게로 넘어갔다. 구는 살아 숨 쉬는 것 말고는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부모님이 행방불명 된 지는 오래고, 구에게 남은 건 담뿐이었다.

 

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믿기 힘든 일들이지만, 결코 현실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마치 현존하는 불행을 모두 가진 아이로 느껴졌다. 그래서 읽는 내내 구가 너무 불쌍해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눈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입 모아 말하는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닌, 답 없는 삶’을 사는 구의 인생이, 평범함을 얻지 못한 구의 시간이,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 책을 소비하는 감정에 있어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다.

 

 

 

○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담과 구의 시간에 총 4번의 공백이 있었다. 12살 때 더지와의 싸움 이후 중학생이 되기까지의 첫 번째 공백, 노마를 잃은 뒤 자연스레 서로 피하다 생긴 두 번째 공백, 구가 군대에 있으면서 생긴 세 번째 공백, 같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사채업자로부터 구가 잡혀가면서 생긴 네 번째 공백. 곧게 뻗은 길 위에 생겨버린 커다란 구멍을 담은 뛰어넘기도, 발을 헛디디기도, 때로는 그대로 빠져 올라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구가 살아온 시간을 빠짐없이 생생히 기억하는 담에게 구의 어두운 미래 따위는 고민거리가 되지 못했다. 구가 처한 지옥 같은 현재 역시 일말의 망설임조차 주지 못했다. 담에게는 구만이, 구에게는 담만이 존재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무엇도 담이 구를 사랑하면 안 될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런 담에게 구의 죽음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감히 가늠이나 할 수 있겠는가. 담은 구를 먹었다. 핥고 빨고 뜯어 먹었다. 구의 몸을 아무도 찾을 수 없게. 살아서도 상품이 된 구의 몸이 죽어서도 상품이 될 수 없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구를 자신의 신체 일부로 만들었다. 우리가 함께일 수 있게. 내가 죽어야 너도 따라 죽을 수 있게.

 

담의 사랑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까. 광기 어린 사랑. 처절한 사랑. 치기 어린 사랑. 영원한 사랑. 그 단어가 무엇이든 내가 표현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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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왜 구의 증명인지에 대해 2회 독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구는 생전에 담에게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아무것도 물려주지 말자는 말을 했다. 무(無)의 상태로 남기고 우린 떠나야 한다고. 이건 구의 소망이었다. 그리고 구의 소망은 다른 식으로 도래되었다. 담이 구를 먹음으로써 구는 무(無)의 상태를 증명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도 울컥했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도대체 사랑이, 혹독한 현실이, 주어진 짐이, 한 사람만을 갈구하고 또 그리워하는 그 굳센 마음이 무엇이길래. 책을 읽는 내내 가슴 속에 응어리를 두게 하는지.

 

아마 한동안 이 짙은 여운은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앞에 놓인 젖은 휴지와 훌쩍이는 코가 증명한다.

 


[지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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