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날'이 보여주는 모든 날에 대하여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3.0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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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고통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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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그 자체만으로 고통이 될 수 있을까. 이성복 시인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80)를 읽어나갈수록 짙어지는 생각이다. 나만 해도 가시화된 텍스트나 이미지 등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인식할 때가 대부분인데, 머리에서 수용한 그것이 가슴까지 닿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간혹 내가 잘 짜인 기계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메커니즘은 '꽤나 인간적인 존재'를 도출하고, 그것이 묘한 만족감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나를 놀라게 하는 건 스스로의 고통조차 같은 방식으로 깨달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것이 너무나 무뎌져 그것이 부재한 상태까지 고통스러워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람들이 시(詩)라는 그릇을 이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쓰거나 그리지 않으면 마주하기 어려운 우리의 고통이 너무나 많음을 느낀다.


요컨대 '오늘은 비가 왔다' 같은 여상한 말로 시작한 일기가 점점 극단을 치닫다 '인간은 수만 가지 이유로 죽고 싶어 하다가도 별거 아닌 이유 하나로 살겠다 결심한다. 오늘 비가 내려서 다행이다.' 따위의 말로 마무리되는 경우, 준비도 없이 나의 속살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 이성복 시인의 <그 날>은 그런 누군가의 일기를 닮았다고 느꼈다.

  

 

그 날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가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일상의 단편을 담담히 기술하는 것으로 시문을 연 화자는 '그 날'이라는 특정 시간대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제시한다. 마치 도금을 하듯 삶에 얇게 펴발린 고통과 아픔을 이제는 인식조차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영위하는 것은 삶이라기 보다는 그저 '생활'에 가깝다. 그저 목숨 붙이고 살아만 있는 상태. 그것이 기자로 예상되는 화자가 목격한 세상의 모순이다.

 

소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가시를 잔뜩 세워야 마땅할 기자로서의 화자는 신문사에서 노닥거릴 뿐 할 일이 없다. 아무도 그에게 고통의 일상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무사한 전방'과 '완벽한 세상'은 고통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분명히 내제되었으나 의중을 알 수 없는 불편함은 독특한 행갈이를 통해 드러나 우리를 지속적으로 찌른다. 활자들은 행의 끝에 걸려 마치 낭떠러지로 몰린 갓 태어난 독수리처럼 위태롭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마저 시 속의 인간들을 닮아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어구는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목격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본능을 일축한 문장이 아닐까. 삶이 곧 고통이고 고통이 곧 삶이라면 그것을 거세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삶의 행위'가 될 것이다. 사랑과 혐오는 등을 맞대었을 뿐 금새라도 겹쳐질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화자는 아프게 인지하고 있다.

 

시 속에 등장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고통과 삶 사이에서 선택할 권리는 있는 걸까. 마음껏 사랑해도 괜찮은 걸까. 많은 의문들이 우리를 들쑤신다. 화자가 나무 위를 날아오르는 새들 사이로 목격한 것은 이러한 의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답이 없는 것의 답을 찾는 무연한 행위는 또 다른 병을 낳기 마련이다. 고통은 이제 기이한 감각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 그렇다. 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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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고통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이런 이유로 이만큼 고통스럽다는 걸 증명해야 할 당위 또한 없다. 다만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기자로서 신문 한 귀퉁이를 내어줄 만한 일은 아니더라도 화자는 스스로의 목격자 됨을 쓸쓸히 공표한다. 이 시는 그러한 결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창녀와 여동생, 음악회와 신문사, 부츠 신은 여자와 종아리가 퉁퉁 부어오른 어머니, 다정함과 냉정함, 삶과 죽음이 리듬 없이 교차하는 곳에 선 우리 모두는 고통의 기록관과 같다. 그 일은 인간이라는 직업을 가진 우리 모두가 수행할 수 있는, 그리고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그 누구의 고통도 보편화되거나 당연시되지 않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단 한 사람만이 건강하다면, 오히려 건강한 이를 병 들었다고 여기게 될지 모른다. 병 든 것을 건강한 상태로 인식하는 세상이 온다면 삶이 더 슬퍼질 것 같다. 별 수만 가지 이유로 죽고 싶다가도 한 가지 이유로 살고 싶은 사람들을 평생 동정만 하게 될 것 같다. '그 날'의 일은 오직 그 날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날이라는 선을 주욱 늘려 삶이라는 면을 만들었을 때야 비로소 이 고통들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고통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잘 병든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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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ㅇㅇ
    •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라는 구절이 정말 와닿네요 좋은 시 소개해주셔 감사해요 에디터님의 견해와 감상도 정말 공감가요 한편으론 비교적 예전에 쓰여진 이 시가 현대 사회와 사람들에게도 울림과 공감을 준다는 점에서 시의 힘을 또 한 번 느끼고 갑니다 이 글의 제목도 시를 정말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에디터님 다른 글들도 기대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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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리
    • 그 날의 고통이 수많은 날들을 이뤄 고통이 없는 것을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날이 온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각이 많아지네요. 점점 고통에 무뎌지고 있던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고 세상의 모습들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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