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해라는 말이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벼워서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친구가 통화 끝에 말했다.
"사랑해."
음. 오. 아. 예.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나도 그 말로 되돌려주어야 할 것 같은데 "나도"라는 말 뒤에 "사랑해"라는 말이 잽싸게 튀어나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무거워서일까. 아니면 너무 가벼워서일까.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무겁다는 건, 어쩌면 아직 우리 사이가 그 무게를 감당할 만큼 공고하지 않았다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고작 몇 번의 데이트 끝에 이름과 나이, 사는 곳, 학교와 직업, 가족 이야기 같은 정보를 주고받은 사이였다. 남에서 순식간에 님이 된 사이. 그런 우리 사이에 갑작스레 사랑한다는 말은 좀 느끼한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데면데면한 사이에서 이토록 노골적인 사랑 표현이라니 오히려 진심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반대로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가볍다는 건, 내가 바라고 구하는 사랑이 그 세 글자 안에는 도무지 다 담기지 않아서 불편하다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사랑해"는 오직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말인데도, 이상하게 그 말만으로는 사랑의 질감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처음 어떤 사람을 만나 눈을 떼지 못하게 되는 순간의 불가해함,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 세상의 해상도가 달라지는 느낌, 한 사람 때문에 세계의 명암과 크기가 통째로 바뀌는 경험. 그런 것들을 정말 세 글자 안에 접어 넣을 수 있을까.
아니.
사랑해라는 말은 사랑한다는 정보 그 외에 무엇도 담고 있지 않다. 너무 뻔하고, 뻣뻣해서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고, 상상력이 동반되지 않는 감정은 피상적으로 흩어지기 쉽다.
물론.
사랑은 때로 정확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랑해"라는 말에는 사랑 쪽으로 몸을 던지기로 결심한 사람의 의지와 결기가 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오래 기다린 운명에게 마침내 받아들여지는 듯한 서러움과 혼자 버틴 시간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의 간지러움이 있다. 서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에서만 타오르는 열정도 분명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사랑은,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끝나버리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나는 사랑을 너무 사랑해서, 절대로 사랑을 '사랑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요.
2. 사랑은 절대적인 논리 : "나는 내 어머니의 해피엔드"
내가 사랑을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오래전부터 내가 믿어온 한 가지 논리가 있다.
사랑은 한 존재를 지탱하는 가장 은밀하고도 절대적인 이유라는 것.
나는 인생의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곳에 숨겨진 은밀하고 희망적인 논리를 믿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신용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부서진 얼굴을 볼 때마다 내 운명에 대한 놀라운 신뢰가 내 가슴속에 자라남을 느꼈다.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나는 항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위험과 대면하였다. 어떤 일도 내게 일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어머니의 해피엔드이므로.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46p
우연히 보게 된 글귀에 오래 붙들렸다. 어떻게 이렇게 내 얘기 같을 수 있지.
로맹 가리의 어머니 니나는 아들이 위대한 작가이자 전쟁 영웅이 될 것이라고 끝끝내 믿었다. 그리고 아들이 절망하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읽을 수 있도록 수백 통의 편지를 미리 써두었다.
미혼모의 자식이 위대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머니의 확신은 로맹 가리의 확신이 되었고, 확신은 현실이 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스무 해 동안 혼자 우리를 키웠다. 가정을 돌보고 살피는 일이 적성이었던 엄마는 아빠가 죽으면서 떠밀리다시피 세상의 복잡한 사정 한가운데에 던져졌다. 엄마는 세상이 쉽게 내뱉는 말들, 이를테면 "애비 없는 자식이라 저 모양" 같은 말들에서 우리를 지키겠다고 하늘에 있는 아빠에게 다짐했다.
그런 결기를 알턱없는 무구한 어린 것들이 치기어린 유희에 덜컥 붙들리지는 않을까.
사소한 불행에 비틀거리면서 발을 헛디디지 않을까.
얄팍한 실패와 성급한 좌절에도 기진맥진하여 고꾸라지지는 않을까.
엄마는 늘 불안에 떨었다. 조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심하면서. 매일 밤 저 문 너머로 두 아이가 멀쩡히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엄마가 나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알기에, 나는 어떻게든 내 생애에 정을 붙여보려고 애를 썼었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내 생애가 나를 몰아세울 때에도, 날이 선 운명과 허약한 의지가 서로 머리채를 붙들고 대거리를 할 때에도 엄마가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달콤했다.
엄마의 불안은, 이상하게도 내게 맹목적인 안심이 되곤 했다. 엄마가 저토록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생 어딘가에 숨겨진 불행이 있더라도 나만은 아주 쉽게 망가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나를 붙들고 있다면, 나는 아주아주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아주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렇다. 나에게 사랑이란, 어떤 존재를 지탱하는 절대적인 논리이다.
모두가 비웃고, 손가락질할 때에도 절대로 굽히지 않는 믿음이, 논리가 없는 논리가 사랑이다.
두 아이를 입히고 먹이기 위해서 추운 겨울밤, 질긴 오뎅을 꼬치에 꿰며 그 오뎅이 흐물흐물 다 불어터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사랑해"라는 세 글자는 오히려 너무 가볍고 무력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대신 엄마에게 "나는 엄마의 해피엔드"라고 말했다.
아니 약속했다.
3. 사랑은 유일한 계산법 : "로런츠 변환을 하는 일"
"뭐라고? 내가 로키의 엔진에서 나오는 빛이 페트로바스코프의 감지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을 알아내기 위해 상대성 이론을 가지고 특정 시점에서의 우리 상대속도를 계산하는 엄청난 일을 한 다음 로런츠 변환까지 했다고? 그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내 친구를 얼마나 더 오래 볼 수 있을지 알고 싶어서? 그거 좀 딱한 것 아닌가?
그렇다.
뭐, 나의 애절한 매일 일과가 끝났다. 나는 페트로바스코프를 끄고 다시 스핀 드라이브를 켠다."
앤디 위어, 프로젝트 헤일메리 626p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공간은 우주라고 생각한다. 낭만은 늘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불규칙적인 파동인데, 우주는 일상의 가장 반대편에서 그런 파동을 품고 있는 장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촐한 기준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공간, 어떤 일이 왜 일어나는지 끝내 다 설명할 수 없는 공간. 그렇기 때문에 우주에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수한 가능성은 낭만의 첫 번째 조건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 ♪ ♫ ♬ ♩ ♪라고 말하는 외계인을 만나고, 친구가 되는 일이 우주에서는 일어날 수 있다.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우주선 엔진의 빛을 쫓는 일처럼, 지구에서는 절대로 안 되는 종류의 사랑이 우주에서는 절대로 가능하다.
우주가 무대인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을 때도 아득한 공간이 주는 낭만을 느꼈다. 다만, 김초엽은 우주라는 공간과 빛의 속도를 조금 다르게 적는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질수록 함께 있다는 감각이 희미해지는 비극,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무력감. "우리가 멀어지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우리가 초속 30만 킬로미터씩 멀어지고 있다"라고 말할 때 마음이 더 메이는 이유가 있다. 감정은 때로 수사보다 정확한 계산 안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니 우주에서 친구의 뒷모습을 몇 초 더 오래 붙잡기 위해 상대성 이론과 로런츠 변환이라는 문과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세계의 언어를 동원해서 우주의 법칙과 싸우는 일은, 그 어떤 문학적인 고백보다도 적확한 사랑의 언어다.
사랑은 그렇게, 1초의 접점을 늘려내기 위해 자신의 지식과 시간과 노력을 전부 내놓는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우리가 멀어지는 거리를 안간힘을 쓰면서 계산하고 있다고 상상하면, 우리 서로 1초에 30만 킬로씩 멀어지고 있더라도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은 점점 더 줄어들지 않을까.
빛의 속도가 우리를 외롭게 할 때,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계산법이 바로 사랑이지 않을까.
4. 사랑은 세계를 바꾸는 발명 : 0이라고 쓰는 순간
숫자를 편하게 나타내려면 0이 있어야 했고, 이를 좋은 기호로 나타내야만 한다고 형식적 결핍이 말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랍인들은 0이라는 기호의 실용성에 주목해 그것을 사용했고, 그들의 계산 기술에 혀를 내두르던 유럽인들이 이를 수용하면서 결국 형식적 결핍은 극복된다. 그 '빈자리'에 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0이라고 쓰는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제 더는 숫자를 쓸 때 헷갈릴 필요가 없었다. 1 뒤에 0 하나만 붙이면 10이 되고, 하나 더 붙이면 100이 되는 장점이 있어서 아무리 큰 수를 써도 종이를 얼마 차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7-7을 0이라고 셈을 한 흔적도 남겼고, 등식을 다루기도 매우 편해졌다. 새로운 숫자 체계 덕분에 계산이 비약적으로 빨라졌고 보이지 않았던 수의 성질들까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박병하, 수학의 감각 60p
그리고 사랑은 나라는 세계를 완전히 뒤바꿔놓는 결정적인 발명이다.
박병하의 『수학의 감각』에는 0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숫자의 빈자리를 표시할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0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0이 없어도 세상은 돌아갔다. 거대한 건축물도 세웠고, 천체의 움직임도 기록했고, 법전도 만들었다. 없는 채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텅 빈 자리에 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0이라는 이름과 기호를 부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계산은 비약적으로 빨라졌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수의 성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큰 수를 다룰 수 있게 됐다. 한 번 0을 갖게 된 세계는 다시는 0이 없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0의 발명은 없어도 돌아가던 세계를,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나는 사랑도 꼭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없을 때는, 그것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로도 사람은 살아간다. 그런데 한 번 사랑이 나타나고 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들이 비로소 형태를 갖고, 혼자일 때는 몰랐던 세계의 크기가 새롭게 계산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랑이 내 곁에 자리 잡음으로써, 나의 보잘것없던 1은 어느 순간 10이 되고 100이 된다. 가늠할 수 없던 방향으로 세계가 확장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0이 없던 바빌로니아 문명이라고, 그리고 사랑은 나라는 존재가 가진 형식적 결핍을 극복하게 만들고, 성장하고 싶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5. 사랑은
무겁고도 가벼운 말을 곧잘 하던 남자친구와는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이고, 나는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나에게 "사랑해"는 때로 너무 무겁고, 동시에 너무 가볍다.
음. 누군가 내게 다시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에게 이렇게 대답해야지.
"우리는 힐베르트의 《기하학의 기초》에 나오는 점과 직선이야. 무슨 뜻인지 궁금하면 밤새도록 이 대화를 계속 '이어'가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