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의 아들로 살아남는 것, 케빈에 대하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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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들로 살아남는 것
'케빈에 대하여'는 모성애를 갖고 있지 않은 엄마가 사이코패스 성향을 타고난 아이를 기르는 과정을 어머니의 시각에서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의 평론은 대부분 '모성애란 과연 타고 나는 감정인가'에 주목한다. 그러나 나는 부모에게 의무적으로 부여되는 모든 감정을 떠나서 온전히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오로지 어머니인 에바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원 제목인, 'We need to talk about Kevin'처럼 우리는 사이코패스 성향을 타고난 아들이 모성애를 갖고 있지 않은 엄마로부터 살아남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케빈을 사랑하고자 한 에바의 노력은 모성애인가
에바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행가였다. 즉, 아이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케빈과 에바의 관계에 관심을 가질 만큼 섬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바는 케빈을 임신한 내내 우울한 감정을 느끼며 출산의 순간까지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유난히 잦았던 케빈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공사장의 소음에 유모차를 맡기며 진정한 편안함을 느끼던 에바의 얼굴에는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스스로 고통을 가하는 것이 더 편안하다는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케빈은 나이가 들수록 더 이상한 짓을 일삼았다.
에바가 방에 건 세계지도를 엉망으로 망가뜨리고, 배변 활동을 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척하고, 더 나아가서는 에바가 잠시도 편안히 있지 못하게 주위를 맴돌며 괴롭힌다. 에바는 그런 케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진심을 담아 안아주지는 못했다.
케빈이 사고를 칠 때마다 뒷수습을 하고, 아들을 마주하기 전 화내지 말자며 심호흡을 하는 에바의 노력은 또 다른 형태의 모성애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 모성애는 타고난 감정이 아니다. 그러나 에바는 그 감정을 최대한으로 흉내 내려고 애썼다.
물론 케빈은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케빈은 선천적인 사이코패스가 맞는가
분명 케빈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나는 케빈이 선천적 사이코패스가 맞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인해 내면의 가학성이 극대화된 것이라고 보았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케빈의 모든 일탈과 범죄는 어머니를 향해 있었다. 에바가 사랑하지 않는 것에는 케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만약 케빈이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면, 일반적인 아이들은 우울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가족과 단절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다만 케빈은 남들과 다르게 죄책감과 인간성이 결여된 아이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본연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잔혹한 짓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바라봐달라는 엇나간 절규였다.
케빈은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을 사랑했는가
케빈은 에바를 사랑했다. 그러나 에바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케빈이 바라보는 것은 항상 에바였다.
케빈의 친절함은 당신이 나의 관심 범위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에바의 삶을 망가뜨리고자 더욱 최선을 다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케빈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래서 사랑이 역설적으로 증오의 기반이 된 것이다.
케빈은 여동생과 아버지조차 사랑하지 않았다. 여동생은 에바의 관심을 끌기 위한 괴롭힘의 도구였고, 아버지는 에바에게 당신도 사랑받지 못하는 기분을 느껴보라는 비교의 대상이었다.
이 진실은 마지막 장면에서 케빈이 에바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을 모두 살해한 것에서 드러난다. 케빈의 대량 학살극은 에바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을 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터져 나온 자기혐오의 분출이었다.
케빈과 어머니의 포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홀로 남겨진 에바는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간다. 동네 주민들에게 살인자의 어머니라는 욕설을 듣고도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정상적인 관계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돌보듯 지속적으로 수감된 케빈을 찾아간다.
과연 케빈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가 결국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길 바랐을까, 혹은 조금이라도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맞았다고 확인하고 싶었을까.
"나는 너에게 묻고 싶단다. 왜, 대체 왜 그랬니?"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에바는 비로소 케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책임감이었는지 두 사람 모두 알 수 없었지만, 에바는 처음으로 케빈에게 물었다. 그때서야 케빈은 에바에게 두려움에 가까운 표정 변화를 보인다. 에바가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또 간절히 애원해도 볼 수 없었던 감정의 움직임이었다.
두 사람은 그리고 말없이 포옹한다. 에바는 케빈에게 다가갔고 케빈은 반항하지 않았다. 면회실을 나오는 에바의 얼굴은 처음 케빈을 마주했을 때와 같았다.
'나는 이 장면을 케빈은 결국 자신의 모든 행동이 세상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에바를 겨냥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이자, 에바는 스스로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만들어진 모성애라는 책임감으로 케빈을 받아들일 것을 결심한 순간이라고 해석했다.'
케빈이 출소한 이후에도 두 사람은 절대 정상적인 모자 관계를 이어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어머니와 아들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더라면, 둘의 결말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모성애라는 의무감과 가족이라는 족쇄 안에서 보편성을 따라가고자 노력했던 시간의 비극이었을 뿐이다.
결국 남겨진 것은 둘이다
'케빈에 대하여'는 여운이 남으면서도 뒷이야기를 절대 알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케빈을 사랑했던 모든 것은 사라지고 케빈이 사랑했던 것만 남았다. 에바가 사랑했던 모든 것은 죽었고 에바를 사랑했던 것만 생존했다.
나는 이 영화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무책임하다고 평가받는 아버지조차도, 그 누구의 탓은 없다. 단지 영화가 에바의 시각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허향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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