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장르가 30호' [사람]

'싱어게인' 30호 가수 이승윤이 불러 일으킨 바람
글 입력 2021.02.10 21:24
댓글 2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싱어게인, #30호 가수, #이승윤



 

“저는 어디서나 애매한 사람이었거든요. 충분히 예술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대중적이지도 않고, 록(음악)도 아니고, 충분히 포크(음악)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살아남는 것, 약간의 환대를 받는 것이 어리둥절했습니다.”


“어쨌든 4라운드까지 와서 제 존재의 의의를 구체화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제가 애매한 경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많은 걸 오히려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최근 성황리에 종료된 무명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에서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 ‘30호 가수’ 이승윤이 4라운드 경연에 앞서 한 이야기의 일부다.


'애매한 사람'. 언젠가부터 내내 맘속에 맴돌던 나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비범함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



미술이 좋아서 막연히 진학한 미대, 디자인과에서 나는 그리 감각적인 편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것도 아닌 ‘평범한’ 학생이다.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예술 좀 안다는 이들이 모인 곳에서 스스로 기대하고 상상한 ‘비범한’ 예술가의 모습에 미치지 않는 나의 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 때론 나보다 나은 미적 시야를 지닌 이들의 것을 엿보거나, 앞선 누군가를 한없이 질투하며 배 아파하던 순간이 시야를 흐리게 했던 것 같다.

 

 

131.jpg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한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는 달리 한참 모자란 내 모습을 자책했다.

 

 

그러나 질투와 시기로 점철된 시간 사이에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물음, 내 마음을 따라 하고픈 것들에 막무가내로 부딪힌 시도들이 존재했다.

 

이는 한동안 ‘어떤 분야에도 전문적이라 할 수 있는 깊이를 지니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나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순간이 지금에 이르러 다양한 분야에 나름의 깊이와 폭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이들은 곳곳에 존재한다



2.jpg
출처 - 유튜브 jtbc voyage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다분히 이분법적이며, 명료함과 비범함을 요구한다.

 

성공이 아니면 실패라고, 내가 걸어온 길이 모두 나의 건설적인 계획 속에 안전히 진행된 것이어야 한다고, 도전에는 뛰어난 성과가 따라와야 가치 있는 것이라고 계속 세뇌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의 문턱에서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자주 좌절하곤 한다.


나 또한 학생이라는 사실 외엔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으며,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애매한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고부터 내 주변에 그런 이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종종 놀라기도 한다. 사회의, 혹은 내가 속한 집단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이들은 곳곳에 존재한다.


좋아하는 걸 좇아 왔지만, 그것이 사회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변두리로 밀쳐진 이들에겐 애매함만이 명료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꿈을 찾아가는 여정이 길을 잃고 막연히 헤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무수한 경우의 수



그렇다 해서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것을 단순히 부정적이라 단언할 수 없다.

 

나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따라서 더 많은 걸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승윤을 보며 애매함은 긍정과 부정을 뛰어넘은 무수한 경우의 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젠 그 무수한 ‘애매함’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 낼 수 있겠다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이승윤이 그의 생존과 그를 향한 환대가 어리둥절했다고 말하는 모습에 당신은 요행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3.jpg
출처 - 유튜브 jtbc voyage

 

 

그가 자신의 애매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노력해왔는지 가늠할 순 없지만, 때론 누군가를 질투하고 때론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치열히 살아낸 시간이 결국 세상이 그를 향해 ‘장르가 30호’라고 부르는 현실을 맞이하게 했다고 생각하니, 나의 애매함도 세상에 신선한 바람이거나 기분 좋은 파란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확신은 그를 지켜보던 애매한 사람들에게도 닿아 ‘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도 세상에 애매한 사람이라는 걸 드러내도 될 것 같은데?’와 같은 용기의 씨앗이 되었으리라 기대한다. 나아가 이제까지 귀 기울이지 못했던 경계의 무수한 이야기가 넘치는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길, 조심스레 바라게 되었다.




애매한 사람들이 당당히 서는 무대



지금도 여전히 나보다 잘난 디자이너, 혹은 잘나가는 예술가를 보면 배가 많이 아프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질투 섞인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다만 이제는 경계에 서 있는 존재로서 나만이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와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더 자주 생각하는, 기분 좋은 변화를 겪는 중이다. 따라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나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기보다 ‘이것도 저것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글 초입에 소개한 30호 가수 이승윤의 말에 사회자인 이승기가 ‘‘애매함’이 30호 가수 정도의 임펙트를 가진다면 그냥 애매하게 사는 게 낫지 않냐’는 우스갯소리를 할 때, 정말로 각자의 임펙트를 가진 애매한 사람들이 더 당당히 서는 무대를 상상해보았다.

 

 

1.jpg
출처 - 유튜브 jtbc voyage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꽤 근사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승윤이라는 가수와 나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무수한 ‘애매한 사람’들이 각자의 존재라는 장르로 살기를 온 마음 다해 응원하기로 했다!

 


*덧붙여, 이승윤은 이날 무대 밖에 존재하는 수많은 ‘72호 가수’들을 대신해 운 좋게 먼저 무대에 왔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이 서 있는 무대 위에 주단을 깔고 기다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산울림의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를 열창했고, 심사위원들에게 ‘몇 년간 봤던 무대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세상은 그가 주단을 깔고 기다리는 그 무대에서 노래할 ‘72호 가수’들을 진심으로 환영할 것이다.

 

 

 

김현나.jpg

 

 

[김현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2
  •  
  • ㅅㅎ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네요.
    • 0 0
  •  
  • 박수현
    • 승윤님이 그냥 꾸며낸 말이 아니라 무대의 목적으로 두었던 것임을 알았을 때 그 진중함과 깊이와 따스함을 느꼈습니다.여기 님의 글에서 더욱 명료해지네오ㅡ울림있는 글 잘쓰십니다.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2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