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기념일 이야기

나의 기념일 이야기
글 입력 2021.01.2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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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념일마다 울었다.


기념일 하면 생각나는 것은 벽과 벽이 맞닿은 방구석, 파스스 김이 빠진 토끼 모양 풍선, 잠시 반짝이다 순식간에 밀랍과 녹아내린 불빛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다가오기 전에만 잠시 설렐 뿐 닥쳐오면 불에 닿은 얼음처럼 실체마저 남지 않아 그 시체만 추억하게 되는 가벼운 꿈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날에는 새로운 무지개색으로 편입되는 줄 알았지만, 결국 좌절된 회색빛이 눈물방울을 흘리는 기분이 된다. 그놈의 생일, 추석, 설날, 백일, 빼빼로 데이… 같은 것을 만든 사람들을 많이 원망해왔다.

 

어렸을 땐 안 그랬다. 아이에게 기념일이란 하다못해 떡고물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을 수 있는 고소하고 짭짤한 날이었던 것이다.

 

그중 제일인 생일이 다가오면 정신이 없었다. 초대장을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생일파티에서 입을 옷을 사러 가고, 음식을 준비하고 주문하느라 바쁜 엄마의 분주함 속 즐거움만을 느끼며 마룻바닥에서 나른하고 노곤하게 뒹굴고 있었다.

 

유치원 때는 희고 은은하게 반짝이는 공주님 드레스를 입고 왕관을 썼다. 초등학생 때는 값비싼 타미 힐피거 옷을 위아래로 빼입었다. 그때는 누리던 것들이 너무나 당연해서 설렘이 끝나도 괴리감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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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기념일을 쉽게 앓았다.


십수 년, 혹은 수십 년이 될지 모르는 관성을 차마 떨쳐내기는 어려웠다. 기념일을 무시하고 싶어도 여지껏 쉬던 숨을 갑자기 멈춰보라는 말처럼 어색했다. 또, 내가 아무리 고개를 돌려 외면한들 다른 사람들은 할로윈데이, 발렌타인데이, 1주년 기념일까지 열심히 챙기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구성되던 어릴 때와 달리 어떤 수업을 들을지 (혹은 수업을 안 들을지), 한 끼를 어떻게 때울지 (혹은 끼니를 거를지) 등 모든 것을 알아서 결정해나가야 했고, 기념일을 어떻게 보낼지도 그중 하나였다.


아침은 플레이팅을 한 샐러드, 점심은 계란말이와 오징어무국, 저녁은 삼겹살을 구워 먹겠다는 기대는 후라이팬 가득 쌓인 세 끼 양의 김치볶음밥이나 한솥도시락에 연명하는 현실로 변모했다. 가까운 시간에 놓여있는 기념일을 향한 제어할 수 없는 보송한 기대들은 밟으면 밟을수록 질퍽질퍽한 새까만 진흙 눈이 되었다.


여러 번의 기념일을 헛보낸 끝에 기대를 많이 덜어냈다고 생각했지만 허사였다. 작년 생일은 월요일이었다. 가고 싶었던 가게 주인이 팔을 다쳐서 임시휴무를 했다. 새로 가볼 만 한 곳을 찾아봐도 죄다 월요휴무였다. 꼭 생일에 먹고 싶어서 마음에 담아두었던 케이크집 또한 휴무였다. 그저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 먹고 케이크를 먹는 것이 기대의 전부였지만, 그게 무너졌다.

 

그냥 눈에 보이는 스테이크 집에 들어갔는데 남은 자리는 좁게 늘어진 창가 덱 뿐이었다. 생일도 아닌데 너른 책상에서 깔깔 수다를 떨며 음식을 먹는 다른 사람들이 괜히 미웠다. 입술을 삐죽빼죽하다 밥을 먹고, 또 새로 찾은 카페에서 케이크를 한 조각 사서 먹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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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은 아직도 어렵다.


최근 ‘당신은 기념일을 챙기고 있나요?’란 제목의 잡지를 읽었다. 분명 기념일 같은 날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많았으면 좋겠는데, 기념일을 보내면 보낼수록 부담스러워진다. 정말 좋은 선물을 주겠다며 구슬리는 부담스러운 낯선 사람 같다.


내 기념일 챙기기도 이렇게 벅차서 다른 사람의 기념일을 잘 챙기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하면 다른 사람 생일에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명절마다 기념 인사를 꼬박꼬박 해야 인맥이 잘 쌓인다던데, 벌써 걱정이다.


그냥, 기념일에 할법할 일들을 평소에 같이할 사람 한 명만 있으면 부담을 좀 덜 수 있을 것도 같다. 지루한 일상을 피해서 여행 약속을 잡고, 가끔 좋은 향이 나는 꽃을 주고받거나, 그냥 생각이 나서 편지도 써주고, 정말 맛있는 케이크를 나눠 먹을 사람.


요즘 나는 작은 조각케이크를 먹으려고 해도 초를 하나 꽂고 후- 분 다음 먹고 싶은 충동이 자주 든다.



+) 혹 올해 생일이 월요일이신 분들은 미리미리 가고 싶은 곳을 찾아보시길.. -월요일 생일 선배 올림

 

 



[곽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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