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끊임없이 되감기 되는 눈먼 사랑 - 영화 '블라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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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아이의 성장, 동화 <눈의 여왕>
옛날에 사악한 요정이 아름다운 것들을 추하게 보이게 하는 마법의 거울을 만들었다. 요정은 하느님과 천사들을 골려주기 위해 거울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갔지만, 하느님과 천사에게 이르자 요정의 손에서 미끄러져 여러 조각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잘게 부서진 거울 파편은 온 세상에 퍼졌다. 눈에 거울파편이 박힌 사람은 모든 것을 비뚤어지고 나쁘게 보이고, 마음이 차가워졌다.
이웃집에 사는 카이와 게르다는 장미를 키우며 친남매처럼 지내는 소꿉친구였다. 어느 겨울날 카이의 심장과 눈에 마법의 거울파편에 박혔다. 마음이 차가워진 카이는 게르다와 게르다와 함께한 모든 것들을 비웃게 된다. 카이가 썰매를 타고 있을 때, 눈의 여왕이 다가와 게르다는 것과 가족들을 잊게 하는 입맞춤을 하고 자신의 성으로 데리고 간다.
게르다는 카이를 되찾기 위해 떠난다. 여러 고난 끝에 게르다는 성에 도착하고 둘은 재회하지만, 카이는 게르다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게르다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이 남주인공의 가슴에 떨어져 심장에 파고든다. 카이는 게르다를 알아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이번에는 그의 눈에 박혀있던 거울 파편이 씻겨나갔다.
둘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두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성숙한 어른이 된 소년 소녀는 추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처럼 <눈의 여왕>에서 안데르센은 계절의 변화에 따른 삶의 흐름과 구원, 소년과 소녀의 성장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2. 눈먼 사랑, 동화 속 두 남녀
<블라인드>는 <눈의 여왕>의 성장과 구원 서사를 변형한 영화다. <눈의 여왕>의 모티브는 영화 전반에 깔렸다. 맹인 루벤이 마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장면에서 처음 제시되고, 둘이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도 동화의 내용이 언급된다. 루벤이 마리를 찾는 장면은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다니는 장면과 매치되고, 마지막 눈을 포기한 루벤의 배경을 황량한 겨울 저택이 아닌 찬란한 봄 풍경으로 연출한다.
직접적으로 영화가 묘사하듯 이들의 이야기도 사랑을 통해 거울의 파편을 씻겨내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눈에 거울의 파편이 들어간 소년'이 루벤, '차가워진 소년의 마음을 일깨우는 소녀'가 마리에 대입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는 이들의 역할은 끊임없이 치환된다.
루벤이 눈을 잃어 세상의 모든 것에 예민한 감각의 칼을 드러내는 것처럼, 마리도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부딪치는 학대로 흉터투성이가 된 이후에는 책 밖의 현실과 그 현실의 중심에 선 자신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말하자면 이들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 드러낸 나머지 추해 보이는 거울의 파편에 마음이 차가워진 '카이'로서 서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지나치게 예민한 감각과 상처는 기묘한 동질감으로 이어진다. 루벤과 마리는 열광적인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루벤과 마리는 서로를 '카이를 구할 구원자'인 게르다의 위치에 놓는다. 영화에서는 루벤이 마리를 '게르다'의 위치로 놓는 것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루벤은 마리에게 호감을 느끼는 시점부터 종종 마리와 함께 녹음이 짙은 숲 속을 함께 달리는 상상을 한다. 추운 지역에 세워진 고성, 어머니 외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저택과는 대비되는 묘사다. 루벤의 상상 속 마리는 게르다처럼 용기 있고 생기있다. 상상과는 전혀 다른 그녀의 모습을 마주한 후에도 루벤에게 마리는 게르다와 같다. 게르다가 카이를 찾아가듯, 루벤도 마리를 찾아가 다시 돌아갈 것을 간절히 청한다.
3. 동화책을 덮는 순간
하지만 영화는 동화 내용을 그대로 변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중반부까지 동화의 내용을 재현한다면, 후반부에는 영화는 환상을 통한 현실의 변화에 초점을 둔다. 이 글에서 나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동화'부분, 현실적인 인간의 반응을 다루는 부분을 '변형된 현실 부분'으로 구분한다.
후반부를 이끄는 것은 작중 등장하는 동화의 첫 문구이다. <블라인드>는 '동화가 끝나면 당신은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라는 책의 첫 문구로 시작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수치심'을 알고 옷을 챙겨입은 것처럼 '알게된다'라는 것은 언제나 변화를 수반한다. 아담과 하와가 옷을 챙겨입지 않더라도, 진실을 안 순간부터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루벤이 현실을 마주한 시점, 즉 마리가 상상 속 그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 한 그녀가 마음 편하게 그와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안 시점이 '동화가 끝난 시점'이다. 눈먼 사랑이라는 동화가 끝나고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루벤은 회복한 눈을 포기한다.
현실을 마주하기보다 기억을 잃는 것을 선택한 루벤은 <올드보이>의 오대수를 떠올리게 한다. 오대수가 현실을 외면하고 눈먼 사랑으로 돌아가듯, 루벤도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고 마리를 선택한다. 더 많은 것을 안 소년이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선택한 결과였다.
4. 열광적인 사랑의 거울에 온전한 너는 비치지 않는다
언젠가 흘러가는 강물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그 속에 또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습니다
강물을 들여다보는 나를 들여다보는 당신 나를 흘러가게 하며 또 무엇인가 내 속에 흘러가게 하는, 흐르는 구름 속에 햇빛이 축포처럼 터지고, 허나 소리들이 모두 눈감고 숨죽이는 그런 마음을 다시 내 속에 띄우는 당신
<소곡 2 - 황동규>
영화를 보고 나오는 데 황동규 시인의 소곡 2이 떠올랐다. 이 짧은 시에서 나는 강물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당신은 구름을 들여다보는 나를 본다. 그래서 당신은 강물 안의 구름이다. 동시에 내 안에는 무엇이 흐르고, 당신에 의해 나는 흘러간다. 그래서 당신과 나는 구름이다. 당신, 구름, 나는 끊임없이 치환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당신이고, 당신이 나라면,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을 가로지르고 서로의 모습을 투영하는 강물은 치환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이 기묘한 관계성은 마리와 루벤에게도 적용된다. 이들은 관계 속에서 마음을 잃은 카이와 생명력 가득한 구원자 게르다를 오간다.
맹인 남자 루벤과 흉터 투성이 여자 마리가 커튼을 하나두고 서로의 얼굴을 비비는 모습은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흐릿하게 보이는 상대의 모습은 나의 욕망을 반영한다. 맹인 루벤은 자신의 세계에 색채를 가져온 마리를 욕망하고, 마리는 자신의 흉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을 욕망하는 루벤을 욕망한다. 사랑의 열광이 합리적이고 성숙할 필요는 없다. 사랑의 비이성적 열광이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눈먼 사랑은 카이를 게르다로 만들지 않았는가?
하지만 동화가 끝났을 때, 루벤은 끊임없이 동화책을 읽어주길 바라는 아이처럼 다른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처음에 이들을 갈라놓는 눈의 여왕은 외부에 있거나, 그들 자신이 자처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이들은 서로를 자신만의 견고한 성-보이지 않는 세계, 책-에서 홀로 군림하는 눈의 여왕이 되게 하였다. 아이는 동화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성장 대신 퇴행을 선택한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이 영화를 기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비극적인 선택에 슬픔이 아니라 어떤 답답함을 느꼈다. 로맨스라는 장르가 나를 더 괴롭힌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모든 것을 불사 지르고 선택한 사랑-로미오와 줄리엣처럼-은 충분히 로맨틱하게 느껴질 수 있다. 사랑하면서 어떻게 정신이 나가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내가 영화에서 느낀 사랑은 타인을 향하기보다 그 자신에게 향해있었기 때문이다.
퇴행을 불사하고 선택하는 사랑은 로맨스로 보기에는 기묘한 면이 있다. 처음 내가 황동규의 <소곡 2>를 떠올린 것은 이들의 사랑이 나르시시즘적인 것에 가까웠다는 감상 때문이었다. 사랑이 모든 것과 대체될 수 있다고 묘사된 작품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예를들어 영화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오대수의 선택은, 무너진 인간이 마지막으로 쥐어 잡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자 마지막 절망이었다. 사랑을 삶의 목표로 삼는 마츠코의 삶을 다룬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묘사되는 사랑은 절망에도 굴하지 않는 관계에 대한 욕망에 가깝다. 이들의 선택에는 인간 실존의 아이러니함과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가 함께 녹아들어 있다. 인간은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살아가려는 의지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보다 마리를 선택한 루벤의 선택이 삶의 의지와 동떨어져 있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불편함을 느낀 것은 이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의 문법을 따라갔다는 데에 있다. <블라인드>에서는 캐릭터의 실존이 다소 부족하게 묘사되어 있다. 루벤과 마리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생명을 찾는다. 이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고독과 고통, 서로에게 투영하는 욕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작품의 분위기와 연출을 위해 감독이 의도적으로 캐릭터의 대사와 과거를 생략한 결과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선택은 사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루벤은 마리를 위해 눈을 다시 포기했다. 성장 대신 퇴행을 선택함으로써 다시 눈먼 사랑의 세계로 돌아간다.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루벤에게 마리가 전부라는 것은, 조금 소름끼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니면 단순히 이 글을 쓰는 내가 이제 로미오와 줄리엣의 '열광적인 사랑'을 로맨틱하게 받아들이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서 밝히건대, 정말 나는 루벤을 흠씬 패주고 싶었다. 마지막 선택은 정말 나르시시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루벤은 자신 곁에 떠나지 않고 함께한 마리를 욕망했다. 그가 퇴행을 통해 원한 것은 그 만의 게르다지, 정말 온전한 마리라고 할 수 없다. 눈먼 사랑을 나누는 동안 둘은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 루벤이 눈을 포기하는 행위는 마리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과 같다. 루벤은 눈의 여왕에게 납치된 게르다를 무시했다. 그는 또다시 황량한 겨울저택에 그녀를 기다린다. 마리가 보고 있는 창문에 하얀 입김을 불면서 말이다. 회색 천을 뒤집어쓰지 않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마리는, 어쩌면 이제 정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블라인드
Blind
감 독
타마르 반 덴 도프
주 연
요런 셀데슬라흐츠, 핼리너 레인
장 르
감성 멜로 드라마
개 봉
2021년 1월 14일
[손진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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