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여행의 계기는 사람 [여행]

어떤 장소가 누군가와의 기억으로 덧입혀진다는 것
글 입력 2020.12.1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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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년 전, 살면서 처음으로 혼자 세 달 간 해외여행을 떠났다.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혼자 긴 여행을 해보고 싶었고 지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발을 딛고 싶었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스페인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친구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스페인과 주변 나라들을 포함한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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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첫 도시는 바르셀로나였다.

 

가우디의 건축이 주는 비현실적인 감각과 이국적인 거리가 마냥 신기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좋진 않았다. 낯선 언어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 덩그러니 놓인 이방인이라는 기분이 먼저 들었다.

 

먼 타국까지 와서 여행을 즐기지 못하는 내 모습이 바보 같았다. 남은 세 달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여행 초반부터 슬럼프 아닌 슬럼프로 울적하던 기분은 다음 도시에서 친구를 만나고 난 뒤에야 괜찮아졌다.

 

친구와 짧게 여행을 한 뒤에 다시 혼자가 됐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혼자 하는 여행이 나쁘진 않았지만 무언가 허전했다. 결국 친구가 살고 있는 빌바오에 가기로 했다. 빌바오는 스페인 북부라 날씨도 좋지 않을뿐더러 관광지로 유명한 곳도 아니어서 전혀 계획에 없었던 도시였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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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간 친구를 기다리며 보았던 창 밖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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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퍼렇고 어딘가 을씨년스럽다며

친구와 농담했던 크리스마스 조명

 

 

열흘 간의 빌바오 여행은 내가 했던 여행 중 가장 게으른 시간이었다.

 

집 열쇠가 하나여서 친구가 학교에 다녀올 동안 나는 침대의 전기장판에 몸을 데우며 뒹굴거리다 낮잠을 잤다. 그렇게 오후 나절을 낭비하고 밤이 되어서야 밖에 나갔다.

 

그때는 12월이라 거리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조명을 구경하다가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츄러스를 사먹거나 친구와 클럽에 가서 밤새 미친 듯이 춤을 추다 집에 왔다. 친구가 좋아하는 카페를 가고 그 애가 매일 걷는 거리를 같이 걷고 친구의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날도 있었다. 여행자라기 보단 그곳에 사는 사람이 된 것마냥 지냈다.

 

한량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편했다. 계획이 없으니 무언가 봐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 속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생전 처음 와본 곳이 편해졌다. 지구 반대편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안정감을 주었고 낯선 환경에 작아졌던 마음은 이내 괜찮아졌다.

 

내 삶에 존재하지 않던 빌바오라는 곳은 어느새 친구와 오래도록 추억할 장소가 되었다.

 

*

 

그 뒤로도 나는 자주 누군가를 계기로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또 다른 계기가 되어줄 사람들도 만났다.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에 머물렀고 여행지에서 친해진 친구 때문에 그 뒤의 일정을 모조리 바꾸기도 했다. 파리에서 알게 된 친구와는 연락을 주고받다 다음 해에 마드리드에서 다시 만났다.

 

그 중엔 장소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바꿔버린 여행도 있었다. 내가 스페인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 친한 언니가 런던으로 대학원을 갔다. 런던에 처음 갔을 때는 우중충하고 추운 날씨와 복잡하고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 서울에 올라온 시골 쥐마냥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느낀 이질감에 또 갈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언니와 만나려고 다시 런던행 티켓을 샀다. 비행기표도 저렴했고 비싼 런던의 숙박비도 아낄 수 있었으니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맛집, 여행자이기에 모를 수밖에 없는 문화 차이나 유용한 팁들을 알게 되는 건 덤이었다.

 

사실 내가 언니를 만나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마 비행기표가 더 비싸거나 숙박비를 아낄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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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외곽 공항에서

런던에 처음 도착했을 때 지났던 리버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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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엔 달 모형 하나 뿐이었는데

무슨 이야길 그리 길게 했는지

 

 

우리는 서울에서도 종종 만나는 사이였지만 이렇게 오래 같이 지냈던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유학생이라는 같은 처지에 가치관도 비슷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대화를 온종일 하며 지냈다.

 

같은 전공을 공부해서 미술관을 다니며 감상을 공유하는 것도 즐거웠다. 자연사 박물관에선 달 모형이 있는 전시장에 앉아 의식이 흘러가는대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었다.

 

친구와 여행을 하면 높은 확률로 싸우게 된다는데, 언니와는 그런 것 없이 편안했다. 음식 취향, 생활 패턴, 성향이 비슷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를 당연히 여기지 않는 마음과 고마움을 아낌없이 표현했던 덕에 긴 시간 같이 지내면서도 싸울 일 없이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동시에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람이 계기가 된 여행은 여행 이상의 무언가를 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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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하다가도 5분 만에 비가 오는

변덕스러운 런던 날씨

 

 

툭하면 내리는 비와 우중충한 런던의 하늘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그때와 많이 달랐다. 완전히 불호였던 런던은 언니로 인해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런던이 좋았다기 보단 언니와 함께한 런던이 좋았던 거겠지.

 

*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를 붙잡는 여러 관계와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예전처럼 누군가를 보기 위해 무턱대고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아졌다. 올해부턴 코로나로 인해 자유로이 다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기약이 없어진 여행을 언제쯤 되찾을 수 있을지, 현실을 짊어지고 다시 또 훌쩍 떠날 용기가 또 생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일상이 된 미래가 다시 돌아온다면 나는 다시 누군가를 만나러 떠나고 싶다. 그리운 기억 속 사람들을 만나러, 이 모든 현실을 해프닝처럼 웃어 넘기며 그간의 근황을 물어보러. 그리고 그와 만날 그 장소가 새로운 기억으로 덧입혀지길, 그렇게 우리가 추억할 기억 하나가 더 쌓일 날을 그려본다.



[신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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