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리로 듣는 온라인 체험극 '더블 Double' [공연]

글 입력 2020.12.1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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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묘사를 일부 포함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며, 기획사에서도 심약자와 권장 연령 이하의 체험은 권장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구체적인 스포일러는 피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유튜브로 '보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을 느낀다. 내 취향을 어쩜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알고리즘보다 정확한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부터 공부하거나 잘 때 틀어두는 ASMR까지.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그 외에 유튜브를 잘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유튜브가 아니더라도 요즘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오디오 콘텐츠들이 많아지고 있다. 책을 읽어주는 오디오북, MZ세대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라디오 방송, 팟캐스트, Siri와 AI 스피커 등등. 사실 유튜브가 다른 앱을 켜도 소리는 재생될 수 있도록 백그라운드 재생을 만든 것부터가 이미 듣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말해준다. 심지어 영상을 보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공연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어제부터 공연을 시작한 우란문화재단과 다크필드의 온라인 체험극 '더블 Double'에 대한 이야기다.


 

 

이머시브 오디오 체험극?


 

포스터.jpg

 

 

'더블'은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온라인 이머시브 오디오 공연이다. 여기서 이머시브란 몰입을 뜻하는데 이머시브 공연은 관객이 마치 극의 일부가 된 것처럼 참여할 수 있는 공연을 말한다. 극마다 다르긴 하지만 배우와 대화를 하거나, 결말을 바꾸고, 자유롭게 무대를 드나들 수 있다. 관객이 단순히 앉아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는 장점이 있다.


'더블'이 이 이머시브를 활용하는 방법은 바로 오디오다. 책을 읽어주거나 영화의 소리를 듣는 것과 다르다. 만들어진 상황이 아니라 실제 소리를 듣는 것처럼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입체음향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내 머리 위에서 시계가 똑딱똑딱 움직이고 내 옆으로 숨 쉬는 사람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내가 있는 이곳이 무대 위인 것이다.


소리를 듣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헤드셋을 끼고 눈을 감고, 이 소리들을 따라가다 보면 보이지 않지만 상상을 통해 어떤 공간 속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을 어떤 사람을 완성하게 된다. 우리의 무대에서 들리는 소음들을 통해 공간을 상상으로 구현하고, 목소리만 존재하는 배우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각자의 무대에 각자의 배우가 서 있다.


이러한 컨셉은 원래 오프라인에서 진행이 되었던 것을 온라인으로 옮긴 것이다. 공연을 위해 우란문화재단과 협업한 다크필드는 영국의 이머시브 오디오 씨어터 극단이다. 다크필드는 40피트 정도의 대형 선박 컨테이너에 관객을 초대하여 같은 컨셉의 오프라인 공연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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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ÉANCE Trailer - Darkfield 캡처

 

 

이것을 다크필드 라디오라는 온라인 앱으로 구현시켰다. 라디오를 통해 송출되는 안내 음성을 따라 오프라인처럼 공연을 진행시킨다. 코로나 시국에도 안전하게 즐길 수 있고 원하는 시간대를 선택해 편한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최근 온라인 공연이 많아지고 있지만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기에 내 집이 무대가 되는 오디오 이머시브라는 이 독특한 컨셉의 온라인 공연이 기대가 되었다.


홀로 즐겨도 되지만 가까이 있는 상대와 함께 공연을 즐길 수 있다면 몰입감은 더욱 증대된다. (물론 티켓은 두 사람 모두 있어야 한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것이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연을 즐기기 위해서는 물과 헤드셋, 그리고 어플이 켜진 핸드폰만 있으면 된다. 식탁 앞에 앉아 조명의 조도를 낮추고 라디오 어플에서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면 기본적인 무대가 준비된다.

 

 

 

지금 내 앞의 너는, 네가 아니야



*이 부분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소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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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문화재단

 

 

정각.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라디오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안내 음성은 마치 암시를 걸듯 어떤 행위를 반복적으로 지시한다. 처음에는 이게 무얼 하는 것인지 당황스럽지만 눈을 감고 조용히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무대에 도착해있다. 한 남성이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함께할 배우이다.


차분히 주변의 구조를 알려주는 목소리와 함께 무대를 완벽하게 상상하면 된다. 식탁에는 두 사람이 앉아있다. 우리에게 목소리를 들려주는 남성은 자꾸만 혼란스러워한다.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무언가에 대해 변명하듯 말을 이어간다. 자기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얼굴은 같지만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원래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 무언가 윙윙대는 소리, 움직이는 남자의 발소리, 그리고 숨소리. 그 사이로 남자의 음성이 끈적하게 밟힌다.

 

 

 

상상력으로 완성시키는 나만의 공연



남자가 앓고 있는 것은 카그라 증후군으로 정신질환의 일종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같은 얼굴이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믿는 증상이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인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의 제목인 '더블' 역시 꼭 닮았지만 다른 누군가인 Double이라는 의미다. 무대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고 남자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파트너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가짜라고 생각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남자의 혼란스러움과 주변 소음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덮치기 시작한다. 나 역시 같은 장소에서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이 한 지인은 남자 그 자체가 된 것 같이 느꼈다고 한다.) 상황이 주는 압박감과 스릴 한가운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가 안내 음성의 공연이 종료되었다는 소리와 함께 현실로 뚝 떨어졌다. 누군가의 꿈속으로 몰래 들어갔다가 확 깨버린 사람이 이런 느낌을 느꼈을까? 20분이 짧게 느껴졌다. 헤드셋을 벗으며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평소에도 입체음향을 자주 듣는 편이었지만 들었던 입체음향 중 가장 몰입도가 높았다. 짧은 시간에 임팩트 있게 몰입할 수 있는 스토리를 구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소재와 묘사가 자극적이기 때문에 중간에 힘들었던 부분도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소리로 상상하는 만큼이 다를 터라 각자가 느끼는 체감이 다를 것 같다. 평소에 상황에 너무 이입하거나 몰입하는 성향이라면 추천하지는 않는다.


소리를 통해 공간감을 만드는 작품들은 전시회에서도 몇 만나본 적이 있어도 이렇게 공연을 소리로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해서 굉장히 특별한 체험이었다. 특히 공연은 볼거리가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편견이 깨졌다.


오프라인에서 하던 컨셉을 온라인으로 바꾼 것이지만, 오프라인 공연의 대안이 아니라 소리의 상상력이라는 특징을 입체음향이라는 기술로 완성시킨 공연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공연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이들이 어떤 공연이 더 선보일지 기대가 되는 이유이다.


'Double'의 결말은 열려있다. 마지막 시퀀스가 어떤 것을 의미할지 모두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이 소리를 매개로 상상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천 명이 본다면 천 개의 작품일 수 밖에 없다. 각자가 완성시키는 공연, 그것이 이 'Double'의 매력인 것 같다. 우리의 상상력 자체가 공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도 직접 듣고 경험하고 상상하는 것은 다르다. 이 글을 읽고 흥미가 생겼고, 주의사항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직접 해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 밤, 당신에게 뚜벅뚜벅 걸어온 누군가의 식탁에 함께 앉아보는 것이다.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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