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5장으로 읽어 보는 연극: 작가 [공연]

글 입력 2020.12.0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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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대학로를 찾았다. '작가'를 보기 위해서였다. 개요를 훑어보니 연극 제목처럼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한다. 여기서 주요 키워드가 두 개 있다. 여성과 희곡 쓰기. 그러니까, 여성의 희곡 쓰기. 영국의 작가 엘라 힉슨의 원작을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이 작품. 호기심과 기대를 잔뜩 안고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 들어섰다.

 

사무적인 안내 음성이 끝나자 공간은 고요했다. 턱. 턱. 터억. 턱. 정적을 깨는 둔탁한 발소리. 점점 무대 쪽으로 가까워졌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공연 시간에 조금 늦은 관객이겠거니, 하면서. 눈은 무대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연갈색 벽 두 개가 어긋나게 놓여있었고, 왼쪽은 테이블과 의자가, 오른쪽은 벽에 걸린 그림과 소파가 차지했다.


두 벽의 틈 사이로 배우가 대사를 치며 나올까? 이런저런 상상에 빠져있을 때쯤, 여성 관객 하나가 불쑥 무대 위로 올라갔다. 까만 마스크를 턱까지 내렸다가 다시 코와 입을 덮으며 관객석으로 내려갔다. 관객과 배우의 경계. 그 경계는 한 남자의 등장으로 무너졌다. 연극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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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작가와 연출가: 논쟁


 

여성은 두고 간 자신의 가방을 찾으러 빈 극장에 왔다. 빈 극장을 떠나지 않았던 남자는 여성에게 넌지시 질문한다. 오늘 공연이 어땠는지. 여성은 대충 대답한다. 무관심하거나 귀찮아서가 아니다. 감정을 누르는 것 같았다. 대화가 길어지면서, 둘의 사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우선 여성은 공연의 관객이면서도 희곡을 쓰는 작가다. 공연 관계자라고 얼버무린 남자는 연출가다. 여성, 즉 작가는 남자 연출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둘은 몇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연극 쓰기에 몰두하며 꿈을 키워가던 여성은 남자 연출가와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남자의 제안으로 둘은 바(bar)로 자리를 옮겼다. 들뜬 마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보여준 여성. 남자는 좋은 글이라며 칭찬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여성에게 키스를 시도했다. 자신의 공연을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며, 제집으로 초대했던 남자. 그때 여성, 작가는 열여덟 살이었다. 이 사건을 여성은 기억하지만, 남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작가는 오늘 보았던 공연에 분노했다. 여성 배우는 짧은 바지를 입고 테이블에 몸을 기대어 뒤태를 '자랑'하는 게 전부였다. 배우에게 주어진 적극적인 모션은 컵을 들어 자신의 윗옷에 물을 뿌리는 정도다. 사람들은 배우의 연기는 신경 쓰지 않고, 배우의 젖꼭지만 뚫어지게 쳐다본다. 반면, 남자 배우가 무대에 나서면 모두 그 '사람'을 궁금해한다. '무슨 얘기를 할까?', '지금 뭐 하려는 걸까?' 시각적인 자극을 주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한다.


연출가는 제안한다. 네 분노를 연극으로 써서 나와 함께 극을 올리자고. 작가는 거절한다. 이 행태를 비판하는 연극을 보여준다고 해서 시스템이 전복되거나 극적인 변화가 생길 일은 없다. 연극은 연극에 머물 뿐, 세상을 뒤엎을 움직임은 아니라는 게 이유다. 시작도 전에 부정적인 결말을 생각하는 패배 의식. 작가가 살면서 배워 온 경험의 집합체였다. 남자는 항변한다. 네가 여성이기 때문에 글을 읽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남자였으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라고. 여성이라서 유리하다고. 맞는 말이다. 작가가 남자였다면 바에 갈 일도, 글을 봐주는 일도, 집으로 가자는 초대도 없었을 것이다. 대신 공모전에서 심사위원과 지망생으로 만났겠다.


둘의 논쟁은 팽팽한 기류를 만들고, 타협점이나 전환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이 모든 것은 연기가 된다. 무대 감독이 나와 의자 네 개가 놓이고, 작가와 연출가는 배우가 되고, 연극을 쓴 진짜 작가와 연출가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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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연출가ㅡ여성 배우ㅡ남자 배우ㅡ작가: 간극


 

연극을 관람하던 실제 관객은 인터뷰 자리를 찾은 관객으로 바뀌었다. 작가는 설명한다. 방금 보았던 연극을 공연에 올리기 전에 관객의 피드백을 듣고자 한다고. 질문이나 감상을 관객에게 묻는다. 순간적으로 작가에게 모든 시선이 확 쏠렸다. 질문이 주는 긴장감, 제2장의 시작. 나의 앞 열에 앉은 관객이 세 번 질문을 던졌다.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 다시 묻고 답하고. 뒤로 갈수록 인터뷰 현장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말을 나누다 보니 작가와 연출가 사이의 갈등이 생긴 게 아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애써 감추었던 불만이 예민한 질문에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작가와 연출가를 연기했던 두 배우는 그들 사이에 앉아 물리적 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배치가 무색하게 둘은 말 수가 적었다. 여성 배우는 가끔 대답했다. 삭막한 분위기를 풀어내려는 듯 밝게 높인 목소리로. 남자 배우는 거의 말이 없었다. 갈등의 당사자는 작가와 연출가처럼 보이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작가 혼자 모두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연출가는 끊임없이 요구한다. 텐션감 높은 시작은 좋지만, 결론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연출가의 제안에 반대하며 자기 뜻을 관객에게, 그리고 연출가와 배우들에게 전한다. 소신 있는 답변은 정적이라는 피드백을 받는다. 여성 배우는 습관처럼 생글생글 웃는다.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짧은 침묵이 주는 부담감과 무게감.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일까? 무엇이길래 기승전결이 갖추어진 일반적인 전개 구조를 따를 수 없는 것인가? 답을 살펴보기엔 아직 이르다. 인터뷰가 끝나고 3장, 작가와 남자친구의 집이다.

 

 


제3장. 작가와 남자친구: 공간


 

처음으로 입체감이 등장한다. 안과 밖이 공존하는 공간, 작가와 남자친구의 집이다. 작가는 문을 열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선다. 앞치마를 두른 남자친구는 식사를 준비했다. 아주 신나 보인다. 이 평화롭던 분위기는 금세 깨진다. 작가는 자신의 연극을 영화화하자고 제안받았다. 계약서를 미리 봤던 남자친구. 계약금에 커다란 안도를 느꼈다. 이 돈이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관둘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작가의 생각은 달랐다.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단언한다.


남자친구의 회유와 토라짐, 실망과 분노가 이어졌다. 작가는 남자친구를 설득한다. 이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 어차피 생활비며 집세며 비용 대부분을 감당한 작가였으니, 근거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듣지 않는다. 계약서를 보고 덜컥 소파를 구입하고(자신이 원해서 산 게 아니라 작가가 원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하기 싫은 일을 안 하려는 결심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 쉰다.


남자친구는 하고 싶은 일만 하겠다는 작가의 말이 허상을 좇는 격이라고 대꾸한다. 돈이 현실이고, 돈이 동기라고. 작가가 하기 싫은 이유는 딱 하나다. 연극을 영화로 제작하는 순간 제작자들의 입맛에 맞게 원작이 훼손될 게 분명하다. 그리고 비유를 든다. 그 훼손은, 소중한 딸 아이에게 성범죄가 들끓는 세상을 용인하는 것 같다고. 논리적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중간중간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와 남자친구의 갑작스러운 프러포즈를 고려해보면 이상한 맥락은 아니었다.


게다가 연극 '작가'는 가부장제 사회가 만든 피해와 폐해, 구조를 타파하려는 개인의 노력과 의구심,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하려는 움직임과 현실을 마주한 무력감 등을 복합적으로 말한다. 1장과 2장에 이어 3장에서도 여성, 작가는 존중받지 못한다. 구조와 부딪히는 개인의 움직임은 정치적(제1장)이거나 허상(제3장)이라는 취급을 받는다. 그렇다. 이번 장에서도 여성 개인인 작가는 지고 만다. 하기 싫은 일을 하겠다고 말하자, 남자친구는 진심으로 기뻐한다.


작가는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선다. 무대는 다시 두 개의 공간이 생긴다. 안과 밖. 작가는 밖에 있고, 남자친구는 안에 있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수식어 하나를 붙여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는 가부장제를 벗어난, 틀 바깥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벗어난 이들은 최소한 안과 밖이 존재함을 인지한다.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차별이 밖에서는 보인다.


현실은 어떠한가. 가부장제 구조는 여전하다. 하지만 구조 밖으로 나온 개개인들이 존재한다. 바깥에 있는 이들은 말한다. 그 안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나오면 두 공간이 보인다고. 하지만 안에 있는 이들은 바깥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모두 헛소리고, 거짓말이고, 선동이고, 피해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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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연극, 작가와 연출가: 상상


 

곧 모든 조명이 꺼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문을 읊는 목소리만 들린다. 나는 눈을 감았다. 4장은 상상의 영역이다. 작가가 만들고 싶은 연극을 듣고, 머릿속으로 연극을 그려본다. 여자가 나오고, 여자는 또 다른 여자를 만난다. 둘은 숲을 노닌다. 제안한다. 같이 가볼래? 승낙한다. 둘은 강을 건넌다.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들. 이윽고, 남자 하나가 등장한다. 여자와 감정을 나누던 여자는 남자에게 끌림을 느낀다. 이야기는 마무리되지 않고 끝났다. 그저 흘렀을 뿐.


작가는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여자가 여자와 감정을 교류해도 결국 마음이 가는 것은 남자라는 의미일까. 짙은 감정을 나누고 깊은 대화를 나누어도 '여성은 여성에게 끌림'이라고 정의하지 못하지만 '여성은 남자에게 끌린다'는 사회의 정해진 기준은 손쉽게 결론짓는, 그런 세상.


연출가는 작가의 연극을 폄하한다.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연극을 꾸려낸 작가. 연출가는 고개를 젓는다. 차라리 이 정체 모를 독백은 빼는 것이 좋다고. 처음에 보여주었던 강한 텐션을 그대로 밀고 가면서 결론을 매듭지으라고. 연출가가 궁금해하는 것은 결론이다. 과정이 흥미롭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사람들은 그걸 알고 싶어 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4장이 어둠으로 시작해서 엷은 조명으로 무대를 비추고, 등장인물이 아예 없던 것이 그 이유다. 영화, 연극, 공연 등 창작물은 無에서 나오지 않는다. 현존하는 有에서 나온다. 현실을 가상에 비유한 결과물이다. 가부장제가 없는 국가는 세상에 없다. 오로지 상상으로만 채워야 하는 공간이다. 게다가 가부장제는 완결성을 지닌 구조다. 그 구조를 타파하고자 하는 이가 기승전결이 탄탄한 구조를 상상할 리 없다.


 

 

제5장. 작가와 여자친구: 거부


 

마지막 장은 앞 장에서 작가가 상상했던, 틀을 깬 형태가 등장한다. 여성과 여성의 관계. 둘은 진하게 스킨십을 나눈다. 빵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하지만 묘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기시감은 아기 이야기가 나오자 점차 선명해진다. 여자친구는 묻는다. 아기 가지고 싶어? 작가는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다. 네 남동생의 정자면 되겠지. 작가는 거부감을 비춘다. 그건 우리 아기가 아니라 너와 남동생의 아기잖아.


3장에서 언급하지 않은 장면이 있다. 남자친구가 스텝의 아기를 껴안으며 제 아기라 우기고, 작가는 아니라고 반복한다. 남자친구는 말한다. 아기가 생기면 좋을 거야. 작가는 얼결에 아기를 안았지만 떨쳐내듯이 남자친구에게 넘겼다. 다시 현재, 5장. 여자친구는 왼쪽 테이블에서 핸드폰을 만지작대고, 작가는 오른쪽 소파에서 눈치를 본다. 한 공간이지만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3장에서 남자친구의 강요를 따랐듯이 이번에도 '하겠다'고 말한다. 반색하는 여자친구는 신나게 달려 나간다.


여자친구는 딜도를 씻는다. 작가는 불안하다. 다른 사람이랑 쓴 것도 아닌데 왜 닦아? 여자친구는 답한다. 가방에 넣어뒀는데 빵 부스러기와 섞여 있어서 더럽다고. 그리고 등장한 딜도. 여자친구는 말했다. 해보지 않아서 그래. 하면 좋을 거야. 작가는 애쓴다. 좋은 감정을 꼭 느껴야 하는 것처럼. 찌푸린 미간은 펴지지 않는다. 그래도 작가는 자세를 바꾸면서까지 노력한다. 끝났다. 끔찍하다. 몸서리치듯 벗어난다. 이상한 정적. 작가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사과한다.


딜도는 남근을 형상화했다. 남근은 흔히 남성 중심 체제의 상징으로 일컬어진다. "좋을 것"이라는 강요를 가장한 권유. 작가는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반사적으로 거부한다. 체제에 반발하는 작가. 직접적이고 강렬한 메시지 전달만이 반발은 아니다. 발화자가 반대의 의사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방식이 어떻든 반발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이제 연극은 끝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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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는 피카소의 그림을 소개한다. 미술적 기법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렸던 당시 상황을 언급한다. 피카소는 자신을 두고 싸우는 여자들을 관망했다. 그리고 그림을 계속 그렸다. '게르니카'는 걸작이 된다. 작품과 작품을 그린 화가는 칭송받는다. 화가의 난잡한 사생활과 그 사생활로 피해 본 사람들에게는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는다. 화가를 만났던 여성들의 고통, 괴로움, 죽음에 관해서 아무도 묻지 않는다. 살아 숨 쉬는, 입을 열어 자신의 의사를 표하는 사람은 액자 프레임에 갇혔다. 작품을 그린 권력자는 몇 세기를 지나서도 찬사받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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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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