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글을 쓰다, 글을 읽다 [공연예술]

연극 '마우스피스'
글 입력 2020.11.1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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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궁금해. 네 이야기도, 누구나 자기 이야기가 있잖아.”

“아니요. 어떤 사람들한텐 그냥 사는 거, 그거 말곤 없는데요.”


세상은 참 넓다. 인생 또한 그에 맞춰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는 그저 일상에 불과한 것이 누군가에겐 흥미로운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를 소재 삼아 ‘대변해주겠다는’ 구실로 특정인의 하루는 밝혀질 의무가 있는 것일까? 나아가 그는 어떠한 이득을 보지 못한 채 대변인만이 직접적인 혜택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대변의 역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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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마우스피스>는 같은 도시 내 존재하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슬럼프에 빠진 중년의 극작가 리비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졌지만 이를 펼칠 수 없는 데클란. 예술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그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가까워지지만 다소 현실적인 이유로 새로운 결말을 맞게 된다.


연극을 본 사람은 공감하겠지만, 관람이 끝난 후 작품에 쉽사리 어떤 수식어를 갖다 대기 힘들었다. 누구의 편을 드는 것만 같아서 비극적이었다는 말은 못 하겠고, ‘어떤’ 결말이라고 결론 보기 전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빈곤 포르노, 문화예술의 소비법, 창작진의 역할 등 다양한 메시지들을 뒤얽혀 놓았지만, 극단적으로 나뉜 두 결말처럼 주인공의 견해차는 뚜렷이 존재한다. 필자는 ‘글’이라는 매개체를 중심으로 주인공에 따라 두 카테고리로 풀어본다.

 

 


내 마음대로 글을 쓰다: 리비



극 중 데클란의 외침을 하나의 지침으로 생각해보자. “이건 내 이야기야!”라며 자신의 이야기 사용을 철회하고 일전엔 없던 선이 그어진다. 그 제재 안에서 둘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전락한다.

 

리비는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녀가 쓰는 주제, 흐름은 그 어떠한 것도 가능하다. 설사 데클란의 이야기를 소재로 사용했더라도 그녀라는 본체를 통해 새로 태어난 것이다.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극을 받고 다르게 소화해, 또 다른 자극을 누군가에게 부여한다.


실제로 같은 경험을 해도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것처럼, 리비가 데클란의 삶을 풀기로 했기에 -그를 향한 마음은 정반대이지만- 잔혹한 결실을 보지 않아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상업적인 측면에서 자극성 없이 관심을 끌기는 쉽지 않고, 상황에 따라 충분히 다른 모습으로 펼쳐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리비가 이후에 어떤 플랜을 구상해놓았을지는 우리 모두 알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선 ‘성공’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는 걸 그녀는 이미 알기에, 이런 끝맺음(당사자가 좋아하지 않는)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가 단지 ‘글을 쓴다’라는 행위가 아닌 ‘대변’의 의도로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쓴다면, 필자는 리비를 이해하기 힘들다. 본론적으로 대변의 의미는 누군가를 대신해 의견이나 태도를 표하는 것이고, 또 다른 의미로는 남을 대신해 변상한다는 뜻 또한 갖고 있다. 즉, 권력과 지위를 지고 앞에서 대변하는 이가 아니라 그 순간조차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뉴스의 헤드라인은 ‘가라앉던 인기 극작가의 복귀’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시사회에서 데클란이 등장했던 그 순간에 리비는 다르게 행동했어야 했다. 데클란이 요구한 정당한 몫을 지불하기로 그 순간에 약속하던가,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을 무마하려 허둥지둥하던 모습을 보이지 말던가, 적어도 그녀는 그를 창피하지 않았어야 한다.

 

 


저도 글을 쓸 수 있나요? : 데클란



가슴 깊이 예술을 열망했지만 가까이하려는 노력조차 사치였던 그. 연극 중반, 데클란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보자는 리비의 제안에 이렇게 말한다. “저도 들어가도 되는 데에요?” 연극의 마지막, 그의 삶을 투영한 작품을 보러 극장에 도착하지만 티켓값을 준비하지 않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공간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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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클란이 감명받은 프랜시스 베이컨 작품 中

‘조지 다이어의 두상 연구’

(극 내에선 어느 작품인지는 소개되어지지 않음)


 

리비가 의도적으로 문화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왔을지라도, 그녀는 직업적으로 수많은 작품을 거쳐왔고 예술에 둘러싼 환경과 함께 있었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자연스레 흘러왔을 것이다. 문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던 문화 기득권인 그녀와 달리 데클란은 정 반대에 있다.


극 중 ‘리비’ 역할을 맡은 김여진 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대본을 봤을 때 살짝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연극도 그렇고 많은 부분에서 민초들의 삶이라든가 사회 약자에 대한 주제 의식을 얘기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분들이 이 연극에 참여할 수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가난과 서민의 삶은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심지어 한 명품 브랜드에서는 신발 디자인이 하나의 취향으로 자리 잡으며 소비재로 전락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삶의 반영을 동의하는 이들은 문화를 누릴 시간과 돈, 모두 갖고 있지 않다. ‘문화를 향유한다’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 또한 있을 것이다.


글 또한 같다고 본다.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을 거슬러 보면, 필자 또한 누군가의 독자에 불과했다. 그들의 글귀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지금은 필자가 필진으로 활동하는 것처럼 아트인사이트나 브런치, SNS의 여러 플랫폼을 통해 쉽게 글쓴이가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문화 창구 내에선 우리가 모두 평등하다. 문화예술을 핑계 삼아 양극단으로 나뉘는 대신, 이를 계기로 소통할 기회가 더 많아지는 그 날까지. 이미 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전문필진 박수정 tag.jpeg


 

[박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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