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카루스: 아직 날개는 타지 않았다 -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

글 입력 2020.11.1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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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예술을 정복하기에 삶은 충분하지 않고, 한 세상에서 예술을 평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림이 문제지 내 탓이 아니다. 배경이 나빴다. 난 병에 걸리지 않은 상태로 죽어 간다. 살아남기에는 너무 차가운 존재라서 죽어 가고 있다. 창밖의 화창한 날씨를 보니 끔찍하고 속이 뒤틀린다. 이렇게 느끼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진짜 미친 걸까? (61, 62)

 


마음에 목소리가 차오를 때가 있다. 물리적으로 속이 부대끼고, 머리가 무겁다고 느낀다. 발 딛고 선 현실과 바라는 이상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수록 쏟아내고 싶어진다. 참기 힘들어지고 그럴 땐 무엇이든 쓰거나 말하게 된다. 당장 죽을 수 없다면, 살기 위해서. 찰스 부코스키도 그랬던 게 아닐까.


미국 주류 문단의 이단아로 불렸던 찰스 부코스키, 그러나 그의 책은 미국 서점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했다고 한다. 출판사 직원은 그의 글에 대고 도대체 무엇을 쓴 것이냐 반문하지만, 한편 많은 이들에게는 환영받았다. 주류의 기준은 아무튼 수에서 비롯하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그의 글에는 예쁜 결론이 없다는 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게 주류가 알지 못하는 삶의 모습이니 말이다.

 

 


삶, 전시



 

통증 때문에 밤이면 엎드려 자야 했다. 열일곱 살이 된 어느 멋진 밤 한 방에 아버지를 쓰러뜨렸고 수년 뒤 아버지를 묻었지만 엎드려 자는 습관은 아직도 남아 있다.

 

내 고백을 신파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웃는 걸 좋아한다. 아니, 돌이켜 보니 엎드려 누워서 부모님이 코를 골거나 섹스하는 소리를 들으며 '122센티미터의 남자애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한 것이 웃기다. 지금 나는 183센티미터이고 다른 괴물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했다. (154)

 


뒤엉킨 실타래를 묘사하는 방법은 그냥 '실이 엉켰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풀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실타래를 손에 쥐고 이쪽은 이래서 망가졌고 이쪽은 이래서 풀리지 않는다고 보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세계를 묘사하는 방법도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언제부터 못난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어디든 깎아 둥글고 매끄럽게 만들려고 애썼던 것일까? 혹은 그러라고 배웠나. 누가, 왜 가르쳤나?


찰스 부코스키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도대체 풀 수 없는 삶이란 실타래를 푼 것 마냥 멋있는 한마디를 하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차라리 우스꽝스럽고 혼란스럽더라도 면면을 직시하는 편이 낫다고. 어떤 고통이 가져온 결과를 동정하거나, 누군가 계몽할 기회로 사용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나의 과거에 고통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고백한다.

 

그것으로 끝이다. 어디서도 의미를 찾지 않는다. 그런데 이 '쉬운' 일을 많은 사람은 하지 않고, 할 생각도 못 한다.

 

 

 

삶, 진실과 유머



 

경찰이 다가오면 늘 죄책감이 드는데 나는 죄가 있다고 느끼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죄책감과 아버지 콤플렉스가 함께 느끼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109)


훌륭한 감독이란 무서운 사람이다. 세상은 두려움으로 돌아가니까. (163)


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언제고 이런 삶의 체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훌륭한 승리처럼 느껴졌다. 와인을 마시고 공원에서 자고 굶주렸다. 자살은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였고, 그 생각을 하면 조금은 평화가 찾아왔다. (76)



그가 낱낱이 털어놓는 고백은, 꼭 삶과 이상의 괴리에 하나하나 다리를 놓는 것 같다. 그 다리 위엔 진실도, 유머도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한 데 섞여 있다. 진실은 웃기다. 혹은 우습게도 그토록 당연하게 옆에 있어서 하찮았던 그것이 진실이다. 정확히는 이 사실이 웃기다.


우리는 때론 '진실'이란 두 글자에 너무 과중한 의무를 지우려고 한 게 아닌가. 진실은 하등 대단할 게 없다. 위의 세 문단은 특히, 지난날 한 번쯤 심각하게 사로잡혔던 생각이었기에 밑줄을 북북 그으며 읽었다.

 

나는 이 진실을 깨달을 때 열병을 앓듯 아팠는데, 부코스키는 괜찮았을까? 글만 보면 그는 당연한 듯 툭 던지고 있으니 헷갈린다. 그래도 그의 태도에 의아하면서 안도할 수 있었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고.

 

 

 

삶, 작가(되기)의 하찮음



 

서른다섯 살부터 시와 소설을 써 왔다. 나만의 전쟁터에서 죽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타자기 앞에 앉아 말했다. 지금부터 난 전업 작가라고.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한 사람이 같은 직업에서 수년간 일하면 그의 시간은 다른 사람의 시간이 된다. 내 말은 하루에 여덟 시간이라도 그 시간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205)


마지막으로 글쓰기는 나에게 유일한 길이고 날 화형대에 올려 놓는다 해도 성인군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글만이 내 유일한 길이라고 믿을 거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가의 문제다. 천 명 중 한 명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 내 패배가 곧 내 승리가 될 것이다. 거절은 없다. 난 이 순간에 가능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제 글에 대한 이딴 이야기는 집어치우자. 여기까지. 기분 좋으라고 여기까지 써 줬다. (214)

 


작가가 되려는 사람 중 대부분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과, 작가의 일. 작가로 돈을 벌 수 있을 만큼이 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평생의 시간이. 소리 없는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부코스키의 글은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더 슬플 것 같은 내 현실이, 그리고 다른 작가 지망생들의 현실이 바로 가까이에 있으니까. 오히려 '기분 좋으라고 여기까지'나 써 줬다는 대목에서 푸하하 웃을 수나 있어 다행이었다.

 

 

난 굶주린 채 글을 썼다. 몸무게가 86킬로그램에서 62킬로그램으로 줄었다. 이도 헐거워져서 손가락으로 앞니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정도가 되었다. 껌을 씹자 치아는 더 헐거워졌다. 어느 날 밤 놀다가 뭔가 떨어지는 걸 느껴서 살펴보니 이가 빠져서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오른쪽 윗니였다. 난 이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이를 향해 건배했다. (326)


내가 뭘 하는지 몰랐지만 그렇게 했다. 가고자 하는 곳에 더 치중하고 내게는 신과도 같은 단순함에 몰두했다. 여유가 없고 적게 가질수록 실수나 잘못을 범할 기회가 줄어든다. 천재는 단순한 방식으로 완전한 걸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은 총알, 햇살과 같아 어둠과 지옥을 관통한다. 난 말을 가지고 논다. 계속 잘 읽히는 문장을 쓰려고 했다. 난 그렇게 놀았다. 노는 시간이 중요하다. (391)

 


몇 년 전에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생각할수록 작가가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생각은 오만한 게 아니라 내가 비로소 자유로워졌다는(혹은 달관했다는) 작은 증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가능한 까닭에는 실제로 전시에 참여했고, 작가란 칭호로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기록되기 시작했기 때문도 있다. 좋은 기회를 이어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공허함도 있다.


이렇게 작가가 되어 간다고 생각하면서 원래도 그럴 줄 알았지만, 상위 몇 사람이 받는 스포트라이트는 내게 떨어지기 힘들다는 사실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돈이 아니라 마음 편히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벌기도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류로 갈 수 없다면 더더욱.

 

담담하게 생각하면 꼭 엄청 슬픈 일은 아닐 수도 있다. 가고자 하는 곳을 가고, 단순함에 몰두하는 일은 현실의 조건을 던져버리더라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혹은 매력적이라고 착각하는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고, 다른 이들도 그랬을 테니까.. 아마도.

 

 

 

삶, 이카루스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불가능에 가까운 엄청난 반전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구하지 못하면 적어도 우리에게 세상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줬으면 좋겠다. (87)
 


그의 비법인지 모르겠지만, 외설을 낭자하게 풀어놓고 진솔함을 한 스푼 떠 넣는다. 그는 애써 희망을 거절함으로써 희망이란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는 역설의 오류를 범하지도 않는다. 그냥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한탕 시원하게 웃을 때도 있지만, 완전히 훌훌 털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삶이란 소재가 단단하게 묶여 있다.


"우리는 더운 여름을 나는 나비"라는 그의 표현이 힌트인가. 날개는 아직 타지 않았다. 아직 날고 있는 중이라고 부코스키는 썼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은 날개를 완전히 태워버리지 않았다. 날고 있는 한 바랐을 것이고 그의 글을 보는 독자도 바랄 것이다. 덥지만 계속 날기를, 어디에라도 도착하기를.

 


최근에 '아름답다'에 관한 정의를 '알다, 앓다, 안다, 아(나)답다'로 정리한 글을 어디선가 보았다. 예술, 아름다움이 앓고 알아가는 과정 전체라면 그는 완전한 예술을 했다고 느꼈다. 정확히는 이 책을 읽고 덮었을 때보다, 이 리뷰를 쓰기 위해 곱씹는 시간에 그렇다고 느꼈다.

 

이 책을 읽고 그냥 좋다고 느끼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상한 책이라고 생각하면 자기를 위해 곱씹는 시간을 한 번쯤 가져보길 추천한다.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
- PORTIONS FROM WINE-STAINED NOTEBOOK -


지은이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
 
엮은이
데이비드 스티븐 칼론
(David Stephen Calonne)
 
옮긴이 : 공민희

출판사 : 도서출판 잔

분야
외국에세이

규격
130×195(mm) / 페이퍼백

쪽 수 : 400쪽

발행일
2020년 10월 23일

정가 : 14,800원

ISBN
979-11-90234-10-8 (03840)





저역자 소개


찰스 부코스키
 
1920년 8월 16일 독일 안더나흐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건너갔고 로스앤젤레스에서 평생을 살았다. 로스앤젤레스시티컬리지를 2년 만에 중퇴하고 독학으로 작가 훈련을 했다. 로스앤젤레스시립중앙도서관에서 청춘을 보내며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니체, DH 로렌스, 셀린, EE 커밍스, 파운드, 판테, 사로얀 등의 영향을 받았다. 스물네 살 때 잡지에 첫 단편을 발표한 이후 창고와 공장을 전전하다 우연히 취직한 우체국에서 우편 분류와 배달 직원으로 12년간 일하며 시를 쓴다. 잦은 지각과 결근으로 해고 직전에 있을 때, 전업으로 글을 쓰면 매달 100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 주류 문단의 이단아에서 전 세계 독자들이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최고의 작가가 된 찰스 부코스키. 그의 작품은 그의 분신인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가 이끌어 간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도난당한 책이라는 명성만큼 수많은 예술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평생 60여 권의 소설과 시집, 산문집을 출간했으며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했다. 미키 루크 주연의 《술고래(Barfly)》(1987)를 비롯하여 그의 작품과 인생을 다룬 1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마지막 장편소설 《펄프》를 완성하고 1994년 3월 9일 캘리포니아주 산페드로에서 백혈병으로 삶을 마감했다. 묘비명은 "애쓰지 마라(Don't Try)."
 
《우체국(Post Office)》(1971), 《팩토텀(Factotum)》(1975), 《여자들(Women)》(1978), 《호밀빵 햄 샌드위치(Ham on Rye)》(1982), 《평범한 광기 이야기(Tales of Ordinary Madness)》(1983), 《할리우드(Hollywood)》(1989), 《펄프(Pulp)》(1994) 등의 작품이 있다.
 
 
데이비드 스티븐 칼론
 
《윌리엄 사로얀: 내 진실한 작품들(William Saroyan: My Real Work Is Being)》 《아르메니아의 거상: GI 구르제프와 헨리 밀러(The Colossus of Armenia: G.I Gurdjieff and Henry Miller)》 《찰스 부코스키: 햇살이여, 여기 있노라/1963~1993년 인터뷰 모음집》을 썼다. 파리를 비롯해 UC로스앤젤레스, 시카고, 펜실베이니아, 컬럼비아, UC버클리, 이탈리아유럽대학(European University Institute in Florence), 런던, 하버드, 옥스퍼드를 비롯한 유수의 대학에 출강했다. 텍사스대학 오스틴 캠퍼스(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미시건대학을 거쳐 지금은 이스턴미시건대학에서 강의한다.

 
공민희
 
부산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노팅엄트렌트대학에서 미술관과 박물관, 문화유산 관리를 공부했다.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자이자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당신이 남긴 증오》 《벽 속에 숨은 마법 시계》 《우리는 거인이다》 《유대인 수용소의 두 자매 이야기》 《굿 미 배드 미》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 《발명 콘서트》 《지금 시작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번역했다.
 
 
[이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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