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럼, 다음 체리가 열릴 때까지만 견뎌 볼까요 [영화]

<체리향기(1998)>,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글 입력 2020.11.14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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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트럭을 몰고 있다.

 

그 남자는 자신을 지나치는 누군가를 트럭에 태운다. 오지랖이 심한 편인지, 가는 데까지 데려다 주려는 모양이다. 그는 동승한 자에게 생뚱맞은 질문들을 건넨다. 진중해 보이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대화 내용은 꽤나 유쾌하다.

 

갑자기 그는 외딴곳에 트럭을 세운다. "잠들어 있는 내게 흙을 덮어줘요" - 남자의 무리한 부탁에 동승객은 당황한 눈치이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는 남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동승객은 남자의 간절한 죽음에서 도망치려 한다.

 

잠시 말동무가 되어 주었던 몇 명의 동승객이 그렇게 남자의 트럭에서 떠난다. 황량한 냄새가 매캐하기만 하다. 그때 한 노인이 조수석으로 들어선다. 노인네가 참 말도 많으시네 - 당신의 삶 이야기를 재미 좋게도 말씀하신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 지도.

 

*

 

노인은 트럭에서 내린다. 이야기보따리를 참 맛깔나게 풀어내시는 분이었는데... 홀로 모는 트럭이 오늘따라 더 외롭게 느껴진다. 문득 노인이 좋아했다던 체리 향기가 궁금해진다.

 

기다려볼까, 다음 체리가 열릴 때까지만. 조금만 견디면 나도 그 달콤하다는 체리 향기를 맡아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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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 향기>는 1997년 <달콤한 내세>, <해피투게더>, <얼음폭풍>을 제치고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당시 후보에 같이 올랐던 작품들에 비하여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남자 '바디'가, 동승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느끼게 되는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바디가 삶에 애착을 가지게 되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체리 향기'이다. 그는 동승객 노인의 삶을 전해 들으며, 소중한 일상의 가치를 되돌아 본다. 서럽고 지루하게만 보이던 풍경들은 노인으로 인해 이제 포근한 하루의 조각들로 반짝이는 듯하다.

 

언제나 삶의 기쁨을 충실하게 만끽하는 노인, 체리 향기는 얼마나 달콤했길래, 행복에 익숙한 그 노인에게마저 감탄스러웠던 것일까. - 라고 생각하며 바디는 체리 향기에 궁금증을 느낀다. 달큰함이 물씬 풍기는 체리 향기를 상상하는 그의 입에 오랜만에 군침이 돌았으리라. 그렇게 삶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그는 꿀꺽 목울대를 움직였으리라.

 

빙빙 돌기를 반복하다 멈춘 트럭에 다시 시동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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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청각 매체이다. 오늘날의 기술로는 후각적 심상을 스크린으로 구현할 수 없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그럼에도 "향기"를 영화의 중심 소재로 설정하였다. 관객은 바디와 함께, 노인이 경험했을 체리 향기를 상상해야만 한다.

 

편안한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쩌면 피곤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무료하게 마른 침만을 삼키던 어느 관객에게는, 경험해 보지 못한 이국의 체리 향기가 어느새 추억처럼 자리할 것이다.

 

 

감미로운 여운. 감질나게 단맛이 아쉬워서 입맛만 다셔 본다. "그럼, 다음 체리가 열릴 때까지만 더 기다려 보면 어때요?"

 

 

[한지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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